사회생활/세상사는 이야기

어명이오,받으시요.

淸潭 2014. 6. 27. 09:57


☞ '[조선시대 청백리 수장·5]이해
판서·정승 올랐지만 청빈생활
王 하사한 음식·녹봉도 사양


▲... 청렴넘어 청빈에 가까운 삶

불의와 타협않는 강골 모범

사대부 표준으로 칭송받아

'조선시대 수원의 청백리 수장' 네 번째 연재 주인공은 이해다. 그는(미상~1670) 조선중기 인조, 효종, 현종 때의 문신이다. 그의 자는 자연(子淵), 호는 농옹(聾翁), 본관은 함평(咸平)이다.

이해의 유년기 광해군 때는 붕당싸움에 옥사가 잇따랐다. 이에 그의 부친도 절도(絶島)에 유배되고 형은 분에 겨워 죽는다. 그는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 정사공신과 함릉군에 봉해진다.

이어 인조 2년(1624년) 개성부유수와 형조판서, 판중추부사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시호는 충민공(忠敏公)이다.

이해는 인조 16년(1638년 4월 20일) 제112대 수원부사로 부임한다. 하지만 최산립 등의 중임으로 인물로는 106번째다. 그의 염근리 녹선은 이서행의 '청백리정신(淸白吏精神)과 공직윤리(公職倫理)'와 김원태의 '역대청백리상(歷代淸白吏像)'에 근거하였다. 이해는 어떤 청백리였을까. 그가 살아온 삶의 민낯과 속살을 들여다보자.

이해의 삶은 강직한 성품과 행실로 점철된 일생이라 해도 과하지 않은 표현이다. 그는 부친의 유배와 형의 죽음 등 가족의 풍비박산에 부유한 삶 자체를 꺼렸던 것 같다. 그의 올곧은 성정과 기질은 왕조실록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현종 5년(1664년) 왕이 이르기를 "이해가 다시 상소하여 사직을 빌었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중략> 원두표와 사이가 좋았고 둘 다 정사공훈에 올랐다. 원두표는 권력을 탐하고 좋아했지만 이해는 담박한 성품에 이득과 권세를 좇지 않았다. 판정승에 올랐지만 중문 뜰의 쓸쓸함이 초라한 선비 같았다. 나이 70에 수차례 사직 상소를 청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정기적 녹봉조차 받지 않고 사직을 청하였는데, 호조에 명해 매년 음식을 내려주었다."

이해의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에 왕과 대신들마저 걱정할 정도다. 이에 현종은 수시로 녹봉과 음식을 하사하지만 그는 매번 사양했단다. 그는 공·사 불문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신에 철상철하했다.

불의와 타협 않는 강골, 원칙을 벗어남과 옳지 않음엔 단 한 발도 나서지 않는 강직한 자기관리. 이해를 조선의 목민관이요 청백리라 아니 할 수 없는 이유다.

그는 말년에 왕은 물론 모두에게서 사대부의 표준으로 불렸다. 가장 낮은 벼슬 최소한의 생활을 추구하였지만 가장 높이 우러르게 된 것이다. 낮음을 지향하는 물은 몸의 70%를 차지한다. 외면해선 안 될 필수요소로 건강의 척도다. 청렴은 공직의 물과 같다. 다분한 청렴의 순수한 공기가 곧 공직의 척도다.

이해의 생은 청렴을 넘어 청빈에 가깝다. 그에게서 흡사 검소한 김수환 추기경과 무소유의 법정스님을 떠올림은 당연하다. 사대부의 표준 이해의 강직을 본받자. 청렴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공직의 구두끈을 동여매자.

/수원시 광고물팀장 장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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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경인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