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반해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가면 곧바로 입으로 나온다. 즉 들은대로 즉시 타인에게 말하고, 조금도 자신을 수양하는 양식으로 두지 않는다. 귀와 입사이는 겨우 네치, 그 네치 사이만 신체에 머물어 있었던 것으로 된다. 그러므로, 이것을 "구이지학"이라고 한다. 이래서는 대장부의 마음과 행동을 훌류아게 할 수가 없다.
옛날 사람은 자신의 몸을 닦고 덕을 높이기 위해 학문을 했으나 요즈음 사람은 배운 것을 남에게 가르쳐서 생활의 수단으로 하기 위해 학문을 하고 있다. 군자의 학문은 자신을 훌륭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반해 소인의 학문은 생활의 도구로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묻지 않은 것까지 가르치는 것을 훤조(喧璪)라고 한다. 하나를 물으면 둘을 대답한다. 이 것을 다언(多言)이라고 한다. 훤조도 다언도 다같이 잘못이다. 군자는 묻지 않는 것은 대답하지 않으며, 하나를 물으면, 때리면 울듯이 하나만을 대답한다.
순자가 지적햇듯이 곧잘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싶어하며 모르는 바를 아는 체하는 것을 <맹자>에서는 "사람들의 병폐는 자기가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되는 것을 좋아하는 데에 있다"고 훈계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이 알고 있는 것을 남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특히 "이건 비밀이지만........."하고 서론을 늘어 놓고 남에게 속삭일 때에 느끼는 우월감은 상대의 놀라는 얼굴을 볼수록 더욱 증대된다.
이 "구이지학"과 뜻이 비슷한 말로 <논어> 양화편(陽貨篇)에 "도청도설(道廳塗說)"이 있다.
"길에서 들은 풍월을 길에서 되받아 옮기는 것(道聽而塗說)은 덕을 버리는 것이다."
앞길에서 들은 좋은 말을 마음에 간직하여 자신의 수양의 양식으로 삼지 않고 다음 길에서 곧 남에게 말해 버린다. 결국 "구이지학"과 같은 짓을 하는 것으로, 이것은 스스로 덕을 버리는 것과 같은 짓이다.
좋은 말은 모름지기 마음에 간직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덕을 쌓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