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顧草廬
후한말엽 유비는 관우,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한실 부흥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군기를 잡고 계책을 세워 전군을 통솔할 군사(軍師)가 없어
늘 조조군사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어느날 유비가 은사인 사마 휘에게 군사를 천거해 달라고 청을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햇다
'복룡이나 봉추 중 한사람만 얻으시오'
도대체 '복룡은 누구이고 봉추는 누구이란 말입니까 하고 묻자
그러나 사마휘는 말을 흐린채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그후 제갈 량의 별명이 복룡이란 것을 안 유비는 즉시 수레에 예물을 싣고
양양땅에 있는 제갈량의 초가집을 찾아 갔다 그러나 제갈량은 집에 없었다
그러나 며칠 후 또 찾아 갔으나 역시 출타하고 없었다
전번에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이거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듣자하니 그자는 아직 나이도 젊다던데 ...그까짓 제갈공명이 뭔데
형님 앞으론 다시 찾아오지 마십시오
마침내 동행했던 관우와 장비의 불평이 터지고 말았다
다음엔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아라
관우와 장비가 극구 말류한는 데도 유비는 단념하지 않고 세번째 방문길에 나섰다
그 열의에 감동한 제갈량은 마침내 유비의 군사가 되어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을 격파 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후 제갈량의 헌책에 따라 위나라의 조조,오나라의 손권과 더불어 천하를 삼분하고
한실의 맥을 잇는 촉한을 세워 황제를 일컬었으며
지략과 식견이 뛰어나고 충의심이 강한 제갈량은 재상이 되었으며 한실의 부흥을위해 전장에나가며 남긴 출사표는 세계적 명문으로 그의 충성심은 중국 역사에 전무후무 갈이 남을것이다.
이와같이 인재를 찾가 위하여 초가집에 사는 제갈량을
3번이나 찾아 인재를 발굴했다 하여 삼고초려 라는 말이 생겼는데
우리 지도자들도 그런 인재를 발굴하는 안목이 있어야 하지않을까?
자기를 밀어준 자나 친인척 또는 학교 선후배에게 보은인사나 하려다니니
항시 나라가 시끌버끌 조용한 날이 없고 ....
정국이 五里霧中같으니 惑世誣民의 국민들만 등골이 휘어질판이다.
우리 정치지도자들도 유비의 三顧草廬의 교훈을 본받아 적기적소에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굴뚝안같은 난국을 타개해주길 바라는 심정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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