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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공신의 자리마련은?

淸潭 2013. 4. 26. 10:35

정권 초 마다 '파리목숨'된 공공기관 CEO와 금융사 회장들

박근혜 정부에선 어떻게?

 

 

나지홍 경제부 기자

입력 : 2013.04.26 03:02 | 수정 : 2013.04.26 10:23

“실적 대폭 개선하고 리더십 뛰어난 내가 왜 물러나!”이렇게 버티는 공공기관 CEO를 박근혜 정부는 어떻게 하나?



	나지홍 정책팀장
나지홍 정책팀장
조선일보 경제부에서 정책팀장을 맡고 있는 나지홍입니다. 정책팀의 취재 영역은 기획재정부와 공정거래위원회, 농림축산식품부와 해양수산부 등 정부의 경제정책과 관련된 경제부처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선 5년 임기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전임 정권에서 임명된 장관이나 공공기관장이 바뀌는 사태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야간 정권교체가 아니라 여당이 정권재창출에 성공했을 때도 물갈이 인사는 어김없이 나타나죠.

김대중 정부를 계승한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3년 임기제인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과 이남기 공정거래위원장을 물러나게 했고, 박근혜 대통령도 전임 이명박 대통령과 같은 새누리당 소속이지만, 김관진 국방장관을 제외한 모든 장관들을 바꿨습니다.

최근엔 정부가 대주주인 산업은행 강만수 회장과 우리금융지주 이팔성 회장을 퇴진시켰지요.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처럼 새로 취임한 대통령이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자기 사람으로 진용을 구축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입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남중수 전 KT 사장, 이근영 前금융감독위원장,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 강만수 산업은행 회장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남중수 전 KT 사장, 이근영 前금융감독위원장,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 강만수 산업은행 회장

정부가 임명할 수 있는 CEO만 1000여개 기관장 바꾸는 ‘3단계 패턴’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드는게 있습니다. 퇴진압력에도 불구하고 임기를 채우겠다고 버티는 사람이 생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특히 공기업 CEO의 경우 임기가 대개 3년으로 보장돼 있기 때문에 본인이 자진사퇴하지 않으면 정부로서도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하지만 전례로 보면 본인이 남은 임기를 채우고 싶어도 결과적으론 거의 100% 중도퇴진했습니다. 정부가 한번 교체하겠다고 마음먹은 대상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날리기 때문이죠.

노무현 정부 때 얘기입니다. 노 정부는 출범 직후 선거 캠프에서 일했던 전직 국회의원을 정부 소유 골프장 대표로 내정했는데, 김대중 정부 당시 임명된 골프장 대표가 “내가 왜 그만두느냐”며 사퇴를 거부했습니다. 이 대표는 대기업 출신 전문경영인으로 정부 소유 골프장에 민간 경영원리를 도입해 그전까지 적자투성이이던 골프장의 수익구조를 대폭 개선했습니다. 임기가 남아있는데다 경영성과도 좋았으니 버텨도 된다고 판단한 거죠.

그런데 자진 사퇴를 거부하자 곧바로 수사당국이 내사(內査)에 착수했습니다. “털어서 먼지 안나오는 사람 없다”는 얘기처럼 개인 비리를 파고들어 쫓아내려고 한 것이죠.

수사당국이 찾아낸 것은 이 골프장의 리베이트였습니다. 당시엔 골프장마다 전동(電動)카트를 구입할 때 리베이트를 받는 게 관행이었습니다. 리베이트라고 해서 사장의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골프장 운영비로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를 당국이 횡령혐의로 걸고 넘어지자, 이 사장은 야반도주하듯 사표를 던지고 외국으로 도피해야 했습니다.

검찰은 눈엣가시같은 대상을 처리할 때 요긴하게 쓰이는 카드입니다. 남중수 전 KT 사장은 노무현 정부 마지막해인 2007년말 연임이 확정됐습니다. 체신부 장관 비서관을 지내며 공직생활을 경험한 그는 평소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연임을 전후해선 고액연봉 논란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몇개월 동안 급여를 전액 반납하고 한 푼도 안받는 등 구설수에 오를만한 일을 극력 회피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정권이 바뀌자 검찰 수사의 칼끝을 피해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먼저 구속된 계열사 사장으로부터 억대의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면서 KT 사장직에서 물러났습니다. KT는 과거 공기업이었지만 지금은 완전 민영화돼 정부 지분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정권이 바뀔 때 사장을 쫓아내는 걸 보면 정부는 KT를 여전히 공기업으로 인식하는 듯 합니다.

아무리 청렴하고 철저하게 자기관리해도 정부가 맘 먹고 뒤지면, ‘백전백패’

이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파리 목숨’이 되는 것은 공공기관장만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리딩뱅크인 KB국민은행은 정부 지분이 한 주(株)도 없는 순수 민영은행입니다. 원래 국책은행인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으로 출발한 국민은행은 2003년말 정부 지분을 전부 사들여 완전 민영화에 성공했습니다. 통합 국민은행의 초대 행장은 주택은행장 출신의 김정태 행장이었습니다. 그는 2003년 카드사태가 터지자 부실화된 LG카드에 자금지원을 하라는 정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 정부의 눈밖에 났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2004년 들어 김정태 행장에 대한 뒷조사를 시작합니다. 감사원과 금감원, 수사당국까지 죄다 동원됐습니다. 하지만 김 행장의 자기관리가 얼마나 완벽했는지, 걸리는 게 없었다고 합니다. 자신감을 얻은 김 행장은 2004년 임기가 끝날 무렵 연임 의지까지 내비쳤습니다. 하지만 이를 두고 볼 정부가 아니었습니다. 김 행장이 연임하면 정부가 체면을 구기게 되기 때문이죠. 노무현 대통령은 김정태 행장 처리에 소극적인 이정재 금융감독위원장을 전격 퇴진시켰습니다.

새 금융감독위원장의 취임 후 첫 대통령 업무보고에는 ‘김정태 행장 처리방안’이란 꼭지가 들어있었습니다. 금감위는 금융감독원을 동원해 국민은행을 대대적으로 검사한 후 국민카드와 합병할 때 회계처리를 잘못했다는 죄목을 뒤짚어씌워 김 행장을 중징계했습니다. 은행 임원이 중징계를 받으면 몇년간 금융회사 임원을 맡을 수 없기 때문에 김 행장은 연임을 포기하고 조용히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김 행장을 중징계한 죄목이 당시 금융권에선 화제였습니다. 국민카드와 합병할 때 4000억원의 손실에 대해 회계처리를 잘못했다는 것인데 이 정도 액수는 중징계 대상이 아닙니다.

금감원은 당시 “계정과목 분류 착오는 가중치 곱하기 3”이라는 규정을 찾아내 회계처리를 잘못한 금액을 1조 2000억원으로 부풀렸습니다. 대략 1조원을 넘으면 중징계 대상이 되기 때문이었죠. 금감원의 징계는 결국 나중에 재판을 통해 무리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김 행장도 누명을 벗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러난 다음이니 명예회복은 됐지만 실익(實益)은 없었던 것이죠.

박근혜 정부는 ‘전문성’외에도 ‘국정(國政)철학을 공유하는 사람’이란 조건을 붙여 공공기관장 대거 물갈이를 예고해 조만간 인사(人事) 태풍이 공공기관을 덮칠 듯 합니다. 하지만 정작 아직까지는 이명박 정부에서 임명된 공공기관장이나 금융사 회장들을 상대로 수사당국을 동원하는 사례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국민행복시대’를 표방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는 이전 역대 정부들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일까요? 최소한 KT나 국민은행처럼 정부 지분이 없는 민간기업까지 ‘정권의 전리품’ 쯤으로 여기는 구(舊)시대적 사고는 벗어던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