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강천석 주필
한경직 목사·성철스님·김수환 추기경 따라가 보라
無欲·淸貧·솔선수범·관용의 정답이 거기 담겨
요즘 들어 세간 사람들 밥상머리에 종교 이야기가 올라오는 일이 잦아졌다. 여러 종교의 집안 사정이 걱정스럽다는 투의 이야기다. 그 가운데는 풍설(風說)에 억측(臆測)의 살을 붙인 것도 적지 않다. 이해타산이 얽히고설킨 세속사(世俗事)가 만만치 않은 거라면 그 세속의 질긴 인연을 뎅겅 베 내던지고 돌아선 이들이 모인 성직(聖職) 세계는 더 녹록지 않은 법이다. 헛짚고 함부로 입방아를 찧을 일만도 아니다. 그래도 그렇지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 사회가 종교에 폐를 끼쳐왔는데 그게 언제였느냐는 듯 근년의 몇몇 사건을 들어 종교 흉을 보는 게 유행이 되다시피한 세태에 세상 참 많이 변했다는 걸 실감한다.
우리 사회가 종교에 두통거리를 안겨주던 시절, 우리들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남긴 종교계의 큰 어른으로 한경직 목사(1902~2000) 성철 스님(1912~1993) 김수환 추기경(1922~2009) 세 분을 꼽는 데 별 이견이 없을 듯하다. 세 분은 각기 다른 종교를 떠받치는 기둥이었는데도 그분들을 한데 묶는 공통 단어는 금방 떠오른다. 청빈(淸貧)이다. 한국 대형 교회의 원조인 영락교회를 일으킨 한 목사님이 남긴 유품은 달랑 세 가지였다. 휠체어·지팡이·겨울 털모자다. 집도 통장도 남기지 않았다. 성철 스님은 기우고 기워 누더기가 된 두 벌 가사(袈娑)를 세상에 두고 떠났다. 김 추기경님이 지구를 다녀간 물질적 흔적은 신부복과 묵주뿐이다. 얼마 전 추기경님의 또 다른 유품 뒷소식이 신문 모퉁이에 나왔다. 추기경님이 기증한 각막을 이식받고 시력을 되찾은 어느 시골 양반이 용달차를 몰게 됐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세 분은 엄청난 재산가였다. 각각 어마어마한 유산을 물려주었다. 목사님이 작고한 이후 개신교는 또 한 차례의 중흥기(中興期)를 맞은 듯 신도 수가 크게 늘었다. 성철 스님 열반(涅槃) 뒤 스님의 삶이 알려지면서 불교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길 자체가 달라졌다. 추기경님은 생전부터 재산을 물려주기 시작했다. 그가 천주교를 이끌던 시절 신도 수가 가파르게 증가했다. 세상을 떠난 다음 세 분의 향기는 신도의 울타리를 넘어 일반 국민들 사이로 깊고 멀리 번져갔다. '가난한 부자들'이었다.
세 분은 예수님의 말씀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던 분에 그친 게 아니라 예수님과 부처님의 삶을 지금 여기서 그대로 살아보고자 했던 분이었다. 그걸 말이 아니라 온몸으로 보여 주었다. 목사님은 설교 중에 몇 번이고 신도들을 울리고 웃기는 능변(能辯)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전설적인 목회자로 존경받았던 것은 그의 삶이 설교의 빈 구석을 채우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어느 겨울 한 신도가 목사님이 추운 기도실에서 기도하다 감기에 걸릴 걸 염려해 오리털 잠바를 선물했다. 얼마 후 그 신도는 영락교회에서 백병원 쪽으로 굽어지는 길목에 바로 그 잠바를 입고 한 시각장애인이 구걸하는 모습을 만났다. 목사님 아들도 같이 목회자(牧會者)의 길을 걸었지만 후계자라는 단어조차 흘러나온 적이 없었다.
성철 스님은 늘 신도들의 시주(施主)를 받는 걸 화살을 맞는 것만큼 아프고 두렵게 여기라고 가르쳤다. 쌀 씻다 쌀이 한 톨이라도 수챗구멍으로 흘러간 흔적이 보이면 불호령을 내려 다시 주워 밥솥에 넣도록 했다. 불교계의 큰 어른인 종정(宗正)직을 오래 맡았지만 중 벼슬은 닭 벼슬만도 못하다며 항상 종정 자리를 벗어날 틈을 찾곤 했다.
추기경님이 남긴 인생 덕목(德目)의 하나에 '노점상'이란 항목이 있다. '노점상에게 물건 살 때 값을 깎지 말라. 그냥 주면 게으름을 키우지만 부르는 값을 주면 희망을 선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씀대로 추기경님은 명동의 노점상 앞에 가끔 걸음을 멈추고 묵주를 샀다.
세 분은 평생 일편단심으로 자신이 믿는 종교의 가르침을 널리 펴고 실천하면서도 다른 종교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씀한 적이 없다. 목사님은 교파의 경계를 넘어서는 교회 일치 운동에 열심이셨고 추기경님은 성철 스님의 부음을 접하고 누구보다 먼저 조전(弔電)을 보냈다. 성철 스님은 여러 종교의 경전에도 두루 관심을 보인 분이었다.
한국 종교계는 복(福)이 많다. 오늘의 문제를 풀기 위해 멀리 밖에 나가 배울 필요가 없다. 고개를 들면 스승의 얼굴이 보이고, 고개를 숙이면 그분들의 생애가 펼쳐져 있다. 생(生)의 심지가 닳고 나서 더 환하게 세상을 비추던 세 분의 발자취를 따라가기만 해도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던 시절로 돌아가는 문이 활짝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