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불교경전

우승택 금강경 해설 제30회 <수심결>

淸潭 2011. 2. 19. 18:15

 

우승택 금강경 해설 제30회 <수심결>

 

깨달음=信解悟證 또는 信解修證.

信은 나는 절에 다닌다 우리 집 종교는 불교다 나는 관세음보살을 믿는다 라는 뜻이 아니고 진심자리를 믿는 것이 信이다. 여기 계신 부처님 진짜 부처님 아니다. 깨닫지 못한 중생들 위해 방편으로 모신 것이지 본래 부처님은 형상도 없고 모습도 없다. 그것을 아는 것이 信이다. 그 바탕 위에 거울 속 비친 그림자를 진짜 나로 생각하지 말라는 부처님 가르치심을 이해하는 것이 解다. 그래서 信解다. 그 다음 닦을 修는 앞으로 할 깨달음의 주제다. 이렇게 닦아 나가다 보면 저절로 업장이 떨어져나가고 일체 세간 천 인 아수라들이 작동해 생각과 기억과 감정으로 만들어진 나 자신이 아니라 좀 더 밝은 지혜에서 나오는 생각과 행동들로 보살행을 많이 하게 돼 복덕과 지혜가 따라온다는 것이다. 복덕과 지혜는 쫒아가는 것이 아니다.

 

수심결<修心訣> – 고려 중기 보조국사 지눌이 깨달음과 수행의 방법을 논한 저서

 

보조국사 지눌스님<1158~1210> 송광사에 계셨다. 옛날 개성과 송광사가 얼마나 먼가? 지눌스님께서 수심결을 쓰셨다. 수심결은 깨달음에 관한 내용이다. 성철스님은 돈오점수를 주장하신 태고 보우스님보다 돈오돈수를 주장하신 지눌스님을 치셨다. 그러나 재가자와 출가자는 다르다. 재가자 입장에선 돈오점수를 공부하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지눌스님의 수심결 읽어드리겠다. 책 보면 자꾸 생각과 기억으로 하려고 하니 책 보지 말고 몸으로 듣기 바란다

 

돈오돈수 닦아야 할 것이 없는 절대 경지의 깨달음

돈오점수 깨닫고 나서 점차적으로 남아 있는 티끌들을 수행을 통해 닦아 가는 것

    

깨달음에 대하여

우주법계가 다 통화되어 있어<19 법계통화분> 이제는 세상의 참 모습을 아시는 도반님들이 눈앞의 형상과 모습에 속지 말고<20 이색이상분> 귀에 들리는 경 읽는 소리와 글자에도 얽매이지 말고<21 비설소설분>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얻을 것도 없고 이 업식으로는 하나도 얻는 것이 없음을 아시어<22 무법가득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아로서 응무소주 이생기심 하시어<23 정심행선분> 세간의 모든 유위의 복이 부처님의 밝은 이 금강경 지혜를 받음과는 비교할 바 없다는 <24 복지무비분>을 터득하시어 관세음보살님 등 제불보살님이 나투어서 베푸시는 化作의 행위를 하심에 <25 화무소화분>의 가르침대로 행하시어 일체 부처가 다 형상 없고 소리 없는 각자의 마음자리에 이미 부처가 있다는 사실을 아시어<26 법신비상분> 금생에 받은 이 몸과 이 마음이 다 자성불의 법당임을 깨달아<27 무단무별분> 아시되 순간순간 망녕되이 일어나는 모든 욕심을 놓아 化作하여 복을 짓되 작복이건 무위복이건 그 복을 받을 내가 없기에 복을 탐하지도 않는 <28 불수불탐분>의 가르침대로 사시어 반야의 지혜와 용기로 당당한<29 위의적정분>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 태어나실 시기가 도래하였기에 자랑스러운 우리 조상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修心訣을 드립니다.            

 

화작<化作> – 불보살이 신통력으로 가지가지의 모습이나 사물을 만들어 냄.

관세음보살이나 부처님께서 중생을 도울 때 진짜의 모습을 도와줄 수 없고 거울 속 비친 가짜 모습을 도와주기 때문에 화작이다. 몸으로 공부해야 한다. 몸 함부로 하면 몸으로부터 나중에 과보 받는다. 그러면 나이 들어 공부 못하니 몸에게 잘해야 한다. 복 받아봐야 거울 속 그림자가 받는 것이다. 그러니 복 탐할 필요 없다. 짓기만 하면 된다.  

 

1.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부처를 찾아라.

어리석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며 받는 고뇌는 불타는 집 속에 갇혀서 받는 고통보다도 더 하다. 어찌 그대로 머물면서 고통을 받고만 있는가?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부처를 찾는 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부처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부처는 다른 것이 아니라 곧 내 마음이다. 그러니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으려 하는가? 이 육신을 떠나 따로 있지 않다. 우리의 육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영원하지 못하므로 생겨났다가 죽어 없어진다. 그러나 참 마음<眞心>은 모양이 없는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육체는 죽으면 흩어져서 다시 본래의 요소인 지수화풍으로 되돌아 가버리지만 마음<一物>은 항상 신령하여 하늘과 땅 온 세상에 가득하고 영원하다고 하였다.   

 

2.자기의 마음이 참부처이다.

애달프다. 요즘 사람들은 어리석어 길을 잃어버린지 오래되어 자기의 마음이 참 부처인 줄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밝은 성품이 참다운 진리<眞法>인 줄을 모른다. 진리를 구하려 하면서도 높은 성인들만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부처를 찾으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살피지 않고 먼 곳에서만 구하려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진리의 법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런 뜻을 그릇되게 믿은 채로 불도를 구한다면 그런 사람은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을 부처님 앞에 몸을 불사르고 팔을 태워서 공양하고 뼈를 부수어 골수를 내고 피로 먹을 삼아 경전을 쓰고 하루 아침 한 끼만 먹으며 눕지도 않고 항상 앉아 선정을 닦고 뿐만 아니라 모든 대장경을 다 읽고 온갖 고행을 닦는다 해도 그것은 모래를 삶아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단지 고생만 할 뿐 아무 이익이 없는 어리석은 일이다. 오직 자기 마음이 부처인 줄 알면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진리의 가르침과 한량없는 묘한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의 중생들은 모두 부처의 지혜와 덕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허망된 생각까지도 모두 부처의 원만히 깨달은 묘한 마음<如來圓覺心>에서 나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오직 마음을 밝힌<明心> 분들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마찬가지로 마음을 닦은 분들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수행할 사람들도 마땅히 이러한 진리를 의지해야 한다. 바라건대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마음 밖에서 진리를 구하지 말라. 마음의 성품은 깨끗하여 번뇌망상에 물들지 않아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히 성취된 것이니 오직 망녕된 생각만 버리면 곧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3.불성이 주인공이다.

묻습니다. 부처의 근본 성품<佛性>이 현재 이 몸에 있는데 어째서 저는 지금 불성을 보지 못합니까? 다시 자세히 설명하셔서 저로 하여금 깨달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답한다. 그대의 몸에 있는 데도 그대 스스로가 보지 못할 뿐이다. 그대가 하루 종일 배고프고 목마른 줄 알고 춥고 더운 줄도 알고 화를 내고 기뻐하기도 하는 데 이것은 결국 무엇이 있어서 그렇게 하겠는가? 육신은 지수화풍 등 4가지 구성요소가 모여서 된 것이나 그 바탕은 완고하여 감정이 없는 것이므로 어찌 사물을 보고 듣고 알고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능히 사물을 보고 듣고 알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것은 틀림없이 그대의 불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임제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육신을 구성하는 4대는 진리의 법을 설하지도 듣지도 못한다. 허공 또한 진리의 법을 설하지도 듣지도 못한다. 오직 그대의 눈 앞에 뚜렷이 밝은 형상이 없는 한 물건<一物>만이 진리의 법을 설하고 들을 줄도 안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이 없는 한 물건<一物>이란 바로 모든 부처의 바탕<法印>이며 또한 그대의 본래 마음이다. 바로 이렇게 부처의 성품이 현재 그대의 몸 안에 있는데 어째서 그것을 밖에서 헛되이 찾으려 하느냐?

 

지수화풍으로 된 사람 몸 죽으면 아무 것도 못 본다. 똑같이 있는데 아무 것도 못 본다. 그런데 우리는 본다. 영혼이 본다고 하지만 그 영혼은 생각과 기억과 감정이고 그 생각과 기억과 감정은 거울 위에서 노는 것이기 때문에 거울이 있기 때문에 본다는 것을 지금 말씀하고 있다. 거울이 없으면 생각 기억 감정도 없다. 거울이 만약 하얗지 않고 까맣다면 그래도 없다. 그래서 아주 나쁜 놈들은 아무 것도 못 보는 것이다.   

 

4.그대가 바로 부처이다.

어떤 스님이 귀종스님께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그대가 바로 부처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깨달은 후에 닦아서 밝은 마음을 보호하고 유지해야 합니까? 티끌 하나가 눈 속에 들어가니 실체가 없는 허공 속의 꽃<空花>이 어지럽게 날린다. 귀종스님은 이 말을 듣고 알아차린 바가 있어 곧 깨달음을 얻었다. 만약 위에서와 같이 수행자를 깨달음의 문으로 이끌기 위해 선종의 조사스님들의 공안을 간절히 참구하여 믿음과 이해가 생겨 깨달음을 얻는 바가 있으면 바로 옛 성인들과 함께 손을 잡고 갈 것이다.

 

거울에 비친 그림자가 보이니 아! 거울이 있구나 안다는 말이다.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자신이 보게 되니 아! 내가 진심이 있으니 번뇌가 보이는구나 하고 진심자리를 찾아오라는 말이다. 그래서 티끌 보고 불성을 깨닫는 것이다

 

5.깨달음과 수행.

일반적으로 진리의 길에 들어가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요약해서 말하면 진리를 듣고 단번에 깨달음을 돈오의 수행방법과 점차로 닦아서 깨달음을 얻는 점수의 수행방법 2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진리를 듣고 단번에 깨달음을 얻고<頓悟> 동시 닦음도 완성되어 더 닦을 것이 없게 된 頓修의 경우가 가장 높고 뛰어난 근기를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지난 전생부터 과거를 미루어 보면 이미 여러 생애 동안 깨달음을 의지해 닦아 점차로 익혀 오다가 현생에 이르러 진리를 듣자마자 곧 깨달아 한 순간에 닦음까지 완성된 것이니 사실은 이것 역시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頓悟漸修의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돈오와 점수 이 2수행방법은 모든 성인이 지나온 길이다. 즉 예부터 모든 성인들이 먼저 깨닫고<頓悟> 뒤에 닦았으며<頓修> 이 닦음에 의하여 진리를 확실하게 알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통력은 깨달음에 의해서 점차로 수행했을 때 나타나는 것이지 깨달았을 때 바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논리적인 이치로는 돈오하면 깨달음과 동시에 모든 번뇌가 녹여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한꺼번에 없어지지 않으므로 차례차례 소멸된다고 하였다. 규봉스님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뜻<先悟後修>을 깊이 밝히어 말씀하시기를 얼어붙은 연못이 모두 물인 것을 알지만 햇빛을 받아야 녹고 보통 사람이 바로 부처인 것을 깨달았지만 진리의 힘<法力>을 빌려 익히고 닦아야 참 부처가 된다. 얼음이 녹아야 물이 흐르고 물을 끌어대야 손을 씻는 물의 작용이 나타날 수 있듯이 망령된 생각이 모두 없어지면 마음이 모두 신령스럽게 통해 반드시 신통과 광명의 작용을 나타낸다고 했다. 이와 같이 신통력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 수행을 닦음으로써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열반하신 혜암스님 7일만에 깨닫지 못하면 영원히 깨닫지 못한다는 법문하셨지만 7일만에 어떻게 깨닫나? 깨닫기 전 수행은 한 700년 하셨을 것이다. 금생의 이 몸 말고 통째로 보면 쭉 닦아온 것이지 돈오돈수는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 말하고 계신 것이다. 제가 도통한 사람처럼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오셨다는 것은 예전부터 닦아오던 습기 때문에 오신 것이다. 스스로에게 점수를 낮게 주지 말라. 자신이 자신에게 점수 주는 것처럼 바보 같은 짓은 없다. 이런 사람은 무아를 모르는 사람이다. 모든 것은 순간순간 바뀌기 때문이다. 수행=방하착 이다. 거울 속에 비친 생각 기억 감정 다 내려놓으라는 소리다.

 

6.깨달은 후에도 계속 닦는 이유.

묻습니다. 스님께서는 돈오와 점수의 2문이 모든 성인들이 거쳤던 수행방법이라 하였고 깨달음이 돈오라면 왜 계속해서 점점 닦음이 필요하며 닦음이 점수라면 그것으로 수행이 완성되었을 텐데 왜 돈오를 또 말씀하십니까? 돈오와 점수의 뜻을 다시 한 번 설명하시어 남은 의심을 풀어주십시오.

답한다. 깨달음<頓悟>이란 보통 사람이 어리석어 미혹했을 때 지수화풍 등의 4대를 진짜 자신의 몸둥이라 착각하고 그릇된 망상을 마음이라 착각하고 자기의 성품이 진리의 부처<眞法身>인 줄을 모르고 자기의 신령한 마음<靈知>이 진실한 참 부처인 줄 모르고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헤매다가 갑자기 큰 스승의 가르침으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에 마음의 빛을 돌이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을 말한다. 이 성품의 본 바탕에는 본래부터 번뇌가 없고 완전한 지혜의 성품이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어져 있어서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것을 頓悟라 한다. 점수란 비록 본래의 성품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닫기는 했지만 지난 날 오랫동안 익혀 온 습성과 버릇은 갑자기 모두 없애기 어렵다. 그러므로 깨달음에 의지해 닦고 점차로 익혀서 깨달음의 결실이 이뤄지고 오랫동안 수행을 통해 성인의 자질을 길러서 마침내 성인이 되니 이를 점수라 한다. 비유하면 어린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감각기관이 갖추어져 있음은 어른과 조금도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당한 세월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어른과 같은 구실을 하는 것과 같다.  

 

회광반조 자신의 내면 세계를 돌이켜 반성하여 진실한 자신 불성을 발견함.

돌이켜 보는 것이 회광반조다. 거울 그 자리로 돌아가야지 Come back to this moment! 

 

7.마음을 찾는 방법.

묻습니다. 무슨 방법으로 한 생각에 문득 자신의 본성<自性>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답한다. 오직 그대의 마음이다. 다시 무슨 방법이 따로 있겠는가? 만약 방법을 써서 다시 알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의 눈을 보지 못하니 눈이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눈을 찾는 것과 같다. 이미 자기 눈인데 다시 볼 필요가 무엇인가? 눈을 볼 수는 없지만 확실히 내 얼굴에 붙어 있는 줄을 알아 잃지 않은 줄 알면 그것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다시 또 보려는 마음도 없으면서 어떻게 보지 못하니 없다고 한다. 자기의 신령스러운 앎<靈知>도 이와 같아서 이미 자신의 마음인데 어찌 다시 알려고 하는가? 만약 알려고 한다면 얻을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니 다만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닌 줄을 알면 이것이 곧 성품을 보는 見性이다.

묻습니다. 근기가 아주 높은 사람은 들으면 곧 쉽게 알겠지만 그렇지 못한 보통 이하의 사람은 의혹이 없지 않을 것이니 다시 쉽게 방편을 말씀하여 어리석은 사람들로 알아 듣고 깨달을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답한다. 진리의 도란 인간의 인식작용을 초월한 세계이므로 알고 모르는데 있지 않다. 그대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깨달으려는 마음을 버리고 내 말을 들어라. 온갖 일과 모든 세계는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다. 그러므로 망령된 생각도 본래 고요하고 티끌 같은 객관의 대상도 또한 본래 실체가 없는 공한 상태이다. 모든 세계가 실체가 없는 공한 세계임을 아는 그곳에서는 신령스럽게 아는 靈知가 어둡지 않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요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영지의 마음이 바로 그대의 本來面目이며 3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스님과 천하의 큰 스승들이 서로 비밀히 전한 진리<法印>이다. 만약 이 마음만 깨달으면 참으로 다른 과정이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부처님의 경지에 올라 모든 행동이 삼계를 초월하여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서 단번에 의심을 끊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되고 자비와 지혜가 하나 되어 자신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면 인간과 하늘의 한량없이 귀한 공양을 받게 되니 하루에 수만 냥의 황금을 시용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대가 만약 이와 같으면 참다운 대장부이며 평생에 할 일을 마친 것이다.    

 

파망현진 파사현정<破妄顯眞 破邪顯正> - 邪見과 邪道를 깨고 정법을 드러내는 일

 

잘못된 생각과 기억과 감정을 자꾸 내려놓게 되면 진리는 저절로 드러난다는 뜻이다. 진리<거울>를 따로 구하게 되면 진리<거울>는 절대 구할 수 없다. 그림자만 지우면 거울은 저절로 나타난다.

이것이 불이문에 있는 여러분과 화엄성주님과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다. 불이문 입구에서 우리의 생각과 기억과 감정을 다 내려놓게 되면 일체 세간 천 인 아수라가 다 도와준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린 여전히 뭔가 아까워서 못 내려놓고 있다. 놓으면 꼭 죽을 것 같지만 사실은 놓아야 산다.

 

8.마음으로 보고 듣는다.

묻습니다. 저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떤 것이 고요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영지의 마음<空寂靈知之心>입니까? 답한다. 그대가 지금 나에게 묻는 그 마음이 바로 그대의 공적하고 신령스럽게 아는<靈知> 마음이다. 어째서 안으로 돌이켜 보지 않고 밖에서 찾는가? 내가 이제 그대의 능력과 근기에 따라 바로 본래의 마음을 가리켜 깨닫게 할 테니 그대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내 말을 잘 들어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보고 듣고 웃고 말하며 성내고 기뻐하고 옳고 그른 온갖 행위와 동작은 필경 무엇이 그렇게 하도록 하는가 말해 봐라. 만일 육신이 그렇게 한다면 사람이 갑자기 죽어서 몸은 아직 썩지 않았는데 어째서 보지 못하고 귀는 듣지 못하고 코는 냄새를 맡지 못하고 혀는 말하지 못하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손은 잡지 못하고 발은 걸어다니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보고 듣고 움직이는 것은 그대의 본래 마음<本心>이지 육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육신을 이루고 있는 지수화풍 등의 4가지 요소인 4대는 그 성질이 실체가 없고 여러 요소가 인연화합으로 잠시 모습을 갖추고 있는 공의 상태이므로 마치 거울 속에 비친 영상과 같고 물 위에 비친 달과 같이 잠시 모습을 나타내다가 없어질 허망한 것이다. 이러한데 어떻게 육체가 항상 뚜렷이 알고 밝아서 한량없는 묘한 작용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반야심경 사경이나 독경하실 때 空 나온다. 그 공은 인연이고 연기라 했지만 거울 속 그림이라 하면 좀 더 명확히 이해될 것이다. 거울 위에 나타난 몸 거울 위에 나타난 생각 기억 감정을 空이라 하는 것이다. 거울을 이해 못하면 空 절대 이해 못한다.

 

9.마음은 형상이 없다.

옛 선사의 말씀에 마음이 묘한 신통과 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마치 일상생활에서 항상 하고 있는 물을 물을 긷고 나무를 운반하는 것과 같다 했다. 진리에 들어가는 길은 많지만 그대에게 한 가지 길을 가리켜 근원의 마음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그대는 지금 까마귀 우는 소리와 까치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가? 예 듣습니다. 그대는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들어보라. 과연 그곳에도 정말 많은 소리가 있는가? 저의 마음 속에는 어떤 소리도 어떤 분별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기특하다. 이것이 바로 관세음보살이 진리에 들어간 문이다.

내가 다시 그대에게 묻겠다. 그대가 말하기를 거기에는 일체의 소리와 일체의 분별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그것은 허공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본래 마음은 공<>하면서도 공하지 않아서<不空> 환희 밝아 어둡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공하지 않은 것의 본체인가? 모양과 형상이 없으므로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이색이상> 이것이 모든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의 생명이니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

모양이 없는데 크고 작은 대소가 있겠으며 크고 작음이 없는데 어디 한계가 있겠으며 한계가 없으므로 안과 밖 즉 內外가 없고 안팎이 없으므로 멀고 가까움 즉 近遠도 없으며 멀고 가까움이 없기 때문에 저것과 이것 즉 彼此의 대상도 없다<정심행선> 피차가 없으므로 가고 오는 왕래도 없고 가고 옴이 없으므로<위의적정> 나고 죽는 생사도 없다. 생사가 없으므로 옛날과 지금의 시간관념이 있을 수 없고 옛날과 지금이 없으므로 어리석음과 깨달음도 없다.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범부중생과 성인도 없으며 범부와 성인이 없으므로 더럽고 깨끗함도 없으며 더럽고 깨끗함이 없으므로 옳고 그름인 是非도 없고 시비가 없으므로 모든 이름과 말을 붙일 수도 없다<무법가득> 모두가 다 본래 없으니 모든 감각기관과 감각의 대상과 망령된 생각 또는 온갖 모양과 이름과 말이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어찌 이것이 본래부터 비고 고요하며<空寂> 본래부터 아무 것도 없는 것<本來無一物>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모든 사물과 세계가 공한 곳에 신령스럽게 아는 靈知는 어둡지 않고 밝아서 생명이 없는 무정물과는 달라서 성품이 스스로 신령스럽게 안다. 이것이 바로 그대의 공적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靈知의 청정한 마음의 본체이다. 이 청정하고 공적한 마음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깨끗하고 밝은 마음이며 또한 중생의 본바탕인 깨달은 성품<本源覺性>이다. 이것을 깨달아 지키는 사람은 한결 같은 진리<眞如>의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고 해탈할 것이며 이것을 모르고 등지는 사람은 오랫동안 육도에 나아가 윤회의 고통을 받을 것이다. 미혹한 어리석음과 깨달음은 다르지만 그 근원은 하나이다. 그러므로 법이란 중생의 마음이다 라고 한 것이다. 이 공적한 마음<空寂之心>은 성인이라고 해서 더하지도 않고 보통 사람이라고 해서 덜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성인의 지혜에 있어서도 더 빛나지 않고 보통 사람의 마음에 숨어 있어도 어둡지 않다 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 부처와 조사가 보통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잘 보호하고 살필 수 있음이다.     

 

까마귀 우는 소리 내려놓고 까치 지저귀는 소리 내려놓고 나니 아무 소리 들리지 않는 거울의 본 바탕으로 들어왔다는 소리다. 수월보살 기도성취 요령 말씀드린 대목이 바로 이 말이다. 놓기만 하면 된다. 거울이 있기 때문에 분별 판단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만 알면 그 다음은 의심할 것이 없다. 다 거울 위에서 일어나는 그림자 일이지 내 본래자리는 아니란 소리다. 예전에 도인스님들이 길 다니다 저녁에 해가 지면 절 앞 개울가에 앉아 자기가 자기에게 물 갖다드린다. 이런 자기 거울자리를 불성이라 한다. 주인공아! . 자문자답하는 것이다. 너 오늘도 많이 속았지? . 내일은 많이 속지 마라? . 그리고 절에 들어갔다. 거울이 있는 것도 알고 자기 모든 생각 기억 감정이 거울 속 그림자인 것을 아는데 자꾸 그림자에게 속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자신을 경책한다. 여러분도 이렇게 해 보면 입에서 저절로 참회진언이 나온다.          

 

10.습성은 갑자기 없애기 어렵다.

묻습니다. 이미 이러한 이치를 깨달았으면 다시는 깨달음의 단계나 계급이 없다고 했는데 무엇 때문에 깨달은 뒤에 다시 닦아서 점차로 익히고 점차고 이룰 필요가 있겠습니까?

답한다. 깨친 후에 점차로 닦는 뜻을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는데 아직도 의심을 풀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거듭 설명하겠으니 마음을 깨끗이 하고 잘 들어라. 보통 사람은 아득한 과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천상 인간 아귀 지옥 축생 등의 五道의 세계를 헤매고 나고 죽으면서 나라는 생각에 굳게 집착해 뒤바뀐 망상과 어리석은 무명의 종자와 익힌 버릇이 오랫동안 한 데 어울려 그 성품을 형성해 왔다. 그래서 금생에 이르러 자기의 성품이 본래 공적하여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단번에 깨닫더라도 그 오랫동안 익혀 온 옛 습성은 갑자기 끊어버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어려운 환경과 즐거운 상황을 당하면 화를 내고 기뻐하며 옳고 그르다는 시비의 생각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여 밖의 대상에 끄달리는 번뇌가 그 전과 다름이 없다. 그러니 만약 지혜로서 더욱 공부를 더하고 힘을 쓰지 않으면 어떻게 어리석은 무명을 다스려 크게 쉬는 완전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단번에 깨치면 비록 부처와 같지만 여러 생에 익힌 버릇이 깊어서 바람은 멈췄으나 파도는 아직 출렁이고 이치는 드러났지만 망상이 그대로 일어난다 라고 한 말과 같다. 또 종고스님도 가끔 영리한 무리들은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 이 이치를 깨치고는 쉽다는 생각을 내어 다시 닦지 않는다. 이런 상태로 오랜 세월을 지내면 여전히 헤매면서 고통의 윤회를 면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니 어찌 한 번 깨쳤다고 하여 뒤에 닦는 일을 소홀히 하겠는가?  

 

11번 돈오와 점수는 수레의 2바퀴. 12번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져라는 각자 공부하기 바란다

 

13. 번뇌를 없애는 수행.

번뇌는 두텁고 익힌 버릇은 무거우며 자기 마음의 본 성품을 밝게 살피는 관행은 약하고 마음은 들떠서 어리석은 무명의 힘은 크고 지혜의 힘은 약해서 선과 악의 경계에서 마음이 동요하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하여 서로 헛갈린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한 사람은 얽힌 인연을 잊고 번뇌를 없애는 수행공부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말했다. 인식작용의 주체가 되는 여섯 감각기관<六根>이 인식의 대상인 경계를 대하여도 마음이 얽힌 인연을 따르지 않음을 禪定이라 하고 마음과 대상이 모두 실체가 없는 空이어서 본래 미혹함이 없는 것을 비추어 아는 것을 지혜라고 한다. 이것이 相을 따르는 수행방법<隨相門>의 선정과 지혜로서 점차로 닦는 漸門의 하열한 근기이지만 아직 시간적 차이로 對治하고 있는 수준에서는 어쩔 수 없다. 만약 망령된 생각으로 들뜸이 심하면 먼저 선정의 수행방법으로 산란함을 거두어 마음이 얽힌 인연에 따르지 않게 하고 본래의 고요함에 합당하게 하며 만약 혼침이 더욱 심하면 지혜의 문으로서 사물을 판단하고 실체가 없는 공을 관하여 비추어 보아 미혹함이 없게 하여 본래의 앎에 합당하도록 해야 한다. 선정으로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 지혜로 멍청한 상태<無記>를 다스려 동요하거나 고요한 상태가 없어지고 對治하는 노력도 없어지면 어떤 대상이나 경계를 대하더라도 생각마다 근본으로 돌아간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인연을 만나도 마음마다 도에 합당하여 걸림없이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달아 할 일을 다 마친 無事人이 될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참으로 선정과 지혜를 고루 평등하게 가져 불성을 분명하게 본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생각 기억 감정에 끌려가지 않는 것을 선정이라 한다. 생각 기억 감정이 있지만 이것들이 인연과 상황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지 원래 내 모습은 아님을 탁 아는 것이 지혜다. 시간적 차이로 대치하고 있는 수준이란 말의 뜻은 觀을 의미한다. 부처님 성도 새벽별 보고 깨달았다. 별을 보고 있는 그 순간을 본 것이다. 이것을 투기라 한다. 보통 우리도 보긴 본다. 화가 난 다음 아! 내가 화를 냈지 짜증내고 난 다음 아! 내가 짜증 냈지 우린 이렇게 지나간 다음 흐릿하게 본다. 그래서 시간적 차이가 있다 그러는 것이다. 空 그러면 아차! 거울이 있었지 진심이 있었지 라고 생각하면 된다.

 

투기<投機> – 끝까지 크게 깨달아 부처의 心機에 합함  

 

14.깨달은 뒤에 닦는 수행방법.

묻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의하면 깨달은 뒤에 닦는 수행방법 가운데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는 뜻에 2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자기 성품<自性>의 선정과 지혜이고 마음 자체를 보는 것. 둘째는 相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입니다 호흡 발걸음 등을 보는 것 대상을 보는 것.

 

自性門 隨相門

자기 성품을 따른다는 말은 아! 내가 참 거울이지 거울 위에 나타난 것은 다 허망한 것이지 하고 생각 자체를 흘러가게 두는 것이 自性門이고 자꾸 거울 속 자기 모습이 보이는 것이 隨相門이다. 거울 속 저 애는 나의 인연과 현재 모습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 진짜가 아냐 하고 허망된 것을 아는 것이 수상문이다. 그래서 보조스님께서 거울 자체 자성문을 따르는 것을 상근기라 하고 거울 속 존재를 진짜가 아니지 인연으로 일시적으로 생긴 것이지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하고 생각하는 것을 하근기라 말씀하셨다. 출가자와 재가자의 차이. 재가자는 하근기 쪽으로 갈 수 밖에 없다. 내가 상근기 쪽으로 갔는데 마누라가 여보 이 달 왜 월급 안 나와? 아빠 왜 등록금 안 줘? 이러면 번뇌에 끌려간다. 반면 스님들은 다 끊고 간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 분들은 相에 안 끌려가도 된다. 그러나 우리 재가자들은 기껏 깨달아도 마누라나 애들 한 말에 의해 相이 팍 생겨버린다. 그러니 우리는 하근기 쪽 공부 밖에 할 수 없다. 스님들은 깨닫는 것 참 쉽다. 스님인데 못 깨달았다면 크게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相에 끌려다니지만 스님들은 相 다 끊은 것 아닌가? 엄마 아버지 인연 다 끊었는데도 못 깨닫는다면 공부 전혀 안 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혼 해? 부처님처럼 다 갖다 버려? 그럴 수도 없다. 보조스님께서는 이 구절을 點鐵成金 쇠를 두드려 금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씀하셨다.

 

점철성금<點鐵成金>– 쇠를 달궈 황금을 만든다는 뜻으로 나쁜 것을 고쳐 좋은 것을 만듦.

 

그러면 좋다는 소리인가 나쁘다는 소리인가? 좋다는 소리다.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 그렇게도 좋아했다는 말이다. 유교가 나라 말아먹는 꼴을 보다 나중에 저런 허학 가지고는 안 되겠다 해서 실학이 나온다. 그렇다고 공자 맹자 주자 선생님 말을 버린 것이 아니다. 그분들 말씀을 두드려서 금을 만든다는 말이다. 이 말이 풀리고 나니 수심결이 다 풀렸다. 그러니까 우리 같은 하근기들은 이 철에 돈문제 가족문제 몸문제 병문제 다 있다. 그러나 그런 문제에 답이 있는 것이다. 그 문제에 끌려가지 않고 하는 공부가 수심결이다. 그래서 회사 일 앞으로 더 열심히 하려고 한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나는 알고 적을 모르면 50 50이고 나도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망한다고 손자병법에 나온다. 수심결 공부하면 이제 간신히 나를 안 것이다. 나를 알면 이제 겨우 50 50이다.

 

상구보리 하와중생 상구보리는 나를 깨닫는 것이고 하와중생이 인연관계를 밝히는 것이라면 여러분이나 나 같은 하근기 중생들은 철을 두드려 금을 만들려면 인연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저처럼 주식시장에 근무하는 사람은 주식시장이 어떤 인연으로 맺어져 있는지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하고 라면 장사를 해도 이 장사가 어떤 인연으로 이뤄져 있는지 들여다 보는 공부를 해야 한다. 나도 공부하고 남도 공부하고 그래야 손자 선생이 말씀하신 대로 나도 알고 적도 알아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게 된다. 맨날 불교공부만 하고 세상공부 안 하면 법 하나도 펴지 못한다. 하나도 자식에게 불교 가르쳐주지 못한다. 석가가 배운 학문을 보면 도박 유머 수사학 잡학 안 배우는 것이 없다. 우린 그렇게 다 배울 필요 없지만 지금까지 어리석은 눈으로 자신의 직업 직장동료 부하직원 주변사람들을 바라보셨다면 이제부터는 밝은 눈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이 우리 같은 하근기들이 점철성금하는 수행이다.

 

일체법이 개시불법이라 했다. 때문에 일체법에 부처님 법을 적용시키지 못하면 불교공부해서 뭐하겠나? 아뢰야식? 진심? 우리 사는 데 그런 말이 뭐 그렇게 도움이 되겠나? 잘못하면 말만 많아지고 싱거운 사람된다. 스님들은 불법을 일체법으로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여 쓰는 일은 안 해봤기 때문에 잘못한다. 그런 것들을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재가자들이다. 아전인수격으로 잘못 나가는 일들은 스님들에게 물어보더라도 자기 직업 혹은 앞으로 하고 싶은 일 부처님 법대로 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전에 청담스님의 통장 비밀번호 찾는 법문 때문에 금강경 공부 시작했다 말씀드렸다. 제 스스로는 이젠 찾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알고 여러분에게 비밀번호 찾는 법을 가르쳐드리려니 불이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과거 가졌던 생각을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지난 시간 부자가 되는 두 번째 방법 말했다. 모든 물건은 일주일 이민간다 생각하고 사라 했다. 고산스님 법문 중 석전스님 나온다. 석전스님에게 많이 배웠다고 나온다. 석전스님이 아마 도통하신 분인가 본데 매일 방에서 뭔가 보는데 제자들이 가면 덥는 것이다. 뭘 공부하시나? 나중에 열반하신 뒤 제자들이 그 책을 뒤져보니 글씨가 하나도 없는 책이더란 것이다. 그런데 깨알만한 글씨가 한 줄 적혀 있어 보니 껍데기와 알맹이를 구별하라고 써있더란 것이다. 거울 속 그림자와 거울을 판단하란 말이다. 우리 식으로 따지면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을 구별하란 말일 것이다. 우리는 중요한 일에 매진해야 하는데 중요하지 않은 일에 너무 끌려다닌다.

 

그러니 법구경에 땅에 넘어진자 땅을 딛고 일어서란 말 있다. 다른 뜻이 아니고 지금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고통 마음 속에 갖고 있는 아픔이 있다면 그 아픔을 불법으로 자신이 풀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면 그 아픔은 자기만의 아픔이 아니다. 그 아픔 갖고 있는 사람들 많다. 그 아픔은 이렇게 푸는 것이라고 가르쳐주는 것이 사구게를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픔을 자신이 풀지 못하고 거기 주저 앉아버린다. 그런 사람들 너무나 많다. 일체법 개시불법 알고 불법을 일체법으로 끌어들여 현 생활에 적용시키다 보면 그것이 청담스님이 말씀하신 통장 비밀번호 찾는 방법이란 것을 알았다. 어떤 도인스님을 찾아가 이제 알았습니다 120명을 대상으로 가르치면 몇 명이나 깨우치게 하겠습니까? 7명은 하겠네. 1명만 해도 거짓이 아닌데 7명이면 완전 대박 아닌가? 그래서 요즘 내심 즐겁다. 사실 지난 시간 거울 갖고 다 말한 내용이다.

 

금강경 강의 끝나면 성지순례단에 요청해 불국사로 성지순례 같이 가려 한다. 불국사 가면 다보탑과 석가탑 있다. 불국사 옛날 다 수학여행 다들 갔다 왔을 것이다. 그 수학여행 덕으로 다 잘사는 줄 알라. 석가탑이 뭔가? 고타마 붓다 석가모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지혜로워져라 지혜로워져라 가르쳐주신 분이다. 다보탑은 뭔가? 다보 부처님이다. 여러분에게 복을 주는 부처님이다. 그래서 다보탑은 휘황찬란하게 생겼다.

 

다보여래<多寶如來> – 동방 寶淨세계의 교주.

 

강의 때마다 천도재 이야기 많이 한다. 사람들 죽고 몸 없어지고 나면 귀신들이 굉장히 허전해 한다. 병원 가면 몸도 얼굴도 엉망이 돼 중환자실 떠나 생을 마치는 분들 많다. 귀신이 전엔 떵떵거리며 자식도 있었는데 그러다 자기 몸 딱 보는 순간 너무나 초라하고 별 볼 일 없는 자기 몸을 알게 된다. 그래서 천도재 할 때 광박신 여래님을 계속 부르는 것이다. 광박신여래는 금으로 된 폼나는 부처님이다. 일단 외관을 멋지게 한다. 그 다음 맨날 남의 것 뺏고 줄 것 안 주고 그렇게 부자 되고 난리 치다 이제 죽어 땡전 한 푼 없으니 허전할 것이다. 그러니 경을 읽어줘도 들으려 하지 않고 내 돈 어디 갔어 내 돈 어디 갔어만 외친다. 그래서 다보여래를 불러주는 것이다. 다보여래 불러주면 몸도 폼나고 돈도 생긴 것 같다. 그런 다음 금강경 아미타경 스님 법문 읽어주면 그제야 와서 듣는 것이다. 그래서 다보여래 광박여래 다 부르는 것이다. 그 다보여래 계신 곳이 불국사다.                         

 

광박신여래<廣博身如來> – 몸이 매우 광대하여 법계의 모든 사물을 갖추고 있는 여래.

30. 우승택 수심결 강론 중에서

[출처] 802.우승택 수심결|작성자 Inkf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