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택 금강경 해설 제4회 <3.대승정종분>
금강경의 핵심은 대승정종분에 있다. 대승정종분을 이해하면 금강경 전반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게 머리 속으로 정립이 안 되면 귀신이 있는 거야 영혼이 있는 거야 나는 뭐야 이런 문제들을 쉽게 해결하지 못하지만 알면 쉽게 넘어갈 수 있다. 기도도 잘 할 수 있다. 1분은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 2분은 수보리 존자의 회광반조를 배우자. 3분은 조건이 갖춰지면 명색이 일어나고 조건이 무너지면 명색도 사라진다고 했다.
부처님은 3법인<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을 말씀하셨다. 무아 하면 무아지경이란 말도 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들 음악가 기업의 사장 이런 사람들 보면 다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을 너무 내세우면 주변사람들한테 미움 받는다. 그래서 자신을 버리는 사람들이 대부분 크게 성공한다. 그런데 예술은 무아가 아니고 몰아다. 몰입하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대부분 몰아로 성공한다. 몰아 자신에게 빠지다 함몰시킨다는 뜻이다. 네가 그런 생각 그런 감정이면 나는 이런 생각 이런 감정이야 네가 그렇게 표현하면 나는 이렇게 표현해 그런 사람들이 예술가다. 그렇게 항상 새로운 패러다임을 낸다. 피카소 마그리뜨 이런 사람들은 일반적 상식에서 벗어나 자꾸 다른 걸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그게 몰아다. 우리가 갈 곳은 몰아가 아니고 무아다. 하지만 일단 몰아를 알아야 무아로 간다.
○ 大乘正宗分 第三 조건이 갖춰지면 명색이 일어나고 조건이 무너지면 명색도 사라진다.
佛 告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我皆令入無餘涅槃 而滅度之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 得滅度者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 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대승의 바른 가르침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 마하살은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하느니라. 존재하는 바 일체의 중생 무리들 곧 알로서 태어나는 존재이거나 태로서 태어나는 존재이거나 습기에서 태어나는 존재이거나 그 모습이 다른 모양으로 변해서 태어나는 존재이거나 형상이 있는 존재이거나 형상이 없는 존재이거나 생각이 있는 존재이거나 생각이 없는 존재이거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존재이거나 나는 그들 모두로 하여금 번뇌의 남음이 없는 열반에 들게 하여 멸도에 들게 하리라. 이렇게 무량무수무변한 중생들을 다 멸도에 들게 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멸도를 얻은 중생은 하나도 없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만일에 보살이 나다라고 하는 아상이나 사람이다라고 하는 인상이나 나도 중생에 불과하다고 하는 중생상이나 나도 한 생명밖에 없다고 하는 수자상이 있으면 이미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생무변서원도 -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무진서원단 -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치료를 다 해줬는데 치료를 받은 사람이 없다 그러니. 참 헷갈리게 만든다. 왜 그런가? 하고 부처님이 설명해주신다. 그런데 답이 더 어렵다.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한 독실한 후배 기독교인이 물었다. 기계는 다 인간이 편하고자 만든 것인데 인간이 만든 기계 중에 제일 나쁜 기계 하나만 고른다면? 냉장고. 저는 에어컨. 기독교인과 불교인의 차이다. 왜? 에어컨은 내가 시원하자고 열을 밖으로 뽑아 남을 덥게 만들기 때문이지요. 냉장고는 뭐가 문제인가요? 만약에 냉장고가 없었다면 사람이 고기를 잡아도 먹을 만큼만 잡았을 텐데 이 놈의 냉장고가 생긴 뒤로는 남의 것까지 모조리 잡아 냉동시키기 때문이지. 이 냉장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생물들이 고통 받는지 아니? 아 그렇겠네요.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불교인들은 동물 식물 심지어 귀신까지 온갖 구류중생에 대한 생각을 하는데 다른 종교인들은 인간에 대한 생각만 한다. 좋다 나쁘다를 떠나 세상을 보는 시각이 참 많이 틀리다는 생각을 한다. 그 구류중생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 다 나와 있다.
그런데 나는 제도를 하나도 안 했다. 보살들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불교는 처음이 무아다. I save you다. 그런데 내가 없다. 마이크로 매크로 그림처럼 사실은 You도 없다. 주어도 없고 목적어도 없는 것이 불교다. 동사만 있다. 인간들의 행위인 업만 있다. 금강경 3분의 핵심은 이것이다. 나도 없고 너도 없다. 그런데 우주 사이엔 만유인력과 중력이 있는 것처럼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이뤄지는 행위만이 쌓여서 그림 사이에 업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업을 져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라고 금강경에서 가르치는 것이다. 이걸 머리로만 생각하면 무지 힘들다. 나란 존재를 잊어버리고 고정된 생각을 탈피해서 달리 어떻게 봐야 하는지 수행자들은 안다. 인터알리아 Art Director 이진숙 실장님을 모시고 세상을 다르게 보는 작품세계를 한 번 보자.
르네 마그리뜨<Rene Magritte 1898~1967> -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벨기에의 화가.
자신의 지적이고 점잖은 사진을 찍었다. 같은 한 장의 사진에 자신의 모습을 정면과 측면을 Overlap시켜 찍었다. 하나의 시선으로만 보지 말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Treachery of images<1928~1929>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파이프를 그려 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고 그림에 써 넣었다.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뭘 의미하나? 눈에 보이는 것 화면 위에 재현된 것을 단순히 믿지 말라는 말이다. 이것은 재현된 그림일 뿐 사물 그 자체가 아니다. 20년 뒤 그림자까지 함께 그려 더 사실감 있는 파이프를 그린다. 그리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고 청동판에 새겨 팻말로 붙여놓았다. 방금 네가 내린 판단에 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고 그림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과연 그 말은 사태의 본질에 제대로 도달한 것인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이 그림에 대단히 감동을 받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는 책을 썼다.
미셸 푸코<Michel Paul Foucault 1926~1984> - 구조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무의식적 문화의 체계에서 인간 사고의 基底를 구했다. 그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 라는 책을 썼다. 책에서 말과 이미지 현실과 본질에 관해서 철학적 탐구를 하게 된다.
두 가지 신비<The two mysteries 1966>
이것은 그림입니다 라고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 그림 속에 파이프를 그린 이젤을 그려 넣었다. 그렇다면 이젤 밖 회색 모양 파이프는 뭘까? 뭔지 대답하기 이전에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이젠 함부로 그것은 파이프입니다 라고 한 단어나 문장으로 말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갤러리 벽 위에 그려진 파이프지만 그것도 그림입니다 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그림의 대상이 됐던 파이프는 어디에 있나? 그 파이프는 누가 보았나? 파이프를 두 번이나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에 대해선 여전히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빛의 제국<The empire of lights 1954>
그림은 아름답고 진실하고 나를 속일 수 없다는 이런 편한 생각들이 그림을 아름답게만 보게 만든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다른 점이 있다. 밤의 풍경인데 하늘은 낮이다. 현실에선 있을 수 없다. 낮과 밤이 만난 순간이다. 그런데 하나의 그림 속에 들어가니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인다. 서양의 그림 그리기 관습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서양의 많은 작가들이 태어나 비너스란 것을 보지도 못했지만 너무 그럴 듯 하게 그려 넣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그림을 믿는다. 실제 비너스는 흑발인지 금발인지 키가 얼마인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모르는 거짓 이미지가 반복되고 있다. 마그리뜨는 보여진 이미지는 단순한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생각하게 만든다 나는 그런 그림을 그리겠다고 시작한다. 사람들을 통해 듣게 된 늘 일방적인 모습의 이야기나 판단들 그런 상식의 세계가 과연 진실일까? 하고 물으면 굉장히 대답하기 어려워진다.
인간의 조건 <La condition humaine 1933>
그림 속 풍경과 창 밖 풍경의 일치. 이젤을 드러내면 하얀 공간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움이 든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림이고 이것은 창밖에 펼쳐진 풍경이란 확신을 더 이상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는 그림을 이미 보았기 때문에 그림 감상방법이 달라졌다. 이것도 그림이고 캔버스에 그려진 풍경도 결국은 마그리뜨가 그린 그림일 뿐이다. 단지 그림을 보고 의심하라 라는 말을 배웠기 때문에 저것이 진실인가 하는 의심만 하는 상황에 거꾸로 직면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그린 이미지 속에 우리가 사는 세상 속 진실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 것인지 계속 답을 내리기 보단 과정을 찾으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In praise of dialectics <1937>
아까는 건물 안에서 창 밖을 내다 봤다. 실제 캔버스 뒤를 보니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져 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창 밖의 풍경이다. 반대로 창 밖에서 건물 안을 들여다 봤다. 그러면 우리는 응접실 서재 식탁 같은 실내 풍경을 기대한다. 창 밖의 문을 열고 보니 다시 건물이 나왔다. 창 안에서 창 밖을 봤을 때 앞뒤로 보이는 광경이 거꾸로 창 안에서 펼쳐지고 있다. 창 문을 열면 꼭 집 안이 보이리라는 것은 우리의 편견 선입견이다. 가끔은 상처라 하기도 한다. 그 많은 상처 중엔 너무나 많은 편견과 단편적인 생각들이 그대로 고착돼 우리 머리 속에 딱지 같이 앉아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도대체 내 머리 내 마음 속에 있는 진실은 도대체 뭘까?
The key to the field 1936
건물 안에서 창 밖을 내다 보니 기대한 대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그런데 유리창이 깨져 있다. 깨진 유리창 조각이 바닥에 날카롭게 박혀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깨진 유리 조각에 창 밖 나무풍경의 지문이 묻어 있다. 유리 조각에 소나무가 있다. 창 밖 나무풍경이라 본 것이 사실은 잘 그린 그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가짜 풍경이 지워지고 나서 진짜 풍경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거짓된 생각들이 깨어져 나가고 새로운 진실된 모습이 보일 수 있다는 말이다.
회화사적으로 이것은 굉장히 큰 미술사에 대한 도전이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인들은 회화란 세계를 비추는 창이라 생각했다. 마그리뜨의 창 그림을 봤듯이 서양인들은 이렇게 창을 통해 세계를 볼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합리주의 철학에 근거한 이성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 이성에 대한 확신으로 서양문명이 발전하지만 20세기 초반 결정적으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다윈의 진화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오면서 모든 것이 고정돼 있고 계산 가능한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서양사람들은 과학이 발전하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사물의 교훈 <Drawing>
한 신사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인사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모자를 벗은 순간 모자와 함께 얼굴까지 벗겨졌다. 그 다음 순간 다시 모자를 썼다. 그런데 쓰고 나니 모자와 얼굴 부분이 서로 뒤바뀌었다. 큰 일 났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사이 어떤 마법이 일어나 이것은 얼굴 모양의 모자고 얼굴의 검은 선은 흰 것이 돼 이 사람은 생각보다 안전한 상태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모든 사물을 아무리 연속적으로 보고 있다 해도 사실은 겉으로 드러난 외관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 그 외관을 이렇게 3가지로 압축해 놓은 것이다. 진실은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르네 마그리뜨의 말
눈 앞에 있는 사물이 보여주는 것에 의해서 감추어져서 안 보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예절을 보지 못한 채 누군가 모자를 벗어서 인사하는 것만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사물을 보아야 하는가?
통찰력<Perspicacity 1936>
알을 보고 갈매기를 그리는 화가 그림. 놀라운 통찰력이다. 절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지 말라는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듯 보인다. 마그리뜨는 이런 통찰력을 보여주지만 사실 이 알은 누구 알일까? 이 알에서 반드시 갈매기가 나올까? 닭이 나올 수도 악어가 나올 수도 있다. 우리가 이 알에 대해 속속들이 알지 못하면 감히 상상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명제란 것이 있다. 만약 A=B라면 A=C가 되기 어렵다. A=B라고 단정하는 순간 사람들은 B가 아닌 것에 대해서 A가 왜 C야? A가 왜 E야? 라고 반문하게 되고 그 반문이 거부감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A라는 사물의 본질에 도저히 다가갈 수 없게 된다. 이것은 갈매기의 알이다 하는 순간 이것은 더 이상 닭의 알이 아닌 오로지 하나가 된다. 그런데 동양적 사상은 그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놓는 것이다. 마그리뜨보다 더 한 사상적 힘을 갖고 있다.
대화의 기술<The art of conversation 1950>
거석 아래 두 신사의 대화. 주제는 대화의 기술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대화를 할 것인가? 거석 글자 모양이 REVE<꿈>이다. 꿈은 초현실주의자들에겐 중요한 대상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우리의 낮의 공식적인 활동은 이성에 의해 지배되고 무의식과 본능은 이성에 의해 억압돼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80%의 욕망이 터져 나오는 것이 꿈이라 보았다. 그래서 밤에 꾸는 황당한 꿈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 하지 않으면 인간에 대해 표면적으로만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이는 이성적 외관 이상의 본능적 충동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 초현실주의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마그리뜨는 욕망 이상의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림의 거석 앞 부분을 잘 보면 TREVE<멈춤> 더 자세히 보면 CREVE<죽음> 이란 말도 들어가 있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이란 뜻이다. 이 3단어의 직접적인 연관은 찾아도 좋고 안 찾아도 좋다.
여기서 마그리뜨는 단지 이게 닭의 알인지 갈매기의 알인지 그 어떤 것도 선입견을 갖고 먼저 규정하면 대화가 되지 않으며 결코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끊임 없는 대화 속에서 진실을 찾을 뿐이다. 이렇게 열린 사고를 하다 보면 정말 새로운 사물들을 그려 넣을 수 있고 상호 이해하고 왜 존재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
눈물의 맛<The flavour of tears 1948>
바다가 펼쳐진 해안가에 재미있는 것이 하나 있다. 위는 새인데 아래는 식물이다. 이 새풀 혹은 풀새의 존재는 일단 풀로 자라서 새의 형상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이 풀새는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벌레에 심장을 파 먹히고 있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다. 어떤 관계인가. 원래 이 존재는 풀이었다. 풀은 벌레가 와서 갉아 먹는다. 그런데 새가 되면 벌레를 잡아먹게 된다. 벌레는 풀을 먹고 새는 벌레를 먹게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비로소 이 새는 자신이 벌레에 먹히는 풀이 되어 봄으로써 벌레의 고통을 알게 되는 것이다. 풀 새 벌레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서로 뗄 수 없이 얽혀 있다. 풀이 없었다면 벌레가 없었을 것이고 벌레가 없었다면 새도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돼 있고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진실이란 나도 없고 너도 없는 그런 식으로 시작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 마그리뜨의 결론이다.
붉은 모델<Red model 1934>
발과 신발이 합쳐져 있다. 발과 신발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신발이란 놈 때문에 발은 늘 가려져 있다. 자신의 얼굴을 어디 내놓지 못한다. 그러나 신발 입장에서 보면 발이 명령하는 대로 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발은 신발이 없으면 늘 상처를 받는다. 반대로 발이 없으면 신발은 그 존재 이유가 없다. 나와 너는 같이 공존할 수 밖에 없다는 동양적인 사상에 도달한 것 같다.
이제 금강경 공부 다 했다. 말과 형상에 속지 말라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 그런 말이다. 32개 경제지표에 속지 말라. 바보들은 바보들의 특징이 있다. 남의 말을 잘 믿는다. 귀가 얇다. 그러나 기독교도 일단 믿음이 먼저고 불교도 신위도원공덕모 믿음이 먼저다. 문제는 제대로 알고 제대로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남 아무도 믿지 말라. 신문도 방송도 모두 믿지 말고 자기 자신도 믿지 말라. 그렇기 때문에 깨닫기 전엔 자기 자신도 믿으면 계속 실패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살은 중생을 믿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그러니 뭘 믿고 따라가나? 그러면 부처님은 믿지 말라 하셨나? 아니다. 믿음을 넘어서라 그러셨다. 무조건 믿지 말고 믿음을 넘어 서라.
신위도원공덕모 -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모든 공덕의 어머니다.
그림을 보는 방법을 통해 세상 보는 방법을 공부했다. 동양사상 하지만 부채에 일체유심조 써서 천 원 이 천 원에 파는 게 현재 동양사상 현재 한국의 수준이다. 그러다 동양이 서양에 먹힌 것이다. 저런 그림 하나에 수십억 한다. 무병에 걸리지 말고 차라리 유병에 걸리라는 영가선사 말씀처럼 예술이나 경제나 지금 하는 일을 명확히 Mindful 하게 하면 불자로서 좀 더 당당한 삶을 살 수 있다.
4회.우승택 금강경<대승정종분> 강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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