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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부의 정무장관을 지내며 북방외교의 막후 역할을 했던 박철언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이 막판에 배제된 1990년 6월 4일의 첫 한·소(韓蘇) 정상회담은 '실패작'이었다고 한다. 회담 장소인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어먼트 호텔에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30분이나 늦게 도착했고, 한국 대통령 노태우는 경호원도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노태우가 경제협력 얘기를 꺼냈지만 고르바초프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노태우는 "고르비는 그 때만 해도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것 같았지만, 나중에 대통령을 그만 두고 만나보니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 정상회담 이후 한·소 관계는 급물살을 탔고, 예정보다 3개월 앞당긴 9월 30일에 수교했다. 그 직전 북한을 방문해 한·소 수교 방침을 통보했다가 협박당하다시피 했던 소련 외무장관 셰바르드나제가 조기 수교에 큰 역할을 했다.
세계 냉전체제의 해체 직전인 1980년대 말, 대한민국은 대단히 계획적이고 주도적인 외교를 펼치기 시작했다. 당시까지 '적성(敵性) 국가'로 분류됐던 공산권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었던 것이며, 그 궁극적 목표는 한반도의 평화 정착이었다. 1983년 외무장관 이범석이 처음 사용했던 용어인 '북방정책'에서 '북방'은 곧 '공산권'의 다른 표현이었다. 노태우 정부는 1988년의 '7·7 선언'으로 북한·소련·중국에 대한 개방 의지를 밝혔고, 이로부터 '중공(中共)'이란 용어가 '중국(中國)'으로 바뀌었다. 88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의 성공상(像)을 본 동구권은 무척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1989년 2월 헝가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대(對) 공산권 수교의 봇물이 터졌다.
1992년 8월 24일에 한·중 수교가 이뤄짐으로써, 1949년부터 43년 동안 중국 대륙과의 교류가 단절됐던 한국사의 매우 이례적인 기간이 끝났다. 노태우 정부 기간 동안 새로 수교한 나라는 45개국이었으며, 그 인구는 17억 명이 넘었다. 이와 같은 화해 분위기 속에서 남북한은 1991년 9월 18일 유엔에 동시 가입했고, 1992년 2월 19일에는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非核化) 공동선언을 발효시켰다. 하지만 바로 다음 해부터 일어난 북핵(北核)위기 국면은 이 두 합의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동영상 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