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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45) 6·29와 87년 大選

淸潭 2008. 8. 9. 10:47
[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45) 6·29와 87년 大選

 5共의 항복 선언… 갈라선 兩金


발행일 : 2008.08.04 / 종합 A6 면 기고자 : 유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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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27일 대통령 전두환은 "노태우 대표가 직선제를 하자고 하면 그걸 수용하는 담화를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29일 '독자적인 구상'인 것처럼 갑작스럽게 나온 노태우의 선언에 국민들은 깜짝 놀랐다. "직선제 개헌, 김대중씨 사면복권, 시국사범 석방, 국민 기본권 신장 등을 대통령께 건의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5공 정부의 대(對)국민 항복'으로 받아들였고, 전국은 일시에 축제 분위기가 됐다. 6·29 선언은 6월 항쟁의 소중한 결과물이자 '87년 체제'로 알려진 대한민국 민주화의 기점이기도 했다. 이로부터 권위주의 청산이 시작됐고 시민사회가 성장했다. 5공 내내 억압됐던 노동운동의 물꼬도 터졌다. 이해 3749건의 노동쟁의(전년의 13.6배)가 있었는데 그 중 3628건은 6·29 선언 이후에 일어난 것이었다(87년 노동자 대투쟁).

여야 합의로 마련된 새 헌법은 10월 27일의 국민투표에서 93.1%의 지지로 확정됐다. 대통령 선거방식을 직선제로 바꾸고 대통령의 임기를 5년 단임으로 했으며 국민 기본권을 신장한 이 '6공 헌법'은 지금까지 20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16년 만에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게 된 현실에 국민들은 환호했다. 박정희 정부의 2인자였던 김종필도 출마해 '1노(盧) 3김(金)'의 4파전을 이뤘다. 하지만 김영삼·김대중 양김(兩金)은 끝내 단일화에 실패하고 갈라섬으로써 국민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당시 빈민운동가 제정구가 "대통령보다 국부(國父)로 남으시라"고 하자 김대중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열화 같은 성원을 외면하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11월 29일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오던 KAL858기가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공작원들에 의해 공중 폭발, 탑승객 115명이 사망하는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위대한 보통사람, 믿어 주세요"를 외친 노태우는 12월 16일의 대선에서 36.6%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양김의 표를 합하면 노태우보다 416만표가 많았다. "노 후보를 당선시킨 것은 5김(3김과 KAL기 폭파범 김승일·김현희)"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노태우는 1988년 2월 25일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해 제6공화국이 출범했다. 전 대통령 전두환은 5공 때의 비리가 쏟아지면서 사실상의 '유배'를 떠나야 했는데, 1989년 8월 백담사에서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김재규 이후 우리는 배신하는 게 하나의 나쁜 전통이 돼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