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32)오일쇼크와 中東진출 • 허리띠 졸라매고 사막에서 金을 캐다 |
발행일 : 2008.07.19 / 종합 A6 면 기고자 : 유석재 |
"난방 유류의 5%를 절감하고, 2㎞ 정도는 걸어가는 운동을 펼친다. 대낮 소등(消燈)을 생활화하며, 광고 네온사인과 목욕탕 신규 허가를 규제한다." 1973년 11월 8일, 정부는 '에너지 소비절약 1단계 조치'를 발표했다. 그 해 10월 제4차 중동전쟁이 유발한 제1차 오일쇼크는 막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한 한국 경제에 큰 위기를 몰고 왔다. 2.8달러이던 유가는 다음해 3월까지 11달러로 네 배가 뛰었다. 신문 제목은 거의 날마다 '인상(引上)'이라는 말로 뒤덮였다. 밤거리는 어두워져 뺑소니 사고도 늘었다. 사람들은 화장지·비누·라면 같은 생필품 사재기에 나섰다. 이제 석유 사용을 10% 줄이자는 강력한 운동이 펼쳐졌다. 관공서는 전구 3분의 1을 빼냈고, TV 방영은 하루 4시간 단축돼 아침방송이 없어졌다. 1974년 1월 14일의 긴급조치 3호는 저소득층의 부담을 줄이고 TV와 냉장고를 포함한 '사치품'에 대한 과세를 늘렸다. 대통령도 여름에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연 채 파리채를 들고 살았다. 그것은 대단한 효과를 거뒀다. 1974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8.1%였고, 수출은 전년 대비 38.3%가 늘었으며, 국민총생산 실질 증가율은 7.1%였다.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1972~1976) 동안 연평균 성장률은 11%였다. 대한민국은 이 시점에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과감한 역(逆)발상을 하게 된다. 중동에 석유값으로 낸 돈을 다시 찾아오자는 것이었다. 1월 30일, 경제제2수석비서관 오원철(吳源哲)은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에게 "오일달러가 쌓이는 중동시장에 공장을 짓고 건설 인력을 수출하자"고 건의했다. 월남에서 철수한 한국 기업들은 대거 중동으로 진출했다. 절정을 이룬 1978년 열사(熱砂)의 땅에서 소금땀을 흘린 한국 노동자는 14만명이 넘었다. 1975년에서 1979년까지 중동에서 벌어들인 205억 달러는 같은 기간 총 수출액의 40%에 육박했다. 그 경험들은 1978년부터 1981년까지 이어진 제2차 오일쇼크를 극복할 수 있었던 토양이 됐다. 그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한국인들은 싼 석유값이 주는 풍요에 젖어 들었고, 에너지 절약은 먼 과거의 추억으로만 남게 됐다. 마치 그런 위기는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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