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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장 이후락(李厚洛)입니다. 실은 제가 5월 초 박 대통령 각하의 뜻을 받들어…." 그 다음 말에 놀라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평양에 갔다 왔습니다."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TV로 생중계된 기자회견에서였다. 분단 이후 27년 동안 반목해 오던 남·북 정부가 드디어 '소통'을 시작한 것인데,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곧바로 '통일'을 위한 공동성명을 평양과 동시에 발표했던 것이다.
1970년대 초 세계의 냉전 질서는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미국은 1969년의 닉슨(Nixon) 독트린에 따라 주한미군의 3분의 1을 철수할 계획을 발표했고, 1972년 2월에는 미·중 수교가 이뤄졌다. 손을 내민 것은 남쪽이었다. 경제 성장으로 자신감을 얻고 있던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는 1970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평화통일을 위한 긴장 완화와 선의의 경쟁'을 제안했고, 1971년 8월에는 대한적십자사가 이산가족 왕래를 위한 회담을 하자고 했다.
1972년 5월 2일, 이후락은 정치적 회담을 위한 밀사로 파견됐다. 그는 떠나기 전 청와대를 들러 상의 주머니를 가리키면서 "그것도 여기 준비해 갑니다"고 말했다. 유사시에 자결하기 위한 청산가리였다. 4일 새벽 1시, 이후락은 모란봉초대소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났다. 차를 타고 비가 쏟아지는 비포장 산길을 지나 닿은 곳은 김일성(金日成)의 관저였다. 김일성이 악수를 청할 때 이후락은 당황했다. 손에 쥐었던 청산가리 캡슐이 녹아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이후락은 "그때 내 태도가 수상했던지 김일성이 멈칫하더라"고 술회했다. 29일에는 북한 부수상 박성철(朴成哲)이 극비리에 서울을 방문, 박정희를 만났다.
7·4 남북공동성명은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통일의 3대 원칙으로 천명하고, 긴장상태를 완화하며 다방면의 교류를 실시하기로 합의했음을 밝혔다. 8월부터는 남북적십자회담 본회담이 열리기 시작했다. 적잖은 사람들이 금세 통일이 이뤄질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북한이 개혁 개방의 의사 없이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개최 등 정치적 공세를 앞세웠고, 해빙의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숱한 희망과 배신, 설렘과 속임수로 점철된 기나긴 남북대화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