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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27] 전태일 분신 사건

淸潭 2008. 7. 24. 12:27
[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27] 전태일 분신 사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운동의 불씨로


발행일 : 2008.07.14 / 종합 A8 면 기고자 : 유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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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증 확보해!" 1970년 11월 14일 오후, 조선일보 기자 이상현(李相鉉)은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본지 1999년 8월 5일자 기획기사 '아듀 20세기' 중). 데스크의 지시를 받고 성모병원 영안실로 왔지만 막막했던 것이다. 그 전날인 13일 오후 1시30분쯤 22세의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全泰壹)이 청계천 6가에서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뿌려 분신 자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무심히 전태일의 문상객 명부를 뒤적이던 이상현은 갑자기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이 대학노트… 너무 낡았는데?' 앞 부분을 보니 글씨가 빼곡했다. 그것은 전태일의 일기장이었다. 이상현은 22일자 주간조선을 통해 일기장의 내용을 대서특필했다.

그 특종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 저희들은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전 종업원(2만여 명)의 90% 이상이 평균 18세 여성입니다. 하루 15시간의 작업은 너무 과중합니다. 40%를 차지하는 보조공(시다)들은 15세의 어린 사람들입니다. 저 착하고 깨끗한 동심들을 더 상하기 전에 보호하여 주십시오." 고등공민학교 중학부를 중퇴하고 16세에 평화시장에 들어갔던 전태일이 일기장에 남긴 글은 너무나 논리정연했으며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는 절규도 있었다.

그의 분신은 고도성장 시대의 '그림자'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연간 60만 명의 이농자가 도시로 몰려들어 대부분 빈민이 됐고, 이들 중 상당수가 섬유·전기 등 노동집약적 수출 부문에 취업해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렸다. 빈민들은 서울 곳곳의 국공유 산지에 판자촌을 형성해 '달동네'라 불렸다. 정부가 이들을 외곽으로 집단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1971년 8월 '광주대단지(현재의 성남) 사건'으로 알려진 저항이 일어나기도 했다.

근로기준법은 1953년 북한과의 체제 경쟁을 의식해 높은 수준의 근로자 복지를 규정한 법이었으나 당시 구속력이 거의 없는 장식품에 가까웠다. 전태일의 죽음과 그가 남긴 일기장은 한국 사회를 노동 문제에 주목하게 했고, 향후 노동운동의 불씨가 됐다. "내게도 대학생 친구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는데…"라는 전태일의 한마디는 숱한 지식인들을 자책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