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각스님 ‘다암서첩’입수…본지에 첫 공개당대 스님-유학자 ‘각별한 교류’나눴다 |
공개 서첩 중 추사 김정희 추정 글씨 4점도 조선후기 호의(縞衣).초의(草衣)스님과 유학자들의 교류 내용이 실린 간찰(簡札,편지) 16편을 모은 <○茶庵書帖(○다암서첩)>이 처음 공개됐다. 서첩의 앞글자는 불에 타 어떤 글씨인지 알 수 없다. 일산 원각사 주지 정각스님(동국대 겸임교수)이 몇 달전 입수한 <○다암서첩>에는 호의스님, 초의스님, 각안스님이 받은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의 아들, 조면호 등의 편지가 수록돼 있다. 서첩에 담긴 편지들은 당시 스님과 유학자들의 각별한 교류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다. 또한 당시 차문화(茶文化)상황과 신행활동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각안스님은 역대 고승들의 전기집인 <동사열전>을 지은 인물이다. 정각스님이 입수한 서첩의 표지. 한양대 국문과 정민교수는 “다산 집안의 자제들이 대를 이어가면서 스님들과 교분을 나눈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면서 “또한 대흥사 스님들이 한양의 학자들과 교류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차문화와 관련된 흥미있는 내용도 담겨 있다”고 밝혔다. 추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4점의 간찰은 지난 2006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추사 김청희 서거 150주기 기념 서예특별전’에 출품된 것으로 당시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쳤다. 서첩의 나머지 편지 12점은 이번에 처음 공개된 것이다. 서첩을 입수하여 공개한 정각스님은 “조선후기 불교계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자료”라면서 “당시 유학자들과 스님들의 교류 상황을 세밀하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정각스님은 “조선후기및 근세 불교자료의 수집이 미약한 상황에서, 이번 자료 입수를 계기로 불교자료 수집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고양=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호의스님의 향암에=륵구(具)는 추사의 또 다른 호이다. 추사가 제주에 유배중인 1845년 11월 호의스님에게 보낸 서한으로 호의스님에 대한 추사의 각별한 마음이 느껴지는 글이다. 추사는 “돌아갈 기약이 점차 늦어져 아마 정월 그믐이나 이월 초쯤 돌아갈 것 같은데, 대신할 학원(學元)도 기다릴 수 없어 고민 됩니다”고 본인의 심경을 전하고 있다. 이는 호의스님과 추사가 서로 마음을 터놓고 지낼만큼 각별한 사이였음을 보여준다. 추사가 호의스님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간찰. ○…일로암의 향사께=추사가 일지암에 머물고 있는 초의스님에게 반야심경이 담긴 첩(帖)을 보내면서 쓴 편지로 추정된다. 추사는 “선사께서 날로 무량수경(無量壽經)을 외우며 축원(祝釐, 축리)해 주시는 힘을 입어 편안히 살 수 있으니 기쁘고 고맙습니다. 다만 나그네의 회포는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음에 더욱 괴로울 뿐입니다”는 심경을 드러내고 있다.
호의.초의스님에게 보낸 추사의 편지로 보이는 글. ○…호의스님 초의스님 같이 살펴 보십시오= 연생(蓮生)은 추사의 호이다. 상원일(上元日)은 음력 정월 대보름. 앞서 편지와 비슷한 시기에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추사는 “저를 위해 제불(諸佛) 부처님과 관음보살 준제보살 앞에 등을 사르고 무량수경을 외우며 멀리서나마 축원하고 발원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생각건대 응당 가까운 시일에 석장(錫杖)을 떨치고 왕림해 주시기를 바라고 바랍니다”고 당부하고 있다.
조면호의 편지 ○…호의노사께 올림. 녹원인이 첩을 씀=녹원인(鹿苑人)은 추사의 척질(戚姪,성이 다른 조카)이며 제자인 이당(怡堂) 조면호(趙冕鎬)로 서예의 백미를 이룬 인물이다. 편지가 쓰인 1851년은 호의스님의 세수는 77세, 조면호는 48세였다. 당시 차문화의 일단과 유생들도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있다. “보내주신 다섯 포(包)의 차(茶)는 감로(甘露)를 마신 듯 심장과 허파가 모두 향기로워지고 상쾌해져 이는 바로 법비[法雨]가 적셔주고 불일(佛日)이 따뜻하게 비쳐준 것임을 알겠으니, 보통의 물건과는 다른 것입니다. 보답으로 향고(香膏) 2촉(燭)을 보내오니, 세존(世尊)께 공양(供養)하여 공경을 닦도록 해주시겠습니까” ○…호의노사 선실에. 녹원 답장 올립니다=조면호가 호의스님에게 보낸 것이다. 때는 1851년 12월2일. 조면호는 이 편지에서 “날씨가 추워짐에 그리운 생각 더욱 일어 마음이 배로 수고롭더니, 곧 패향(貝香)과 함께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서, 지극한 추위 속에 선을 닦는 생활이 청정하고 은은하며 기력이 점점 왕성해짐을 알았고, 이로 인해 도(道)가 있는 사람은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았으니, 매우 위로되고 기쁩니다”며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호의선사께 올림. 속인 답장함=조면호는 이 편지에서도 “해마다 이처럼 귀한 차를 보내주시어 이미 매우 감사하게 여겼는데, 더구나 지금 만들어 온 제품은 그 품질이 매우 좋은 것 같습니다”라며 차를 보내준 호의스님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각안선사께 보냄. 객주에 머무는 객의 편지=1858년 4월 19일 유상(維桑)이란 인물이 각안스님에게 보낸 편지이다. 현책(懸策)은 현령(縣令)의 집무실로 유상은 현감 직위에 있는 인물로 보인다. 당시 각안스님이 참선 수행을 하면서 학인을 지도했던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요즘 선을 닦는 생활은 아무 탈 없으시며 여러 학인들 공부하는 것이 청정한지 궁금하니…” 또한 주련(柱聯)을 만일암(挽日庵)과 남미륵암(南彌勒庵)에 보낸 사실도 들어있다. 현감에 있던 ‘유상’이란 인물이 각안스님에게 보낸 편지. ○…각안상인께 올림. 객지에 떠도는 이가 보냄=1858년 5월21일 유상이 각안스님께 보낸 서한이다. 유상이란 인물은 “선정을 닦는 생활 청정하시고, 보중(保重)하시며, 호의선사도 병 없이 모두 편안하게 계신지 궁금합니다”라며 안부를 전하고 있다. 또한 “저는 어지러운 세상 가운데 돌아와 누웠는데, 돌아가는 일은 어지럽고 시끌벅적하니, 어찌해야 할지 매우 괴로울 뿐”이라며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
석도인의 편지 ○…호의선사께 봉산에 새롭게 부임한 자가 답장 올림=1846년 석도인(石道人)이라는 인물이 호의선사에게 보낸 답장이다. 석도인은 “새벽에서 밤까지 향 사르고 등 밝히시어 저를 위해 축원하시길 성심을 다하시니, 어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며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다. 또한 세 첩의 약을 보내준 스님에게 감사한 마음도 전하고 있다.
○…각안산인(覺岸山人)에 답함= 1859년 3월 다산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이 각안스님에게 보낸 것이다.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이 각안스님에게 보내는 편지. 이때 스님은 40세, 정학연은 66세였다. 편지에서 정학연은 “머리털만 새어 귀신같은 몰골이 되어 갈 뿐 … 신발 신고 가서 더불어 놀 마음이 굴뚝 같으나, 집안 마당에도 나가지 못하니…”라며 투병 사실을 밝히고 있다. 또한 각안스님이 정학연에게 20폭의 죽간을 선물했고, 정학연이 시 한 수를 적은 쥘부채로 답례했음을 알 수 있다. ○…한 해가 다 되어도=다산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가 각안스님에게 보낸 편지이다. 정학유는 ‘농가월령가’를 지은 인물로 편지를 보낸 1850년의 나이는 66세였다. 이 무렵 각안스님 세수는 31세. 정학연은 “한 해가 다 되어도 소식이 없어 매우 걱정하다가, 이제야 그대의 편지를 받으니 마치 거듭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듯 하다”면서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고 있다. ○…호의스님 보십시오=정학유가 호의스님에게 보낸 편지로 초의스님의 안부를 묻는 내용도 있다. 마지막에 쓴 종말(宗末)은 자신을 아랫사람으로 자처하며 상대를 높이는 말이다. 1850년 3월에 쓴 편지에서 정학유는 “지난 여름 각안스님께서 산사로 돌아가실 때의 일이 새벽의 일인 듯 한데, 손가락 튕길만한 잠깐 사이에 벌써 1년이 되었으니, 흐르는 그리움 어찌 눈에 선하지 않겠습니까”라며 돈독한 정을 보이고 있다. ○…각안스님께 올림. 연도인 답함=1850년 7월23일 편지로 글쓴이 연도인(蓮道人)은 정학유의 둘째 아들로 추정된다. 당시 스님들의 수행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연도인은 “청정한 계행과 불도를 닦는 생활은 평안하시며, 하루 여섯 번의 염불(念佛)과 송경(誦經) 그리고 향 사르고 공양함에 어려움이 없으신지요”라고 안부를 묻고 있다. 또한 “동백기름 얼마쯤과 작설차 얼마쯤을 호의선사와 초의선사께 받아 편지와 함께 은혜롭게 보내주시면, 저 또한 소식 보내는 편에 사례하겠습니다”라고 부탁하고 있어, 각별한 사이를 짐작하게 한다. ○…각안선사께 부치는 답장=정학연의 아들로 추정되는 연사(蓮史)라는 인물이 1885년 4월15일 각안스님에 보낸 편지이다. 이 해에 정학유가 별세했기 때문에 기년복(朞年服)이란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선사께서 저를 잊지 않으시고 어렵사리 편지를 부쳐 주시니, 저를 향한 곡진(曲盡)한 정성에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선사와 제가 늙어 죽기 전에 서로 만나볼 수 있을까요. 선사께 편지를 쓰려고 종이를 앞에 두니, 심란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각안상인 보십시오. 연사 답장 드림=정학연의 아들로 보이는 연사라는 인물이 1859년 늦봄(暮春) 9일에 각안스님에게 보낸 글이다. 연사와 각안스님이 서로 각별한 사이였으며, 상호 선물을 주고 받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각안스님은 손수 그린 그림과 간지(簡紙, 두껍고 품질이 좋은 편지지)를 보냈고, 연사는 고약(膏藥) 2편(片), 붓 두 자루, 당(唐) 화석(火石, 부싯돌) 2개를 스님에게 답례했다.
[불교신문 2441호/ 7월9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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