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수사모

수덕여관→‘수덕사 고암미술관’으로

淸潭 2007. 8. 25. 18:16

수덕여관→‘수덕사 고암미술관’으로

 

 
불사 거쳐 10월 초 개관…상설전시관 갖춰
복원 중 발견한 습작 등 전시…찻집도 개원
 
 
 

고암 이응노(1904~1989) 화백이 머물렀던 수덕여관이 복원 공사를 마무리하고 고암의 작품 세계를 펼칠 미술관으로 거듭난다. 수덕사와 이응노 화백의 호를 함께 써 ‘수덕사 고암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오는 10월 초 문을 연다.

올 3월 초부터 시작된 복원 불사를 거쳐 단아한 초가집 형태로 모습을 정비한 고암미술관은 고암의 후손들과 제자, 지인들이 기증한 작품 30여점과 함께 복원 작업 중 발견된 습작들을 상설, 전시한다. 또 미술관 한편에는 천년 소나무와 조화를 이룬 찻집도 개원, 덕숭총림과 고암미술관을 탐방하는 불자와 관광객들의 문화적인 쉼터로 자리 잡을 것으로 기대된다.

복원 불사 중에는 다락 벽에 바른 벽지에서 고암의 습작들이 무더기로 발견돼 미술계와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고암의 습작들은 1960년 3월 발행된 신문과 함께 켜켜이 도배가 된 채 발견돼 해방 후부터 프랑스로 떠나기 직전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습작들은 공사 인부들이 벽지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작품들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쓰레기로 버렸으나 고암의 작품 세계와 수덕여관 복원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온 수덕사 주지 옹산 스님이 작품들을 수거해 다시 빛을 발하게 됐다.

습작 중 주요 작품들 중에는 너럭바위에 스님들이 걸터앉아 담소를 나누는 모습과 수덕사로 추정되는 산사, 강에서 노를 젓는 뱃사공을 산과 함께 가볍고 활달한 필치로 그린 산수화 등이 있다. 고암의 초기 작품들의 주류인 아기를 업은 어머니와 난, 대나무를 그린 작품들도 함께 발견됐다. 옹산 스님은 “수덕여관 복원 현장을 둘러보다 버려진 벽지 쓰레기 더미에서 고암의 화풍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 훼손된 채 방치돼 있는 것을 발견, 수거하게 됐다”며 경위를 설명한 뒤, “고암이 머물렀던 고택인데도 사전 조사 없이 공사를 강행한 것은 책임 소재를 떠나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고암은 해강 김규진으로부터 서화를 배웠으며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청죽’으로 입선하며 화단에 이름을 올렸다. 프랑스 앵포르멜 운동을 주도한 파케티 화랑과 전속 계약을 맺어 1961년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63년 살롱도톤전에 출품하면서 유럽 화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1968년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전에서 명예 대상을 획득,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고암은 서양 미술의 본고장에서도 동양화의 근본인 한지와 수묵을 그대로 사용, 스스로 ‘서예적 추상’이라고 이름붙인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하는 데 진력했다. 고암은 ‘동백림사건’(1967년)으로 옥고를 치르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1969년 사면됐다. 1977년 서울 문헌화랑의 ‘무화(舞畵)전’을 끝으로 1989년 세연을 다할 때까지 국내 활동을 하지 못했다.

수덕여관은 이응노 화백뿐만 아니라 근대를 대표하는 신여성이자, 최초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 선생이 신학문을 섭렵한 문인이자 선각자로, 출가 후에는 만공 선사의 맥을 이은 선승으로 추앙받는 일엽 스님과 당대를 대표했던 문화, 예술인 등과 교류했던 곳이다.

수덕사는 고암미술관에 지역 예술인들의 작품 전시회를 개최, 지역 문화-예술계의 활성화에도 힘을 쏟는다.
041)337-6565
 
남배현 기자 nba7108@beopbo.com


913호 [2007-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