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수사모

수덕사 승가대학

淸潭 2007. 10. 6. 18:18

수덕사 승가대학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때는 침류왕 원년(384)이다. 인도 출신 마라난타 스님이 불상과 경전을 들고 뱃길로 지금의 영광 땅을 밟았다. 이제는 최상품의 굴비로 더 유명한 법성포(法聖浦)는 불법이 들어온 성스러운 포구라는 뜻이다. 그는 중국을 경유했다. 중국의 사서(史書)인 ‘북사(北史)’와 ‘수서(隨書)’, ‘주서(周書)’는 “백제엔 승려와 절, 탑이 많다”고 적었다. 당시 문헌에는 수덕사를 비롯해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정사(帝釋精寺) 등 12개 사찰이 전하지만 오늘날 남은 것은 수덕사뿐이다.

 

 

경허 만공스님 법맥 좇아 ‘오늘도 참선實修’

“백제 고승 혜현이 수덕사서 법화경 등 교육” 기록 전해

 1997년 복원…경허스님 격외선지 본받아 禪 공부 중점

 

덕숭총림 수덕사의 정확한 창건연도는 알 수 없지만 학계에서는 대략 위덕왕 재위 시(557~594)로 추정한다. 경내에서 출토된 백제와당이 이를 방증한다. 수덕사 대웅전은 국보 제49호다.

이 무렵 강원과 관련된 기록도 보인다. <삼국유사>와 <속고승전>에는 백제의 고승 혜현(惠現)이 수덕사에 머물며 <법화경>과 삼론(三論)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실렸다. 수덕사 강원은 1997년 복원됐다. 전통적 교과목과 함께 현대적 포교론을 전수하는 데에도 힘쓴다. 참선 실수(實修)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왼쪽 사진설명 >만공스님이 쓴 ‘世界一花(세계는 한 송이 꽃)’ 편액이 걸린 수덕사 천년당 아래를 학인 스님들이 걸어가고 있다.

 

 

강주 선지스님<오른쪽 얼굴사진>은 “경허스님의 뜻에 따라 선(禪) 공부에 많은 사간을 배정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전통 교과목 외 현대적 포교론 전수에도 힘써

수덕사는 경허성우 선사(鏡虛惺牛, 1846~1912)가 머물면서 역사의 전면으로 부각됐다. 교단을 새로 만들기는커녕 절 한 채 짓지 않았지만 경허스님은 근대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칭송받는다. 계허스님을 은사로 의왕 청계사에서 출가한 스님은 유불선 삼교를 통달, 약관의 나이인 23세에 공주 동학사 강주가 됐다. 후대는 ‘중생교화와 불교중흥에 이바지한 위대한 선승’이라고 상찬하지만 정작 스님의 일생은 그다지 유복하거나 아름답지 않았다.

어느 날 만행을 하다가 전염병이 창궐한 마을에 들른 것이 회심의 결정적인 계기다. 세균이 뜯어먹은 주검더미를 목격하고 죽음에 대한 절대공포를 느낀 스님은 그간 자신의 ‘문자공부’가 두려움을 해소하는 데 아무 소용이 없음을 절감했다.

다행히 무사 귀환한 스님은 학인들을 전부 내쫓고 문을 잠갔다. ‘나귀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는 화두를 들고 3개월 동안 조용한 혈전을 벌였다. 문득 문 밖에서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라는 소리를 듣고 홀연히 대오했다. 존재의 ‘빅뱅’을 경험한 이후의 삶은 야수에 가까웠다. 해인사 조실 시절엔 나병에 걸린 떠돌이 광녀를 데려와 며칠 밤낮을 품으며 같이 먹고 잤다. ‘성공’한 아들에게 특별법문을 청하는 어머니 앞에서 옷을 발가벗고는 “이 모습을 보고 내 자식 내 아들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저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고 윽박을 지르기도 했다. 파격과 기행은 곧 처절한 수행이었다. 웬만한 스님들이 진흙 속의 연꽃을 감상하는 수준에 그칠 때 당신은 진흙 속으로 들어가 나뒹굴었다. 그래야만 진짜 연꽃이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만석꾼 집으로 탁발을 갔다. 부자는 ‘내 집 대문 앞에 와서 목탁을 치는 것을 보니 곡식이라도 좀 얻어갈 요량인가 본데, 그대는 과연 중인가 비렁뱅이인가.’라며 스님을 희롱했다. 노골적인 비하에 격노할 법도 하지만 스님은 공손하게 합장을 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절에서 살며 수행하고 있으니 중이 분명하옵고, 오늘은 양식을 탁발하러 왔으니 비렁뱅이 또한 분명한가 합니다.’ 스님의 하심에 감복한 부자는 무례를 뉘우치고 시주를 듬뿍 내놓았다고 한다. 부자의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잠자코 생각해 보면 당신은 사실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스승의 배 위에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을 보고 기겁한 제자 만공스님에게 ‘실컷 놀다가 가게 그냥 내버려두라’고 다독이며 계속 잠을 청한 야담에도, 마음에 오염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충실하려 한 당신의 기개가 서려 있다.

경허스님은 말년에 속퇴해 벽촌에서 훈장 일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아무도 자세한 행장을 알지 못했고 알리지 않았다. 스님이 중흥조로 추앙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왜색과 패배의식에 찌든 승가에 물고기가 물길을 가르듯 선의 활발발(活潑潑)한 역동성을 복원한 덕분이다. 만약 세인들처럼 거드름과 눈치로 세월을 보냈다면, 이런저런 인연에 시달리며 자신의 몫을 지키는 데 연연했다면 이르지 못했을 경지다. 스님은 도저히 코뚜레를 뚫을 수 없는 소였다.

경허스님의 격외선지(格外禪旨)는 만공스님과 벽초스님을 거쳐 현재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원담스님에게까지 이어진다. 경허스님의 법맥은 만공월면 선사(滿空月面, 1871~1946)가 계승했다. 제자 역시 바람 같은 삶을 살았다. 다만 스승이 역사의 변방에서 삶의 진정성에 도전했다면 제자는 광장에 나가 거리낌 없이 진실을 내뱉었다. 31본산 주지 가운데 유일하게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미나미 조선 총독의 주재로 전국 본산주지회의가 열렸다. 총독은 이날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와 통합해야 한다고 일장연설을 했다.

모두가 좌시하고 있을 때 만공스님이 연단으로 걸어 나갔다. “지난번 총독 데라우치는 우리 조선불교를 망친 사람이다. 일본불교처럼 승려들이 대처, 음주, 육식을 마음대로 하게 만들어 부처님이 계율을 깼고 불교계에 큰 죄악을 지은 사람이다. 우리 조선불교는 1500년의 역사 동안 법에 어긋난 적이 없으니, 일본 불교와 합쳐질 이유가 없다. 너희 정부는 종교에 간섭하지 말라.” 1946년 10월20일, 스님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향해 “자네와 내가 70년 동안 동고동락해왔으나 이제 인연이 다해 이별하게 되었네. 그동안 수고했네”라며 껄껄 웃으며 눈을 감았다.

스승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대자유는 다음의 법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인간의 일생은 짧은 한 막의 연극에 지나지 않는데, 이 연극의 한 장면이 막을 내리면 희노애락을 연출하던 그 의식은 그만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리고 육체는 썩어버립니다. 이 얼마나 허망한 일입니까. 이 허망하기 짝이 없는 그 이전인들 1분의 자유라도 있었습니까. 밥을 먹다가도 불의의 죽음이 닥치면 씹던 밥도 못 삼키고 죽어야 하고, 집을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 찬란하게 짓다가도 느닷없이 화재라도 만나면 방 안에 한 번 앉아 보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가는 것입니다. 직접 내 자신의 일에도 이렇게 늘 자유를 잃어버리는데 인생의 집단인 사회와 국가를 세운다는 일이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자유의 바탕을 얻어야 근본적 자유를 얻게 됩니다. 자유가 어디에서 얻어지는지도 모르는 인간들이 자유를 부르짖는 것은, 쌀도 없이 밥을 지어 배부르게 먹는 이야기만으로 떠드는 셈입니다.”

경허.만공스님이 살던 때는 나라 전체가 혼란으로 점철된 시대다. 가난한 만큼 강인했고 역사가 비천한 만큼 스스로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제도화된 승가에서 선지식들이 누렸던 격외는 어쩌면 용납될 수 없는 특권이다. 물론 자유와 진실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경허스님이 온몸으로 선을 보여줬던 그 자리에서 학인들이 말없이 좌복을 깔았다.

수덕사=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 운력

일반인 생계수단 ‘노동’

승가에선 ‘수행의 방편’

사찰에서는 노동을 운력(運力, 雲力)이라고 불렀다. 여러 사람이 힘을 (구름처럼) 모은다는 뜻이다. 울력이라고도 한다. 일반인들에겐 생계의 수단인 노동을 승가에서는 수행의 방편으로 본다.

특히 선종에서는 중요한 수행법으로 여긴다. 중국 당나라 시절 백장스님(百丈)은 90세의 노구에도 다른 대중과 함께 운력에 참여했다. 하루는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제자가 일부러 스승의 농기구를 감추었다.

그러자 백장스님은 하루를 굶었다. 제자가 이유를 묻자 스님은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이라고 대답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말로 유명한 선가의 교훈이다. 수행이 일상생활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학림성사란?

‘학림성사’는 승가대학(강원)을 비롯한 조계종 기본교육기관의 역사와 현황, 학인 스님들의 수행담을 소개하는 기획연재입니다. 제목은 중국 송나라 도융스님이 지은 〈총림성사(叢林盛事)〉에서 따왔습니다. 성사(盛事)란 ‘훌륭한 일’을 뜻합니다.

 

[불교신문 2366호/ 10월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