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서예실

시대를 깨우친 글씨의 힘

淸潭 2007. 6. 13. 16:37

시대를 깨우친 글씨의 힘

 

손으로 쓰는 글씨의 힘은 약해졌지만, 그 글씨를 받치는 서예가의 정신은 살아 있다. 붓을 들어 시대를 내려치는 강직한 글씨를 남기고 간 이들에게 서예는 도(道)였다.

소암 현중화 작, ‘XO뿐’.

“나는 70년 동안 열 개의 벼루를 갈아없애고 천여 자루의 붓을 다 닳게 했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마천십연(磨穿十硏)’에서 이런 명구를 남겼다. 명필 ‘추사체(秋史體)’를 낳은 비결, 아니 자부심이다. 추사의 글씨는 한눈에 ‘참 장하다’는 말이 절로 날 만큼 괴력과 개성이 넘친다. 조형미가 뛰어나 ‘그린’ 글씨라는 생각도 든다. 한자를 모르는 이가 봐도 느낌이 온다. 서예가 갇혀 있던 문자미(文字美)의 틀을 깨고 회화미(繪畵美)로 돌려놓은 것이 추사의 공력이다. ‘문자를 가지고서 보리(菩提 , 크게 깨우침)에 든다’고 가르친 추사는 글씨의 힘으로 시대를 깨우쳤다.
 
운여 김광업의 선필
손으로 쓰는 글씨의 힘이 한없이 미약해지는 이 시대에도 글씨는 살아 있다. 붓을 들어 시대를 내려치는 이가 함께 숨쉰다. 글씨가 강직할수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것은 일종의 역설일까. 한국 서예사에 낯선 이름으로 남은 서예가는 많다.
몇 년 전 특별전이 열렸던 운여 김광업(1906~76)이 그런 이다. 호 그대로 ‘구름처럼(雲如)’ 살다 간 그는 맑고 시원한 선필(禪筆)을 남겼다. 예술을 팔아 밥을 먹지 않고, 이름을 위해 일가를 이루지 않았으니 글씨에서 도(道)를 일군 자유인이라 할 만했다. 운여의 붓놀림은 골기(骨氣)와 부드러움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경지를 보여준다. 추사가 ‘보리’를 얘기했듯이 운여에게도 글씨는 ‘반야(般若)’, 즉 세상의 진리를 인식하는 지혜였다.
 
소암 현중화의 취필
소암 현중화(1907~97) 또한 세상이 무심히 흘려보낸 우리 시대의 서예가다. 소암은 10년 세월을 관 뚜껑이 덮인 채 무명으로 남아있었다. 제주도 서귀포에 눌러앉아 오로지 글씨 쓰는 일로 구십수를 보낸 그에게 글씨는 생명이자 숨쉬기였다. ‘먹고 잠자고 쓰고’라 한 한글 작품이 자신의 삶을 요약한다. ‘서방정토로 돌아간다’는 뜻의 ‘서귀소옹(西歸素翁)’을 호 삼아 먹고 자는 일 외에는 오직 글씨에서 즐거움을 찾은 그의 삶이 보인다. 6월 17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02-580-1284)에서 열리고 있는 소암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 제목도 ‘먹고 잠자고 쓰고’다. 소암이 남긴 대표작 100여 점 속에 그의 삶이, 우리 시대가 살아 숨쉰다.

글씨는 어떻게 시대와 함께 호흡하는가. ‘XO 뿐’이란 80년 작품이 있다. ‘광주 데모 때 그날’이란 글이 붙어 있다. 이 글에는 두 가지 뜻이 겹쳐 있다. 소암은 5ㆍ18 민주화항쟁 때 광주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핏빛으로 물든 세상을 바라보며 붓을 들었다. 그 야만의 시절에 뭐라 쓸 수 있을까. 그는 붓을 들어 단 세 자를 썼다. ‘XO뿐’. 세상은 X 아니면 O, 이쪽 아니면 저쪽을 고르라고 윽박지르니 이를 어찌할꼬. 소암은 막막한 현실 앞에서 오열하듯 글씨를 썼다. 거칠기 그지없는 갈필이 찢어지는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보인다.

이 글씨는 또 하나의 뜻을 담고 있다. 소암은 술을 좋아했다. 그의 예술을 말할 때 술을 빼놓을 수 없다. 그를 아는 이는 소암의 모든 작품이 ‘취필(醉筆)’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한다. 소암은 제사장이 접신을 하듯 술을 매개로 필신(筆神)을 불렀다.
그는 술 중에서도 코냑을 즐겼고, 코냑의 대표 상표가 ‘XO’다. 다시 말해 뒤집힌 세상을 바라보니 그 마음을 달래줄 것은 ‘술뿐’이란 얘기다.

소암의 글씨는 야성미가 넘친다. 비정형(非定型)의 다이내믹한 동세(動勢)가 뛰어나다. 글씨는 죽지 않았다. 변방에 엎드려 ‘먹고 잠자고 쓰는 것밖에’ 모르는 서예가가 시대를 기록한다. 세상은 여전히 ‘XO뿐’인가 하니, 소암이 칼칼하게 쓴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를 읽으며 한 시름 잊노라.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算)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소암 현중화 작, ‘장진주사’

소암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건너가 글씨를 배웠다. 그는 회고한다. “내가 이 글씨 쓰는 일에 대해 ‘이 길이다’고 판단한 것은 서예가가 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이 글씨로 일본을 이겨야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고, 일본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던 거지요. 그래서 글씨로 독립운동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소암에게 글씨는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는 글씨로 일본을 이기고, 그를 통해 중국까지 아우르며 동양 3국의 서예세계를 평정하고자 뜻을 세웠다. 비록 동시대인의 이해를 받지는 못했지만 글씨는 남아 그 정신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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