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능력을 기독교로 보면 한계가 있으나, 불교로 보면 한계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불교로 보겠습니다.
인간의 능력에는 일반적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능력과,
특별한 몇몇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천재적인 능력과, 인간의 능력
으로서는 불가능 할 것 같은 초인간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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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무엇을 만들어 낼 수는 없기 때문에
초능력도 원래 갖추어진 것이나, 우리들이 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은 우리들의 의식(마음, 생각)으로서 만들어 지며,
의식은 제6의식(意識), 제7말나식(末那識), 제8아뢰야식(阿賴耶識)의
세가지가 있으며, 6식은 일반의식, 7식은 잠재의식 또는 중간의식,
8식은 초월의식 이라고도 합니다.
평범한 사람의 경우에는 6식과 7식의 자아의식(自我意識)을
주로많이 쓰고 있으므로 7식에 있는 천재성을 쓰고 있지 못하며,
초능력을 발휘 할 수 있는 8식은 전혀 쓸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의식 중에서 제7말나식에 있는 자아의식(我相;아애,
아만, 아탐, 아집)이 가장 문제인데, 여기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생각은 번뇌, 망상 이며, 이것이 모든 생각을 지배해 버리기
때문에 6의식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분별의식을 자기에게 유리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7식에 잠재해 있는 모든 천재성을 발휘할
수 없게하며, 8초월의식은 아예 쓰지도 못하게 합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7식의 자아의식을 무명(無明)이라고 하며, 이것만
걷어내면 모든능력은 저절로 살아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하늘에 햇빛은 늘 비추고 있으나, 구름이 잔뜩 끼이면
햇빛을 가리는 것과 같아서,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구름(무명)을
걷어내는 것을 뜻하며, 이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수행에는 마음(자아의식)이 일어나지 않게하는 사마타(止觀,
그치게 하는 것)수행과, 일어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주시하여
알아차리게 하는 마음챙김, 즉 관조(觀照)의 방법인 위빠사나
(觀觀)수행이 있으며, 사마타수행은 삼매(三昧)나 선정(禪定)에
들게하여 마음의 근본자리(本性,性品)를 보게 함이고, 위빠사나
수행은 마음자리를 깊게 관찰 함으로서 지혜(智慧)를 얻게하는
수행이며, 이 둘은 항상 함께 닦아야 함으로 지관쌍수(止觀雙修)
또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 합니다.
사마타 수행에 치우치면 편안함에 빠지고(혼침,昏沈), 위빠사나
수행에 치우치면 산란함(도거, 掉擧)에 빠지므로 반드시 함께
수행 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수행을 원래의 방식대로 하려면, 오늘날 우리들 에게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매우 어렵기 때문에 일상생활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야 하며, 그 방법은 앞의 글에서도 몇번 언급한
TV를 시청할 때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볼 것인가?를 예로 하겠습니다.
TV를 볼때에 누구나 자기의 생각(고정관념,주관적)으로서 보기
때문에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의 실상이나 프로그램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오면 편을 들게되고, 싫어하는 사람이
나오면 비방을 하게되며, 옆에 함께 있는 사람이 자기와 반대이면
옆사람과도 말다툼을 하게 됩니다. 분별심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인 것이므로 항상 변하며, 원래 없는 것을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어려울 때에 돈을 빌려주면,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돈을 빨리 갚으라고 재촉을
하기 시작하면 싫어지게 됩니다. 이 사람은 과연 좋은사람 일까요?
나쁜사람 일까요? 그러므로 이것이 별것 아닌것 같지만 확대해보면
모든 분쟁과 고통이 이문제로 부터 시작 됩니다.
이 습관을 고치려면, 분별심이 나오는 마음을 알아 차려야 합니다.
(위빠사나) 알아차리는 것을 자각(自覺)이라고 하며, 불교는
`자각의 종교다'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 지금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나왔구나! 평상시에는 비방을
하였는데 말을 참아야 하겠구나, 라고 생각하고 말을 하지않고
보는 것입니다.(사마타)
이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좋아하는 사람이 나왔을 때에도 역시
말을하지 않고 보아야 하는데, 그 까닭은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내생각(我相,고정관념)을 버리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중도정견(中道正見) 이라고 합니다.
이 수행이 쉬울것 같지만 막상 부딪혀 보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쉽기로 말하면 이것 보다 더 쉬운 것이 없고,
어렵기로 말하면 이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사실은 이 수행이 시작이자 수행의 끝입니다.
실천 하다가 끊어지면 다시 시작 하면 됩니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반드시 이루어 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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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보면서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나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것 인데도 이것을 실천 하기가 쉽지 않은데, 나와 직접
적인 상관관계가 있으면 더욱 실천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 방법을 매일매일 실천 하면서, 동시에 평소에 내가 하기 싫어하든
모든일을 수행의 방편으로 활용해 보십시요.
하루하루 자신의 변화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으며 주변도 함께
변하고 있음을 알게되고, 고통은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매일매일 실천하면서 종교공부를 함께하면, 깨달음이 동시에
체득(體得)되어 옳바른 수행이 될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분별심 차별심에 떨어져 이익되는 것은
내것으로 만들고, 이익이 없는 것은 버리는, 나만을 이익되게 하는
중생심(衆生心)을 모두를 이익 되게하는 불심(佛心)으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물위를 걸어 다니고, 새처럼 날아 다니거나, 불치병을
낮게하는 것도 초능력이지만, 진정한 초능력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 늘 만족하고, 어디에도 걸림이 없어 무애자재(無碍自在)한
삶을 살아가는 대자유인(大自由人) 입니다.
이것을 완전하게 성취하신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 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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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한번 강조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모든 대상(경계;나 외의 모든 것)을 보실때에 분별심, 차별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보는 수행을 끊어지지 않게 계속 하십시요!
그러면 누구나 다 성불(成佛) 하십니다.
까닭은 이 속에 우주의 모든 이치가 다 들어 있기 때문 입니다.
"처음 먹은 그 마음이 부처를 이룬때고, 시작이 반이며,
천리길도 한걸음 부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