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들고 24시간 정진하는게 수행자 참모습”재추대 된 법전 종정예하 |
조계종 제12대 종정으로 재추대된 도림 법전 종정예하는 출가 이후 60여 년간을 오직 수행에만 몰두해왔던 한국불교의 대표적 선승(禪僧)이다. 법전 종정예하는 선방을 찾는 수좌들 사이에서 ‘절구통 수좌’로 불린다. 수마(睡魔)를 조복 받아 며칠째 한 자리에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용맹정진 하기 때문. 한번은 수좌들이 법전스님이 정말 수마를 조복 받았나 확인하기 위해 장군죽비를 들고 지켜본 적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 칠일이 지나도록 꿈쩍하지 않아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사진설명: 2005년 9월 동국대학교 일산병원 개원식에서 법전 종정예하가 대중에게 법문을 설하고 있다. 종정예하는 교시와 법문을 통해 불자들에게 동체대자비의 마음으로 고통에 빠진 중생을 교화할 것을 늘 강조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법전 종정예하의 이런 수행정신은 1947년 성철.자운.청담스님과 함께했던 문경 봉암사 결사 일화에서 거듭 확인된다. 조계종 기획실이 최근 밝힌 종정예하의 소참법문 발췌록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한다.
성철 자운 청담 스님과 함께 ‘봉암사 결사’ 용맹정진으로 수마 조복 받은 ‘절구통 수좌’
“노장님(성철스님)께 ‘법전이가 아무래도 경계가 있는 것 같으니 한번 점검을 해보라’고 귀뜸을 했던 모양입니다. 하루는 불려갔습니다. ‘무엇이 너의 송장을 끌고 왔는냐? (拖死屍句子) 한마디 일러라.’ 그러길래 오른쪽 주먹을 내보였습니다. ‘다시 일러라’ 하길래 왼쪽 주먹을 내보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런 식으로 말고 말로서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고! 아이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것 말고 다시 한번 일러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꽉 막혀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쏜살같이 문 밖으로 밀어내더니 세숫대야의 물을 머리에다 퍽 뒤집어 씌우는 것이었습니다. 순식간의 일이었습니다… 대중들은 느닷없이 벌어진 일에 ‘노장님이 갑자기 왜 저러시나’ 하면서 전부 영문을 몰라 서로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나만이 그 이유를 알아 혼자서 빙그레 웃었습니다.” 법전 종정예하는 당시의 상황을 지난 2003년 발간한 저서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에서 “그 소란을 뒤로 하고 봉암사 앞마당에 서니 겨울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가슴으로 쏟아져 내리는 느낌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1925년 전남 함평에서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난 법전 종정예하는 14살 때부터 출가수행자의 뜻을 품었다. 청정계율을 강조하는 묵담스님의 밑에서 고된 행자생활을 보낸 스님은 17세가 되던 해에 영광 불갑사를 찾았다가 설제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고 본격적인 정진을 시작했다. 성철스님이 파계사 성전암에서 10년 동안의 동구불출(洞口不出)에 들어갈 때 철조망으로 울타리를 친 사람도 바로 법전스님이다. 성철스님이 공부할 수 있게 모든 준비를 마친 법전스님은 홀로 떠나 대승사 묘적암에 찾아들었고, 스님은 당시 쌀 다섯 되로 밥을 해 차가운 방 한 구석에 두고는 한 덩어리를 떼어 김치 한 조각과 함께 먹고 찬물을 마시는 식사를 하며 수행했다. ‘어차피 견성하지 못하면 죽을 목숨인데 씻어서 무엇하랴’는 매서운 결심이었다고 한다. 결국 깨달음을 얻은 스님은 묘적암을 떠나 파계사에 주석하던 성철스님에게 인가를 받았다. 종정예하는 요즘도 한결같이 “온대로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자신도 세상도 살릴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법전 종정예하의 한결같은 수행정신은 깨달음을 구하는 많은 출ㆍ재가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배재수 기자 dongin21@ibulgyo.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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