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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통적인 세시풍속 (歲時風俗)

淸潭 2007. 1. 9. 14:23

리의 전통적인 세시풍속 (歲時風俗)
 

세시풍속이란 일정한 시기가 되면 주기적으로 행해지는 관습(慣習)으로 시계성(時季性)을 가지고 있는 연중행사이다. 즉, 관습적으로 반복되는 생활양식을 말한다.

'세시(歲時)'란 '무시(無時)'의 대칭적인 의미로 쓰이는데 특정한 날, 즉 명절 중심의 행사로 구성되어 있음을 말한다. 조선 정·순조 때 사람인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에 쓰인 문구를 보면, 세시(歲時)와 무시(無時)의 개념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즉, '甑餠以歲時禱神又於朔望及無時禱神亦如之'라 하여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오랜동안 사노라면 여기에는 하나의 관습이 생기게 마련이고, 이것이 그 사회에 정착하여 계절마다 되풀이되어 세시풍속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세시풍속은 살고 있는 지역의 자연적(自然的) 조건인 풍토성(風土性)과 그들이 가지는 역사성(歷史性), 또는 그들이 이룩한 사회성과 생업에 따라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이는 세시풍속이 향토성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간·계층간·세대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요소가 있으니 이는 민족성이라는 테두리 속에 민속사회가 형성시켜온 자생문화요, 고유민속인 것인다.

포천군은 지리적으로 서울특별시와 근거리에 자리하고 있고, 강원도와 접하고 있다. 서울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의 왕도(王都)였기 때문에 옛날의 풍속을 많이 간직하고 있고, 이 중에 대부분은 점차로 파급되어 그 고장의 독특한 풍속으로 굳어지기도 했다. 따라서 포천군은 서울 근거리에 위치한 지역적 조건으로 다양한 풍속이 정착되었다.

역사적으로 처음에 진한(辰韓)의 땅이었다가, 삼국 초기에는 백제(百濟)의 영향하에 있었다.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과 장수왕(長壽王) 때에는 백제의 북계(北界)를 잠식(蠶食)함에 따라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고, 신라(新羅) 때에는 진흥왕(眞興王)의 영토 확장에 따라 그 판도 내에 들게 되었다. 이런 동안에 진한·백제·고구려·신라 등의 특유한 세시풍속이나 놀이들이 한데 뒤섞이게 되었다.

그렇게 때문에 포천군은 북에서 온 고구려의 풍속의 영향도 받았을 것이고, 동남방에 흥기(興起)하였던 신라풍속의 일부도 남아 있을 것이며, 진한·백제의 특유한 세시풍속도 그대로 전하개 되어 포천군은 북쪽으로 황해도에서 행하여지는 풍속이나 놀이와도 비슷한 점이 있는가 하면, 강원도의 풍속이나 충청남·북도의 풍속과도 비슷한 점이 많으나 그 중에서도 황해도의 영향이 가장 큰 것 같다. 따라서 포천군은 다른 고장에 비하여 가장 다양하고 풍부한 세시풍속적인 행사나 놀이를 간직하고 있다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세시풍속을 분류해보면 궁중속(宮中俗)과 민간속(民間俗)으로 양대별 되는데, 지금의 세시풍속도 이러한 영향을 적지않게 받은 것으로 파악된다.

우리의 민속은 '가가례(家家禮)'란 말이 있듯이 각 지역 또는 각 가정마다 다양한 양상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남주북병(南酒北餠)'이니 '하장동저(夏醬冬菹)', '하선동력(夏扇冬曆)' 등과 같은 기본유형을 갖추고 있으므로 민족문화의 재조명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할 때, 세시풍속의 이해와 현대적 의미의 재창조·재음미는 새로운 가치관과 생활관, 문화의식에 적지않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포천군의 세시풍속은 지리적으로 서울·경기 일원에 인접해 있으므로 먼저 이 문화권의 일반적인 세시풍속을 살펴본 뒤, 포천군 지역의 현지조사 자료를 수록하여 과거와 오늘날의 현대적인 양상 및 그 변모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제1절 서울·경기 지방의 세시풍속
 

시대적으로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서울·경기지방의 풍속은 고문화시대(古文化時代)를 거쳐 고려의 불교문화돠 조선 500년의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중국과 일본 등 인접국가들의 문화교섭에 따른 고유성과 외래성의 혼재, 왕권중심의 궁중풍속과 일반 서민들이 형성해 온 민간풍속의 이중구조를 형성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서울·경기

지방의 세시풍속이 갖고 있는 특지으로 외국문물의 이행(移行)에 수반한 문화의 교섭과 수용, 동화 및 궁중·상층 사회에 형성된 생활문화의 하양전파, 이동의 제반 행위에 따른 결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오늘의 시점에서 서울·경기의 세시풍속은 단순한 회고적 재현의 의미에 만족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생활문화의 전반에 걸쳐 우리만이 가질 수 있었고, 또한 우리의 사유와 관념, 독창성에 의해 잉태된 민속문화의 기반하에 시대에 맞고 또한 전통에 부합하며, 역사와 문화의식에 벗어나지 않는 창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세시풍속이 형성되어 가고 있으며, 그러한 방향으로 정착되어 간다고 생각된다.

서울·경기의 세시풍속에는 특징적인 것을 한 예를 든다면, 반가(班家)에서는 부녀자가 정초에 세배를 다니는 대신 문안비(問安婢)를 보낸다든가, 농가에서는 폭죽놀이를 했으나 서울에서는 세포(歲砲)를 쏘았고, 관에서는 세수(歲首)에 70세가 넘는 조관(朝官)들에게 쌀과 고기를 하사하는 상치세전(尙齒歲典)이 있었는가 하면, 광통교(廣通橋)·수표교(水標橋) 등에서 대보름날 다리밟기를 하였다.

또한 상류층의 경우에는 승경도(陞卿圖)라는 관직도가 그려진 놀이가 성행하였던 것도 서울이 행정과 문화의 중심지였으므로 지방에서는 입신출세하는 것을 서울에 있는 관직을 제수(除授)받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지방화시대와 향토문화 유산의 소중함을 강조함에 따라 무분별한 중앙집중현상이 차츰 희박해져가고 있다. 따라서 서울이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사고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서울 자체돠 모든 민속과 풍물의 중심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서울지방에만 있을 수 있는 일개 향리로서의 세시풍속의 면모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Ⅰ. 봄
 

봄은 1년 중 음력 1월에서 3월까지로 이때는 만물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때이다. 또한 향후 다가올 1년의 풍요와 안녕을 미리 축원하는 행사가 집중되어 있다.

봄은 24절기 가운데 입춘(立春)·우수(雨水)·경칩(驚蟄)·춘분(春分)·청명(淸明)·곡우(穀雨)가 들어 있는데 춘생하장(春生夏長)·추수동장(秋收冬藏)의 농업생산뿐만 아니라 생활력(生活曆)과 재의력(祭儀曆)이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봄의 명절로는 1월의 설날행사. 대보름 명절의 예축행사(豫祝行事), 점복(占卜), 입춘(立春) 등이 들어 있고, 2월에는 머슴날, 풍신제(風神祭), 3월에는 삼짇날의 행사가 명절에 든다. 춘절로 나눈 것은 4계절이 비교적 뚜렷한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생산력적인 것과 신앙의례적인 행사가 주축을 이룬다.

 

 

1. 정월(正月)

1월은 정월이라고 하는 맹춘지월(孟春之月)로 한 해가 시작되는 달이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해가 바뀌면서 상서롭고 복된 한 해가 되기를 빌고, 집안이나 이웃끼리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의미에서 여러가지 행사와 놀이가 거의 한 달 동안은 끊임없이 계속된다고 할 정도이다. 특히 '정월 선보름'이라 하여 1일에서 15일까지에는 집단적·개인적인 놀이와 행사가 성행하여 이 한 달 동안의 행사나 놀이가 다른 열한 달을 합한 것보다도 많을 정도이다. 이때의 세시풍속은 설날에 차례(茶禮)가 행해지고 12지지(十二地支)에 의한 동물민속, 인일(人日)의 풍속, 대보름과 입춘의 각종 점세행사(占歲行事)와 유희가 벌어지고 정초의 잡사(雜事), 절식(節食) 등을 들 수 있다.
 

(1)설날〔元旦〕

1년 중 한 해의 첫째날을 명절로 여기고 있음은 고금이 같다. 1월 1일을 세수(歲首)로 칭하여 원단(元旦)이라고도 하는데, 흔히 고유어로 '설' 또는 '설날'이라 부른다.

대회일(大晦日)로 묵은 1년은 지나가고 설날을 시점으로 하여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므로 그 해의 운수는 첫날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서 이날에는 새 마음과 몸가짐으로 맞이하였다. 그러므로 벽사초복(抇邪招福)을 빌며 근신하고자 했으니 ≪고려사 高麗史≫ 등의 문헌에는 설날을 한자로 '신일(愼日)'이라 하였다. '설'의 어원을 '섧다' 또는 '슬프다'에서 찾고 있을 만큼 비수(悲愁)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훈차(訓借)도 '달도(嫤宧)'라 한 것도 새해에 들어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하겠다.

'설'과 관련된 민속으로는 ≪삼국유사 三國遺事≫ 사금갑조(射琴匣條)에 설화가 있으마 이는 정초의 12지지 동물금기속(動物禁忌俗)과 긴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설'은 한 해를 뜻하는 '살〔歲〕'의 고어인 '설'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농사를 천하지대본으로 여겨온 한민족은 이미 신라 때에 정초에는 서로 경하(慶賀)하고 일월신(日月神)에게도 배례(拜禮)하였다.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三國史記≫ 권5 신라본기(新羅本紀) 진덕왕조(眞德王條)에 의하면 원일의 하정지례(賀正之禮)는 진덕왕 때부터라고 하였다.

민간속(民間俗)으로는 설날 아침에 세찬(歲饌)과 세주(歲酒)를 마련하여 사당에 진설하고 조상에게 차례를 올린다.
 

① 설빔

설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미리 마련해 놓은 옷을 입는데 이 새옷을 '설빔'이라고 한다. 설빔은 한자어로는 '세장(歲粧)'이라 하는데 ≪열양세시기 嶜陽歲時記≫에는 '세비음(歲庇陰)'이라 하여 '설'과 '비음'의 합성어임을 알 수 있다. '비듬'은 '빗다'의 파생어로 '꾸미다', '무성하다'에서 나온 말이며, 설날에 잘 꾸며 성장(盛裝)하는 것을 말한다. 새해에 새옷을 입는 것은 새로운 마음의 출발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 설빔은 남녀노소·빈부귀천(貧富貴賤) 할것없이 생활의 정도에 따라 준비하는데 각 가정에서는 가을부터 옷감을 마련하였다가 미리 정성껏 옷을 만들어 둔다. 특히, 어린아이들은 설빔에 대한 기대가 크고 서로 자랑도 하기 마련이다.

옛날에는 두루마기, 도포, 버선, 댓님에 행전까지 갖추어 새로 한 벌을 지으며, 바지 저고리에는 새솜을 두어 엄동설한에도 추위를 견디도록 한다. 신은 어른은 징을 박은 가죽신 또는 미투리, 여자는 꽃신 또는 꽃미투리를 신기도 하고, 중류 이하에서는 고운 짚신을 신는 것이 통례였다. 빛깔은 남자 어른은 대체로 흰빛이고, 어린아이나 젊은 색시들은 여러가지 물감을 써서 물을 들여 옷을 지어 입는다. 특히, 어린아이들은 색동저고리를 입는데 이것을 '까치저고리'라고도 한다. 이렇게 온 집안 식구가 설빔으로 갈아 입은 다음에 차례를 지낸다..
 

②차례〔茶禮〕

설날 아침 일찍 세찬(歲饌)과 세주(歲酒)를 마련하여 제사지내는 것을 '차례'라 한다. 차례를 지낼 때에는 아침에 몸을 깨끗이 하고 설빔으로 갈아 입은 다음 원근(遠近)의 자손들이 모두 종가집에 모여 함께 지내는데 단란한 분위기 속에서 행해진다. 사당이 있는 집에서는 사당에서 차례를 지내는데 사당은 지손(支孫)이 모시지 않고 장손(長孫)이 모신다. 사당에는 부모·조부모·중조부모·고조부모까지 4대조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설날에 차례대로 제사하는데, 5대조 이상은 차례와 기제사(忌祭祀)도 지내지 않고 10월 시제(時祭) 때만 제사를 지낸다. 4대조의 차례는 윗대에서부터 차례로 지내는데 사당문(祠堂門)을 열고 신주(神主)를 모셔다가 지내거나 신주가 없는 집은 지방(紙榜)을 써서 붙이고 지낸다. 집안이 번성한 집에서는 아침에 모두 와야 하므로 12시 가까이 되어서야 차례를 지내는 집도 있다.

제수(祭需)는 술·떡국·과일·적 등이며, 술은 원칙적으로 소주는 쓰지 않는다. 떡국이 주식이 되어 지내기 때문에 8월 한가위의 송편 차례에 비하여 '떡국 차례'라고도 한다. 이때에 메는 짓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삼색과일, 편 등 모든 음식이 제상에 오르는데, 이것을 요약하여 주과포혜(酒果脯醯)라고 한다.

차례는 오래 전부터의 관습으로 설날과 추석날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가족들끼리 혈연의 정을 느끼며 조상들께 봉사(奉祠)하는 것이다. 이는 숭조보근(崇祖報根)의 오랜 전통이며 추원보본(追遠報本)의 미풍양속인 것이다. 이 설날에는 타향에 나가 있던 사람도 모두 고향에 돌아가 생존하신 분에게는 인사를, 돌아가신 분에게는 차례를 지내기 때문에 대소가(大小家)의 여러 일가들이 이때에는 거의 다 모이게 된다. 지금도 설날 전후에는 민족대이동의 귀성인파로 교통이 대혼잡을 이루는 것은 강한 혈연공동체의식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③ 도소주(屠蘇酒)

차례가 끝난 다음에 음복(飮福)이라 하여 제사에 쓴 술이나 다른 음식을 제관이 그 자리에서 나누어 먹는다. 특히, 정월 차례 뒤에는 음복과 곁들여 도소주를 마신다. 도소주는 술에 산초(山椒), 방풍(防風), 백술(白朮), 밀감피(蜜柑皮), 육계피(肉桂皮) 등을 조합하여 만드는데, 이것을 마시면 1년의 사기(邪氣)를 없애고 오래 산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풍속이다. 이 풍속에서 나주에는 보통의 술도 도소주라하여 모두 둘러 앉아서 마셨느데, 특이한 것은 "송곳은 끝부터 들어간다" 하여 나이 어린 사람부터 마시기 시작하여 차차 나이가 많은 노인의 순서대로 마셨다.
 

④세배(歲拜)

차례가 끝나면 모두 자리에 정돈하여 앉는다. 이때 조부모·부모·백숙부모·형제 등 차례로 절을 하고 새해 첫 인사를 하는 것을 세배라 한다.

집안에서 세배가 끝나면 차례 지낸 떡국과 세찬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일가친척과 이웃어른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리게 되는데 사당이 있는 집에서는 먼저 사당에 절을 鱁한다음 세배를 드린다. 세배를 받은 측에서는 어른의 경우 주식(酒食)을 대접하고 아이에게는 과자와 돈을 주며 정담을 나눈다. 일가어른이 먼 곳에 살 때에는 수십리 길을 찾아가서라도 세배를 드리는 것이 예의이다. 먼 곳에는 정월 보름 안에 찾아가서 세배하면 인사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에는 궁중의 정초조하(正初朝賀)가 기록되어 있는데 의정대신(議政大臣)이 모든 관원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가 새해 문안을 드리고 정전(正殿)의 뜰로 가서 조하(朝賀)를 올린다고 하였느데, 지금은 양력 정월 초사흗날 시무식이라 하여 각 관청별로 간략하게 치르고 있다.

 

⑤ 덕담(德談)

정초에 세배가 끝나면 말로써 새해 인사를 교환하는데 이것을 덕담이라고 한다. 이때 "과세 안녕하셨습니까?" 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며, 연소한 아이들에게는 "새해에는 복 많이 받게." 또는 "새해에는 소원성취하게." 등으로 처지와 환경에 맞게 말을 한다. 덕담은 새해를 맞이하여 서로 복을 빌고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축의(祝意)를 표시하는 것이다.
 

⑥ 성묘(省墓)

설날 집안에서 세배가 끝나면 가족이 함께 조상의 묘소를 찾아가 성묘를 한다. 성묘는 글자의 뜻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이상이 없었는지를 확인하고 살피는 의식으로,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다는 인사를 고하는 것이다. 생존한 어른에게는 세배를 하지만 이미 사별(死別)한 조상에게도 생존시처럼 인사르 드리는 것이다. 수많은 자손들이 나이 많은 어른을 앞에 모시고 조상의 효열담(孝烈談)을 들어가면서 줄을 지어 눈길 속에 성묘가는 모습은 아름다운 정경이다.
 

⑦ 세화(歲篐)

설날에는 대문에 세화를 붙이는데 갑옷을 입고 한 손에 도끼를 들고 서 있는 장군상(將軍像)을 그려 붙이며 이를 문배(門排)라 부른다.

민가에서 붙이는 문배는 궁중속에서 유래하였으며, 궁중에서는 한 길이 넘는 문배를 대궐문에 붙였다. 또 문배에는 강포(絳袍) 오모상(烏帽像)을 그려 중합문(重閤門)에 붙이고 종규가 귀신을 잡는 화상(篐像)이나 귀두상(鬼頭像)을 그려 문에 붙였는데, 그것은 역신(疫神)·화난(火難)·재앙(災殃) 등의 불상(不祥)을 붸으려는 목적에서 행하였다.

또 조선시대의 도화서(圖篐署)에서는 수성선녀상(壽星仙女像)과 직일신장상(直日神將像)울 그려서 헌상하고 관아(官衙)에 나누어 주거나 선물로 주기도 했는데, 이를 '세화'라 한다.

여염집에서도 벽에다 닭과 호랑이의 그림을 붙였느데, 닭과 호랑이는 길상(吉祥)을 뜻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닭이 문호(門戶)에 쓰인 것으로는 중국의 풍속을 상층계급에서 받아들인 것이 민간에까지 내려간 형태로, 닭은 양성(陽性)으로 동방(東方)의 동물이므로 화복(禍福)이 출입하는 문에 닭의 피를 바르거나 계두(鷄頭)를 걸었던 것이 차츰 그림으로 바뀐 것이다. 닭울음과 벽삼(抗邪)와는 긴밀한데 계명성(鷄鳴聲)에 야광귀라는 귀신이 붸겨 달아나는 모습ꁁ이 이야기되는 것과 닭울음으로 기상하고 문을 개폐(開閉)하는 것이 세화로 쓰인 까닭이다.

호랑이 역시 양성(陽性)의 동물로 고대 예국(濊國)에서는 '제호이위신(祭虎以爲神)'이라 하였으며 단군신화(檀君神話)를 비롯하여 민간속으로는 산신(山神)으로 여겨 신성시하고 있음을 보아서도 호화(虎篐)가 세화로 쓰인 이유가 밝혀지는 셈이다. 또한 정월은 인월(寅月)이므로 호랑이를 길상의 동물로 삼았고 재액을 물리치는 백수지장(百獸之長)으로서 상징되었다고 하겠다.

신라 때는 처용(處容)의 화상이 문배로 쓰였다.
 

⑧ 복조리

섣달 그믐날 자정이 지나면 이른 새벽에 복조리 장수들이 복조리를 사라도 외치고 다닌다. 자정이 지나면 새해가 되므로 각 가정에서느 수세(守歲)를 하느라고 잠을 자지 않고 있다가 복조리를 산다. 이를수록 복이 더 많이 들어온다는 풍속에서 될 수 있는 대로 일찍 산다.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1년 동안 쓸 만큼을 사서 천정이나 안방문 위에 걸어두고 쓴다. 이때 거기에 실이나 성냥 등을 담아두는데 장수(長壽)와 재복(財福)을 바라는 이유에서 그와 같이 한다. 조리는 쌀을 일어서 밥을 짓는데 쓰이는 기구이므로, 매일 쌀을 이는 복조리를 설날 아침에 사면 복이 묻어 들어온다는 것이다.

요즈음에는 '복조리 사라'는 소리도 흔하게 들을 수 없으며 대나무조리보다는 플라스틱조리가 인기가 더 있다. 전에는 담너머로 던져놓고 다음날 아침에 와서 돈을 받아가는 풍경도 볼 수 있었으나 아파트 생활문화는 이러한 여유도 차츰 빼앗아 가고 있다. 더우기 쌀을 주부가 일지 않아도 미곡상에서 돌 고르는 기계로 깨끗하게 돌을 걸러낸 쌀을 판매하므로 '조리'라는 도미문화(稻米文化)의 도구는 차츰 박물관으로 가야할 형편이고 이에 따라 복조리 사라는 정초의 풍속도 사라져 갈 것만 같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복조리를 사는 사람들이 계속 있는 이유는, 조리가 쌀을 이는 도구로써 쌀이 없으면 조리가 소용없게 되므로 생활이 안정되어 발복(發福)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느 축원주술행위(祝願呪術行爲)로 볼 수 있으며, 문 위나 벽에 거는 이유는 조리의 눈이 많으므로 이는 광명을 상징하여 벽사진경(抗邪進慶)의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도 생각된다.
 

⑨ 삼재면법(三災免法)

삼재란 수재(水災)·화재(火災)·풍재(風災)를 말하기도 하고, 병난(兵難)·질역(疾疫)·기근(饑饉)을 들기도 하는데, 개인에게 삼재가 들면 그 해는 액운이 들게 된다.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행운과 불행을 겪게 되는데 불행이 든 해를 액년 또는 삼재년이라고 한다. 따라서 삼재의 해에 해당하는 사람은 액을 붸고 삼재를 면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불행이 닥쳐온다고 한다. 삼재란 누구나 같이 맞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해라도 삼재의 해에 해당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으며 그것은 다음과 같이 따졌다.

즉, 12지(十二支)로 따져서 사(巳)·유(酉)·축(丑) 년에 낳은 사람은 해(亥)·자(子)·축(丑)년에 삼재가 들고, 신(申)·자(子)·진(辰) 년에 낳은 사람은 인(寅)·묘(卯)·진(辰)년에, 해(亥)·묘(卯)·미(未) 년에 낳은 사람은 사(巳)·오(午)·미(未)년에, 인(寅)·오(午)·술(戌)년에 낳은 사람은 신(申)·유(酉)·술(戌)년에 삼재가 든다고 한다. 따라서 사람은 9년마다 주기적으로 삼재년을 당하게 되는데, 삼재운(三災運)이 든 첫 해를 '들삼재', 둘째 해를 '누울 삼재', 셋째 해를 '날 삼재'라 한다. 삼재를 면하기 위하여 설날 머리가 셋 달린 매를 그려서 방문 위에 붙여 놓는데 이를 삼재부적이라 한다. 삼재가 드는 해는 남에게 해를 끼쳐도 안되고 모든 일을 꺼리고 삼가는 일이 많다.
 

⑩ 야광귀(夜光鬼)

설날 밤에 하늘에 있는 '야광귀'라는 귀신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인가에 들어가 사람들의 신을 신어 보아서 발에 맞는 것이 있으면 신을 신고 간다고 한다. 그러면 신을 도둑맞은 사람은 그 해 1년 동안 운수가 나쁘다고 한다. 그래서 설날 밤이면 어른 아이 모두가 신을 방에 들여 놓거나 다락에 넣어두고 잔다.

설날 밤에는 대개 일찍 잠에 들게 되는데, 섣달 그믐날 밤에 눈썹이 셀까바 잠을 못잤던 아이들도 일찍 잠을 청하고, 설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세배하러 하루종일 돌아댜녔으므로 몸이 피로해서 일찍 불을 끄고 잠을 자기 마련인데, 이때에 야광귀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야광귀를 막기 위하여 밤이 되면 일찍 대문을 걸어 잠그며 때로는 금줄을 쳐서 붸고, 딱총을 놓아 붸기도 한다. 또한 야광귀를 붸는 방법으로 체를 걸어두기도 한다. 야광귀는 하늘에서 내려오므로 밤이되어 대문에 체를 걸거나 장간(長竿)을 세우고 그 위에 체를 걸어둔다. 그러면 하늘에서 야광귀가 내려오다가 체를 발견하고 체의 눈이 많으므로 몇 개나 되는지 세어보다가 너무 눈이 촘촘히 박혀 있으므로 세다가는 혼동하여 다시 세고 다시 세다가는 날이 밝아 닭 우는 소리가 들리면 인가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하늘로 되올라간다고 한다.

≪동국세시기≫에는 '야광(夜光)'이라 하였으나 ≪경도잡지 京都雜志≫에는 불교의 법화경(法華經0에 나오는 25보살의 한 분인 약왕보살(藥王菩薩)을 말하여 약왕의 음이 와전된 것으로 보았다. 이 약왕보살은 아이들이 두려워할 만큼 형상이 추하므로 어린이들을 일찍 재우고자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라 하였다.

야광귀를 붸기 위한 방법으로 체를 걸어둔 것은 체〔篩〕의 눈이 많다는 다목관념(多目觀念)에서 주술적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복조리 팔기의 경우도 그렇고 야뇨증(夜尿症)의 아이에게 '키'를 씌어 남의 집을 방문하게 하는 것도 동궤의 민속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요즈음에는 야광귀 이야기를 거의 들을 수 없음이 유감이나 남의 신발을 훔쳐가는 귀신이 있다고 믿는 여러가지로 상징적이다. 즉, 정초부터 물건을 잃어버려서는 불길하다는 뜻의 경계와 앞의 ≪경도잡지≫의 이야기처럼 수세(守歲)하느라고 피곤한 몸과 세배하러 다니느라 분주했던 설날밤에 일찍 잠자리에 들기 위해 설정된 해학적인 관념이 들어간 것으로 파악되는 점 등이다.
 

⑪ 청참(聽讖)

설날 새벽에 거리에 나가서 일정한 방향없이 돌아다니다가 날짐승 소리이건 길짐승 소리이건간에 처음 듣는 소리로써 1년의 운세를 점치는데, 이것을 '청참'이라 한다. 즉, 까치소리를 들으면 풍년이 들고 행운이 오며, 참새소리를 들으면 흉년이 들고 불행이 올 예조(豫兆)라고 한다. 이와 같은 점복속은 봄철에 처음 보는 나비의 색깔에 따라서 노랑나비는 길조이고 흰나비는 부모상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동국세시기≫에는 이러한 풍속은 연경속(燕京俗)과 같아고 했는데, 돈숭(敦崇)의 ≪연경세시기 燕京歲時記≫에는 '영희신(迎喜神)'이라 하였다.
 

⑫ 원일소발(元日燒髮)

우리말로는 '머리카락 사름'이라고 한다. 요즈음은 남녀가 머리털을 이발관이나 미장원을 이용하여 깎거나 손질하는데, 이러한 편의시설이 없던 시절에는 남녀가 1년 동안 빗질할 때 빠진 머리카락을 그때그때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설날 저녁 황혼을 기다려 문 밖에서 태움으로써 나쁜 병을 물리친다고 한다.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던 시절에는 신체발부(身體髮膚)가 모두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2) 정초 12지일(正初十二支日)

설날에서부터 열이튿날까지의 12일 동안을 일진(日辰)에 의하여 '털 있는날(有毛日)'과 '털 없는 날'로 나눈다. 즉, 12지지(地支)에 따라 일진을 정하니 자일(子日)은 쥐, 축일(丑日)은 소, 인일(寅日)을 호랑이, 묘일(卯日)은 토끼, 진일(辰日)은 용, 사일(巳日)은 뱀, 오일(午日)은 말, 미일(未日)은 염소, 신일(申日)은 원숭이, 유일(酉日)은 닭, 술일(戌日)은 개, 해일(亥日)은 돼지날이라 부른다.

이 열두 동물 중 털 있는 동물인 쥐て소て호랑이て토끼て말て 염소て원숭이て닭て개て돼지날은 유모일이며, 용て뱀날은 무모일이라 하는데 설날이 털 있는 날일 경우는 오곡이 잘 익어 풍년이 든다고 전하며 털 없는 날일 경우는 흉년이 든다고 한다. 대개 상점은 털 있는 날에 문을 여는데, 특히 인일(寅日)이 좋다고 한다. 털 있는 날을 택하는 이유는 털과 같이 번창함을 뜻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7]상자일(上子日)

정월 들어 첫번째 자일(子日)을 '상자일', 곧 '쥐날'이라 한다. 이날 농촌에서는 쥐를 없애기 위하여 들로 나가 논과 밭두렁을 태우는데, 이를 '쥐불놀이〔鼠火戱〕'라 한다. 쥐는 수확한 곡식을 축낼 뿐 아니라 논밭을 파헤치므로 농가에서는 쥐를 없애려든다. 그래서 쥐날 논두렁의 풀을 태우면 쥐가 없어지고 해충을 제거하며, 새싹의 발아도 촉진되어 그해 농사가 잘 된다고 하여 쥐불놀이를 한다. 요즈음에는 밤에 횃불놀이를 겸해서 쥐불놀이를 하는데 분자들은 쥐날 밤 자시(子時)쯤에 방아를 찧으며 쥐가 없어진다고 하여 빈방아를 찧는다.

그런데, 정월 열나흗날이나 대보름날 밤에는 '달집'을 만들고 거기에 불을 놓기도 하고, 횃불을 밝히고 달맞이를 하다가 논둑, 밭둑에 불을 놓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차차 쥐날 놓던 쥐불이 없어지고 정월 열나흗날이나 대보름날 달맞이불과 합쳐서 이것을 '쥐불'이라고 하게 되었다. 이날 아이들이 횃불을 만들어 둑마다 다니면서 불을 놓으면 해질 무렵의 쥐불은 마치 들에 꽃이 핀 것 같은 장관을 이룬다.

상자일에는 옛날부터 일도 하지 않고 백사(百事)를 금하고 놀았다고 하는데, 쥐가 곡식을 축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쥐는 곡식을 갉아먹는 관계로 상자일 밤에는 불을 밝히지 않으며 길쌈을 하거나 의복을 짓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곡식을 볶아서 주머니에 넣으면 재수가 좋다고 전한다.

[7]상축일(上丑日)

정월 들어 첫 축일(丑日)을 '상축일', 곧 '소날', 또는 '소 돌보는 날', '소달깃날'이라고도 한다. 이날은 우마(牛馬)에 일을 시키지 않고 쉬게 하며 나무와 콩을 삶아 먹이고 살찌게 한다. 소는 농촌에서 과거에 가장 중요한 일꾼이었다. 이 소를 겨울 한가한 때에 잘 먹여 그 다음해에 소가 힘이 세어져서 일을 잘한다. 그러므로 이날은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쇠죽에 콩이나 보리를 많이 넣어 소를 잘 먹인다.

소날의 금기로 이날은 도마질을 하지 않으며, 그리고 쇠붙이 연장을 다루지 않는다. 연장을 만지면 농경 때에 쟁기의 보습이 부러지고 방아를 찧으면 소가 일할 때에 기침을 하며, 식량을 집 밖으로 내보내면 소가 죽거나 힘이 빠진다고 해서 금기로 한다. 그리고 이날은 곡식을 집 밖으로 퍼내지 않는다. 곡식을 퍼내면 소에게 재앙이 온다고 하여 꺼리게 된 것이다.

이날은 '축불대관(丑不帶冠)'이라 하여 관을 쓰는 일을 하지 않으며, 또한 혼인식도 하지 않는다. 이날 혼인을 하면 흉사(凶事)가 있거나 그 혼인이 불행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날 먼 곳을 출입하는 것은 탈이 없다고 한다.

[7]상인일(上寅日)

정월 들어 첫 인일(寅日)을 '상인일', 곧 '호랑이날', 또는 '범날'이라고 한다. 이날은 남과 서로 왕래를 삼가하며 특히 여자는 외출을 하지 않는다. 만일 이날에 남의 집에 가서 대소변을 보게 되면 그집의 식구 중에 호환(虎患)을 만나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이날은 집에서 근신하고 짐승에 대한 악담(惡談)도 삼간다. '인불제사(寅不祭祀)'라 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고 귀신에게 빌지도 않는다. 중국의 '천금방(千金方)'에 정월 인일에 백발을 태우면 길(吉)하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다.

[7]상묘일(上卯日)

정월 들어 첫 묘일(卯日)을 '상묘일', 곧 '토끼날', '톳날'이라고 한다. 토끼날에는 남자가 먼저 일어나서 대문을 열어야 한다. 가장(家長)이 열면 더욱 좋으나 가장이 없을 때에는 식구 중에서 누구든지 남자가 남자가 먼저 문을 열기로 되어 있다. 그렇게 하면 1년 동안 가운이 융성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만일 여자가 먼저 대문을 열고 밖에 나가면 불길하다고 한다. 이것을 철저히 지키는 집안에서는 밥을 짓는 일도 남자가 대문을 열고 밖에 나간 다음에야 방문을 열고 나와서 한다. 그리고 이날은 남의 집 머슴이나 식모들을 문 안에 들이지 않으며, 나무 그릇 따위도 집안에 들이는 것을 꺼린다.

토끼날은 장수를 비는 날이기도 하다. 이날은 남녀 할 것 없이 명사(命絲)라 해서 명주실을 청색으로 물들여 팔에 감거나 옷고름에 매달고 또는 문돌쩌귀에 걸어 두는데, 그렇게 하면 재앙을 물리치고 명이 길다고 전한다. 또 상묘일에 실을 잣거나 옷을 지으면 장수한다고 하여 부녀자들은 실을 잣거나 옷을 지으며, 베틀이 있으면 한 번씩 올라가서 베를 짜본다. 그래야만 장수한다고 한다. '묘불천정(卯不穿井)'이라 하여 이날은 우물을 파지 않는다.

[7]상진일(上辰日)

정월 첫 진일(辰日)을 '상진일', 곧 '용날'이라고 한다. 용날 이른 새벽에 주부들이 물동이를 이고 샘으로 물을 길러 간다. 속설(俗說)에 하늘에 사는 용이 이날 새벽 지상에 내려와 우물 속에 알을 낳는다고 한다. 그래서 주부들은 남보다 일찍 일어나 우물 속에 있는 용의 알을 떠가려 큁나다. 이 물을 길어다가 밥을 지으면 당년 운이 좋아 풍년이 든다고 한다. 용의 알을 먼저 떠간 사람은 그 표시로서 지푸라기를 우물 속에 띄워둔다. 그러면 뒤에 온 주부는 용의 알이 남아 있을 딴 우물을 다시 찾아가기도 한다. 이러한 풍습을 일컬어 '용알뜨기'라고 한다. 또 이날에 머리를 감을면 모발이 용과 같이 길어진다고 해서 부녀자들은 세발(洗髮)을 하는 일이 많다. 그리고 이날은 '진불곡읍(辰不哭泣)'이라 하여 울지 않는다.

[7]상사일(上巳日)

정월 들어 첫 사일(巳日)을 '상자일', 곧 '뱀날'이라 부른다. 뱀날에는 남녀 모두 머리를 빗거나 깎지 않는다. 만일에 머리를 빗거나 깎으면 그해에 뱀이 집안에 들어와 화를 입게 된다고 한다. 뱀은 생김새도 징그럽거니와 집념이 강한 것이어서 누구나 싫어한다.

상사일에는 빨래를 하지 않고 바느질도 하지 않으며 땔나무를 옮기거나 집안에 들여 놓지 않는데 이는 뱀이 들어오는 것이 두려워서 그리하였던 것이다.

또한 뱀구멍에 연기를 불어 넣는 '뱀지지기'를 하는데 긴 나무 끝에 머리카락이나 솜뭉치를 달아매고 불을 붙여 뱀구멍에 대면 그 연기가 구멍으로 들어가서 뱀이 나오는 것을 예방한다고 한다. 이날은 '사복원행(巳不遠行)'이라 하여 먼길을 떠나지 않는다.

[7]상오일(上午日)

정월 들어 첫 오일(午日)을 '상오일', 곧 '말날'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말을 숭상하였으므로 상오일에는 말에게 제사를 지내고 찬을 주어 위로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상오일의 풍속이 희박해지고 10월의 오일(午日)에 집중되어 있다.

병오일(丙午日)이면 병(病)과 통한다고 해서 꺼리고, 무오일(戊午日)이면 무(茂)와 같으므로 길일로 알고 같은 발음의 무우로 시루떡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말날의 풍속으로는 고사를 지내거나 장을 담그고 김장을 하기도 한다. 또 오년생(午年生)은 양기(陽氣)가 강하기 때문에 남자는 좋으나 여자는 팔자가 세다고 해서 혼처를 고르기 어려웠다. 특히, 병오생은 백마(白馬)라 해서 강양(强陽)이라 한다. 이날은 '오불고개(午不苦盖)'라 하여 지붕을 이지 않는다.

[7]상미일(上未日)

정월 들어 첫 미일(未日)을 '상미일', 곧 '염소날'이라 한다. 상미일은 거의 무관심하게 보낸다. 그러나 '미불복약(未不服藥)'이라 하여 이날은 약을 먹어도 효력이 없다 하여 먹지 않는다. 이 외는 좋은 날이라 하여 무슨 일을 해도 괜찮다고 한다.

[7]상신일(上申日)

정월 들어 첫 신일(申日)을 '상신일' 곧 '원숭이날'이라고 한다. 이날은 일손을 쉬고 놀며, 특히 칼질을 하면 손을 벤다고 하여 삼간다. 여자보다 남자가 먼저 일어나서 문 밖에 나가고 비를 들고 부엌의 네 귀를 쓴 후 다시 마당의 네 귀를 쓴다. 상신일에는 나무를 베지 않으며 이날 벤 나무로 집을 지으면 좀이 먹어 곧 쓸모가 없게 된다고도 한다. 상신일은 '신불안상(申不安牀)'이라 한다.

[7]상유일(上酉日)

정월 들어 첫 유일(酉日)을 '상유일', 곧 '닭날'이라 한다. 상유일에는 부녀자의 침선(針線)을 금한다. 만일 이날 바느질을 하거나 길쌈 같은 일을 하면 손이 닭의 발처럼 흉한 모양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부녀자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쉰다. 이날은 '유불회객(酉不會客)'이라 하여 모임을 갖지 않으며, 닭을 잡아 먹지도 않는다.

[7]상술일(上戌日)

정월 들어 첫 술일(戌日)을 '상술일', 곧 '개날'이라고 한다. 이날 일을 하면 개가 텃밭에 가서 해를 준다고 하여 일손을 쉬고 논다. 상술일에는 풀을 쑤지 않는데, 그 이유는 풀을 쑤면 개가 먹은 것을 토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 날은 '술불포구(戌不咆拘)'라 하여 보신탕을 먹지 않는다.

[7]상해일(上亥日)

정월 들어 첫 해일(亥日)을 '상해일', 곧 '돼지날'이라 한다. 돼지날에는 얼굴이 검거나 피부색이 검은 사람은 왕겨나 콩깍지로 문지르면 살결이 희고 고와진다고 한다. 돼지는 살결이 검고 거친데서 그 반대의 뜻으로 이러한 민속이 생긴 것이다.

상해일에는 바느질을 하지 않고 머리도 빗지 않는다. 바느질을 하면 손가락이 아리고, 머리를 빗으면 풍증(風症)이 생긴다 하여 금하기 때문이다.

≪동국세시기≫에는 궁중속(宮中俗)을 적었는데,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나이가 젊고 지위가 얕은 환관(宦官) 수백명이 횃불을 땅 위로 이리저리 내저으면서 '돼지 주둥이 지진다.'고 하며 돌아다녔다. 또 곡식의 씨를 태워 주머니에 넣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 모두가 풍년을 비는 뜻을 나타낸 것이라고 적었다. 이날은 '해불가취(亥不嫁娶)'라 하여 혼인을 하지 않는 풍습이 전한다.
 

(3) 인일(人日)

정초의 첫 7일을 '인일(人日)' 또는 '사람날'이라고 한다. 보통 정초에는 남의 집에 유숙하지 않지만, 특히 7일의 사람날에는 외숙(外宿)을 하지 않는다. 이날 손님이 와서 묵고 가면 그해는 연중 불운(不運)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부득이 객(客)이 왕서 묵게 될 경우에는 주인과 손님은 머리를 반대로 두고 거꾸로 자야 한다. 그래야만 액운(厄運)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이날 동인승(銅人勝)을 각신(閣臣)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럿은 작고 둥근 거울인데 자루가 달리고 뒤에 신선을 새겼다."라고 하였다. 또 ≪열양세시기≫의 기록에 보면 공조에서는 화승(花勝)을 올리고, 또 구리로 둥근 원모양으로 만들어 그 위에 사람의 형상을 새긴 이른바 동인승(銅人勝)을 궁전에 하나씩 진상한다고 하였다. 또한 정월 인일て삼짇날て칠석て중양에는 왕이 친히 과제(科題)를 내어 성균관의 상재생(上齋生), 즉 재학생들이 채점관이 되어 임금 앞에서 채점을 한다. 그리하여 1등으로 뽑힌 자는 왕왕 사제(賜第)도 내리고 기타는 차례대로 사을 받는다. 이것을 절제(節製) 또는 절일제(節日製)라 한다고 하였다.

7일은 사람날, 8일은 곡식날이라 하여 '칠인팔곡(七人八穀)'이란 말도 있지만, 사람날을 굳이 정한 것은 사람을 중히 여기자는 관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인일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인구평안(人口平安)과 태평(太平)을 기원하고 장수와 피병(避病)을 빈다는 점은 한국과 중국이 같음을 볼 수 있다.
 

(4) 패일(敗日)

매월 초닷새날을 '패일(敗日)'이라고 한다. 패일은 액(厄)이 있고 불길한 날이어서 출행하는 것을 삼간다. 정월의 5일て14일て24일은 삼패일이라고 해서 매사에 기신(忌愼)하였으며, 특히 여인들은 바느질을 삼갔다.
 

(5) 곡일(穀日)

정월 8일을 '곡일(穀日)', 곧 곡식날이라 부른다. 이날에는 봄에 곡식 심을 준비를 하는데 그와 같이 하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6) 12일

12일 저녁에 달이 뜨기 시작할 무렵이면 농가의 어린아이들이 모여 솔방울을 수백개 주워다가 계란이라고 부른다. 아이들은 다시 부자집에 가서 큼직한 쇠똥을 주워다가 암탉이라 해서 솔방울을 품게 하여 마치 암탉이 알을 품은 것처럼 만든다. 다음 13일 새벽에 쇠똥 속에서 솔방울을 집어 내면서 큰소리로 계란 수천개라고 외친다. 이렇게 하면 양계가 잘 되어 연중 계란을 많이 낳을 수 있다고 전한다. 양계가 잘 되기를 ꑁ라는 유감주술적(類感呪術的) 행위이다. 그러나 요즈음 서울이나 경기 지방에서는 이러한 놀이를 하는 예가 없어졌다.
 

(7) 입춘일(立春日)

① 춘축(春祝)て춘첩자(春帖子)

입춘일은 천세력(千歲歷)에 정해져 있는데 이날에는 도시나 시골 할 것 없이 각 가정에서는 대문て기둥이나 대들보て천정 등에 좋은 뜻의 글귀를 써서 붙이며, 이를 춘축 또는 입춘방이라 한다. 글씨를 쓸 줄 아는 사람은 손수 춘축을 쓰거니와 글씨를 쓸 줄 모르는 사람은 남에게 부탁해서 써붙이기도 하는데, 상중(喪中)에는 붙이지 않는다. 입춘축은 대개 정해져 있으나 가장 널리 씌어지는 입춘축은 다음과 같다.
 

立春大吉, 建陽多慶, 國泰民安, 家給人足, 掃地黃金出, 開門萬福來, 父母千年壽, 春滿乾坤福萬家, 門迎春夏秋冬福, 戶納東西南北財
 

옛날 대궐에서는 내전의 기둥과 난간에다 원단(元旦)에 문신들이 지은 연상시(延祥詩) 중에서 좋은 것을 뽑아서 써붙였는데, 이것을 춘첩자라고 불렀다. 또한 관상감에서는 주사(朱砂)로 벽사문(抗邪文)을 써서 대궐 안으로 올렸다.

입춘일에 오곡의 씨앗을 솥에 넣고 볶아서 맨 먼저 솥 밖으로 튀어 나오는 곡식이 당년에 풍작이 된다고 한다.
 

② 맥근점(麥根占)

입춘일에 농가에서는 보리의 뿌리를 파보아 1년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데 이를 '맥근점' 또는 '보리뿌리점'이라 한다. 늦가을에 심은 보리가 입춘일쯤이면 뿌리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뿌리가 세 가닥이면 풍년이 들고, 두 가닥이면 평년작이 되고, 한 가닥이면 흉년이 들 징조라고 한다. 뿌리가 시들었을 때에도 흉년이다. 뿌리의 성장이 좋고 나쁨이 보리농사의 풍흉에 영향이 있을 것은 사실이니 농부들의 이 맥근점이 전혀 허황한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겠다.
 

(8) 정월 14일

① 안택(安宅)

각 가정에서는 안택을 하느데 이것은 집에 탈이 없게 하기 위하여 제사하느 개인제(個人祭)의 일종이다. 안택은 무당이 안택경(安宅經)을 읽으며 터주신을 비롯하여 조상신て조왕신て동신 등을 제사하는 것이다. 안택은 가을 추수 후와 정초에 하며 재앙て질병て화액을 붸고 가내의 평안을 기원하는데, 차렸던 제물은 이웃끼리 나누어 먹는다. 안택은 새해를 맞이하여 제화초복(除禍招福)을 목적으로 하는 만큼 부정을 피하고 정성껏 거행하며 무당이 없을 때에는 주부가 지내기도 한다. 안택을 고사라고도 한다. 농가에서뿐만 아니라 사업을 하는 사람도 사업의 번창을 위해서 연초와 가을에 지내는데 연초는 기원제, 가을에는 감사제의 성격이 있다.
 

② 낟가릿대

농가에서는 정월 14일이 되면 소나무를 베어다 마당 한복판에 세우고, 그 위에 짚을 묶어 쌓아서 깃대 모양으로 만든 후 벼て조て피て기장 등의 이삭을 꽂아두고 장간(長竿) 위에 목화를 늘어 놓는데 이를 '낟가릿대' 또는 '볏가릿대(禾竿)'라고 부른다.

이렇게 쌓은 낟가릿대는 두었다가 2월 1일 아침 일찍이 철거하는데 풍년이 들라는 뜻이다. 서울 근교의 농촌에서는 아지고 낟가릿대를 설치하기도 하지만 차츰 사라져 이제는 거의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③ 모닥불

정월 14일 저녁이나 15일 아침에 마당을 쓸어 한곳에 모으고 또 쓰레기를 얹고 그 속에 아주까릿대て깻대て청죽(靑竹)이나 헌 비 등을 함께 태운다. 그러면 연기가 많이 나고, 탈 때 요란한 소리를 내서 마치 폭죽(爆竹)을 터뜨리는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하는 것을 모닥불이라고 하는데, 요란한 소리가 연속해서 크게 날수록 그해의 콩농사나 보리농사가 잘 된다고 한다.

 

④ 복토(福土) 훔치기

14일날 저녁 가난한 사람이 부잣집에 남몰래 들어가 부엌이나 마당의 튊을 훔쳐다라 자기네 부뚜막에 바르면 부잣집 복이 모두 전해 와서 잘 살게 된다고 한다. 이것을 '복토 훔치기' 또는 '복흙 훔치기'라고 한다. 그래서 이날 밤에 부잣집에서는 튊을 도둑맞지 않으려고 불을 밝혀두고 머슴으로 하여금 지키게 한다.

흙에는 터주신이 있어서 그 덕으로 많은 재록(財祿)을 누리고 있으니 흙을 옮겨옴으로써 재복(財福)도 따라 옮겨오는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⑤ 나무조롱(木葫蘆)

나무나 또는 박으로 조롱을 세개 만들어 청て홍て황색으로 각각 칠한 다음 어린아이들이 차고 다니는 것으로서 재화와 질병을 붸는 예방이 된다고 한다. 겨울 동안 차고 다니던 이 조롱을 14일 밤에 떼어서 돈 한푼을 매어 남몰래 길바닥에 버리면 그해 1년 동안의 액(厄)을 막는다고 한다.

조롱의 패용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민속적으로 귀신을 뷘는 주술적 효과를 겆고 있다. 청て홍색은 양색(陽色)이란 데서 채택된 것이며 황색도 중앙색인 까닭에 음귀(陰鬼)을 퇴방(退防)하는 데 필요했던 것이다.
 

⑥ 금식수(禁食水)

14일은 '누더름날'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늦여름이라는 뜻인데 13일은 춘절(春節), 14일은 하절(夏節), 15일은 추절(秋節), 16일은 동절(冬節)로 친다. 그래서 14일은 바로 여름의 전조(前兆)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4일에는 많은 음식을 마련하고 이웃사람들을 청하여 권하며 다른 성(性)의 세 집밥을 먹어야 좋다는 날이다. 밥만은 많이 먹고 남에게도 권하지만 식수만은 주지 않는다. 이날 식수를 남에게 주면 김매는 날에 폭우가 쏟아져 논과 밭두렁이 무너진다고 해서 농가에서는 남에게 주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래서 14일에는 남의 집에 가서 물을 마시려고 하지도 않거니와 달라고 해도 좀처럼 얻어 먹지 못한다. 요즘에는 이런 풍속이 사라져 가고 있으나 농가에세는 농사와 기후가 긴밀하므로 이와 같은 금기도 나왔다고 하겠다.

또, 이날은 김치를먹지 않으며, 특히 동치미 국물을 먹지 않는 곳도 있다. 상원날에는 해뜨기 전에 우물물을 긷지 않고 저녁이 되어야 물을 긷는다. 그래서 14일 저녁에 미리 다음날 쓸 물을 길어 둔다. 만일 상원날에 물을 길으면 여름에 홍수가 나서 수해를 입고 농작물이 피해를 입는다고 한다.

요즈음의 서울て경기 풍속에 이와같이 금식수(禁食水)는 경우는 없으니 집집마다 수돗물이 나오는 편리함에서 그리된 것이다. 그렇지만 물을 아껴쓰는 것이 재산을 모은다는 관념은 계속 남아 있다.
 

⑦ 제웅치기

14일 밤에 직성(直星)이 든 사람이 있는 가정에서는 제웅을 만들어 거리나 개천에 버린다. 직성이란 액년이 든 것을 말하는데, 남자에게는 11て20て29て38て47て56세이고 여자는 10て19て28て37て46て55세에 해당한다. 직성이 든 해는 액운이 있어 만사가 여의치않을 뿐만 아니라 벼이 들거나 큰 화를 입는 등 불행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직성이 든 사람은 무슨 술법을 써서라도 면해야만 심신이 평안하니 그 방범의 하나로 제웅이란 것이 있다.

제웅은 짚으로 마치 사람 모양의 인형을 만들어 짚인형의 배나 허리 부분의 속을 헤집고 돈이나 쌀을 넣어서 동여매고 액년(厄年)이 든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적어 넣어서 버린다. 그러면 지나던 사람 중에서 이 짚인혀을 줍는 삶이 있으면 그가 액을 가져가게 된다고 한다. 문헌에 의하면 '타추희(打芻戱)'라 하는 '제웅치기'가 있다. 아이들이 14일 밤에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제웅을 달라고 하여 이를 얻으면 머리 부분을 파헤쳐 돈만 꺼내고 길에다 내동댕이치는 것이다.
 

⑧ 적선(積善)

14일 밤에 당년의 신수가 나쁜 사람은 적선을 해야만 액을 면할 수 있다고 하여 개천에 다리를 가설하거나 유두돌을 놓는 일이 있다. 즉, 액을 면하는 방법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착한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해서 사람의 왕래가 많으나 다리가 없어 불편한 곳을 찾아 여기에 남몰래 다리를 놓는 것이다.

다리를 놓을 형편이 못되면 가마니나 섬て오쟁이에 돌을 가득 담아 띄엄띄엄 놓아 사람들이 밟고 가기에 좋게 한다. 이렇게 하면 다리를 놓은 것과 마찬가지이니 당년의 액을 면하게 되는 것이다. 유두를 놓을 때에는 섬 속에 돈을 넣어두는 일도 있다. 그러면 지나가는 행인이나 아이들이 주워가기 마련이니 그것도 적선의 하나로 여겨왔다. 이렇게 하느 것을 '월강공덕(越江功德)'이라 한다.
 

⑨ 모기퇴송(退送)

정초에느 집안에 있느 것이면 무엇이든지 문 밖으로 내가는 것을 금기(禁忌)로 한다. 바은 물론 마당을 쓴 쓰레기도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14일 밤에 불로 태우는데 이렇게 하면 여름에 모기가 없어진다고 해서 '모깃불'이라고 한다. 이때에 청죽(靑竹)을 불 속에 넣어두면 마디가 탈 때에 '탕탕'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는데 이 소리에 모기가 달아나고, 또 집안에 있는 잡귀들도 달아나게 된다고 한다.

더위를 파는 것처럼 모기를 팔기도 한다. 동구에 나가 이웃마을 동장이나 적당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우리 마을 모기 다 가져가게."라고 외치고, 다시 "자네 마을 모기 다 받았네." 하고 마치 매매하는 것처럼 자문자답을 하면 그 마을에는 모기가 없다고 한다. 요즘에는 동네 구석구석에 소독차가 다니면서 모기성충을 구제하느라고 약을 뿌리기 때문에 이러한 풍속은 사라지게 되었다.
 

(9) 대보름(정월 15일)

정월 15일을 대보름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보름명절로 한가윗날과 더불어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보름'은 '밝음'에서 '衁'이 탈락되고 'て'음이 없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착되었다고 보는데, 우리 민속에서 보름이 강조되는 것은 '밝음'사사에서 연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은 대보름을 '상원(上元)'이라 하는데 도교의 영향으로 정월 15일을 상원, 7월 15일을 중원(中元). 10월 15일을 하원(下元)으로 설정하고 있다. 대보름날에 각종 유희나 개인적인 기복행사(祈福行事), 집단적인 공동의례(共同儀禮), 직て간접적인 점세(占歲)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① 달맞이

대보름날 저녁에 달이 동쪽에서 솟아 오를 때면 사람들은 다맞이를 위하여 뒷동산에 올라간다. 서울에는 남산(南山)에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서 달맞이를 하고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야산에 오른다. 한겨울이라 춥긴 하지만 횃불을 붙여 가지고 될 수 있는 대로 먼저 달을 보기 위해서 산길을 따라 뒷동산에 오른다. 동쪽 하늘이 ꖪ어지고 대보름달이 솟을 때에 횃불을 땅에 꽂고 두손을 모아 합장하고 소원을 빈다. 농부는 풍년이 들기를 빌고, 총각은 좋은 규수르 만나기를 빌고, 처녀는 시집가기를 기원한다. 대보름달은 될 수 있는 대로 남보다 먼저 보는 것이 길(吉)하다고 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산에 오른다. <농가월령가>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상원날 달을 보아 水旱을 안다 하니

老農의 징험이라 대강을 짐작노니
 

이와같이 달맞이를 하며 달빛으로 점을 치기도 한다. 즉, 달빛이 희면 우량이 많고, 붉으면 한발이 있으며, 달빛이 진하면 풍년이 들고, 달빛이 흐리면 흉년이 든다고 전한다. 또 달이 남으로 치우치면 해변에 풍년이 들 징조이고, 북쪽으로 치우치면 산촌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② 부럼

대보름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밤て잣て호도て잣て은행 등을 깨무는데 이를 '부럼'이라고 한다. 부럼 깨물기는 한자로 '작절(嚼癤)' 또는 '고치지방(固齒之方)'이라고도 하는데, 이들 열매인 견과류를 깨문다 하여 '교창과(咬瘡果)'라 한다. 대개 자기 나이 수대로 깨물기도 하나 노인드은 이가 단단하지 못하여 몇 개만 깨문다. 여러번 깨물지 말고 단번에 깨무는 것이 좋다고 하며, 일단 깨문 것은 껍질을 벗겨서 먹거나 첫번째 것은 마당에 버리기도 한다. 깨물 때에 "1년 동안 무사태평하고 만사가 뜻대로 되고 부스럼이 나지 말라."고 기원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1년 동안 부스럼이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가 단단해진다고 한다.
 

③ 귀밝이술(耳明酒)

귀밝이술은 한자어로 '이명주(耳明酒)'라고 하는데 세시기(歲時記)에 따라서 '명이주(明耳酒)', '유롱주(涨聾酒))', '이총주(耳聰酒)' 등으로도 불린다. 청주 한 잔을 데우지 않고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는 것이다. 귀밝이술을 마시는 풍속은 전국적인데, 귀가 잘 들릴 뿐만 아니라 1년 도안 좋은 소리를 듣는다고도 한다. 귀밝이술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마시는데, 아이들의 경우는 어른이 부르면 귀가 밝아져 잘 듣고 대답하라는 뜻이라 한다. ≪한양세시기 漢陽歲時記≫에 나오는 귀밝이술에 관한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찬술 기운 스며들어

귓부리에 통하니

묘시에 마심이

제일좋다 들었노라

나에게 술권하려

애쓰지 말라

내가볼래 거짓으로

귀먹은양 했노라
 

④ 더위 팔기(賣暑)

대보름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더위를 파는데, 이를 한자어로 '매서(賣暑)'라고 한다. 될 수 있으면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서 이웃친구들을 찾아가 이름을 부른다. 이때에 대답을 하면 "내 더위 사가라"고 한다. 이렇게 하면 더위를 판 것이 되고, 판 사람은 1년 동안 더위를 먹지 않으나 그 대신에 멋모르고 대답을 했다가 산 사람은 그 사람의 더위까지 두 ꆭ의 더위를 먹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보름날 아침에는 친구가 이름을 불러도 냉큼 대답을 하지 않고 때로는 미리 알고 오히려 역습하여 "내 더위 네 더위 먼저 더위", 또는 "내 더위 사가라"고 응수한다. 그러면 더위를 팔려고 했던 사람이 오히려 더위를 먹게 도니다고 한다.

더위는 한번 팔면 되는 것이지만 익살맞은 장난꾸러기들은 여러 사람에게 더위를 팔수록 좋다고 해서 이집저집 찾아다니며 아이들을 골려주는 수도 있다. 대보름날 여름철의 더위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사람뿐 아니라 심지어 가축들도 더위를 막는다고 해서 예바으로 소나 돼지의 목에 왼새끼를 걸어주거나 혹은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의 가지를 꺾어 둥글게 해서 목에 걸기도 한다.

≪동국세시기≫에는 더위 팔기를 매서(賣暑)라 했는데, 상대방이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것을 '학(謔)'이라 한다고 적었다.
 

⑤ 개보름 쇠기

개는 아침 저녁에만 먹이를 주고 낮에는 주지 않는다. 그러나 대보름날에는 온종일 먹이를 주지 않고 굶긴遁다. 대보름날 개에게 밥을 주면 개가 마를 뿐 아니라 파리가 꼬여 더러워진다고 믿기 때문에 굶긴다고 한다. 속담에 "개 보름 쇠듯한다."는 말은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예방의학적 벽충행사(抗蟲行事)였던 것이다.
 

⑥ 약밥

대보름날은 약밥을 먹어야 좋다고 한다. 이날 약밥을 먹는 유래는 신라 소지왕(炤智王) 때의 고사에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소지왕이 즉위한 지 10년이 되는 해에 하루는 천천사(天泉寺)에 행행(行幸)했는데 쥐와 까마귀가 와서 울다가 쥐가 사람의 말로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라고 했다. 왕은 기사로 하여금 까마귀를 따르게 했는데 남촌에 이르렀을 때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으므로 그것을 보다가 까마귀를 잃었다. 기사는 까마귀를 찾아 헤매다가 연못에서 나온 노인을 만나 봉서(奉書)를 받아본즉, '開見二人死 不開見一人死(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 적혀 있엇다.

기사는 이 글을 왕에게 올리니 왕이 개봉하지 않으려는 것을 본 일관(日官)이 '1인은 왕이오 2인은 서민'이라 하므로 이 말을 듣고 개봉한즉 "금갑(琴匣)을 쏘아라"라고 적혀 있었다. 왕은 궁중에 돌아오는 즉시 금갑을 활로 쏘니 내전 분수승(焚修僧)과 궁주(宮主)가 몰래 내통하여 왕을 죽이고자 모의하고 있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이날을 '오기일(烏忌日)'이라 부르고, 까마귀에게 약밥으로 제사지내는 풍속이 생겨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것이라고 한다.

약밥은 14일 밥에 만들거나 15일에 만들기도 하거니와 찹살, 대추, 밤, 꿀, 잣 등을 섞어 쪄서 만드는데, 검붉은 빛이 나고 단밧이 있으며 오래 두고 먹어도 좋다. 약밥은 여러가지 재료를 섞어서 만든 맛있는 음식이므롸 잔칫상에는 으레 오르고 있다.

≪열양세시기≫에서는 약밥과 까마귀고사(故事)를 황당무게한 것이라 하고 중국의 유화명주(油篐明珠)라는 상원의 유반(油飯)이 전래한 것으로 보았다.
 

⑦ 오곡(五穀)밥て복(福)쌈

대보름날은 다섯가지 이상의 곡식을 섞어 밥을 짓는데 이를 오곡밥이라 한다. 보통 밥은 쌀만으로 짓거나 혹은 한 가지 잡곡을 섞어 짓지만, 대보름날에는 한꺼번에 다섯가지 이상의 곡식을 섞어 밥을 지어 먹어야 한다.

대보름날 밥을 김이나 취나물에 싸서 먹는데 이것을 복쌈이라 한다. 복쌈은 여러개를 만들어 그롯에 노적(露積) 쌓듯이 쌓아서 성주님께 올린 다음에 먹으면 복이 있다고 한다.

또한 이날 국수를 먹으면 수며이 길다고 해서 국수를 해먹기도 한다. 대부분의 서울て경기 사람들은 대보름날 약밥을 해서 먹고 있는데 이것은 절식(節食)으로 큰 의미가 있다.
 

⑧ 진채식(陳菜食)

대보름날에는 호박고지て무우고지て외고지て가지나물て버섯て고사리 등 여름에 말려둔 나물을 삶아 먹는데 이를 '진채식'이라 한다. 이날 채식을 하면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들 즐겨 먹는다. 요즘에도 이날 나물을 차려 약밥과 함께 먹는 가정이 많다.
 

⑨ 백가반(百家飯)

대보름날 오곡밥을 여러 집것을 먹어야 좋다고 했듯이 흔히 백집의 밥을 먹으면 더욱 좋다고 한다. 그래서 남의 집을 찾아다니며 일부러 걸식을 해서 많은 집의 밥을 먹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이와같이 하는 일이 드물고, 백집의 밥을 먹는다는 것은 여러 집과 교분을 맺고 나누는 미풍양속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⑩ 나무시집보내기(嫁樹)

과수(果樹)를 가진 집에서는 대보름날에 나무의 두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둔다. 이렇게 하면 그해는 과실 풍년이 든다고 하는데 이것을 '나무시집보내기' 또는 '가수(嫁樹)'라 한다.

농가에서는 대추나무て감나무て밤나무て배나무 등의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다수확을 기원한다. 서울 근교 경기 지방의 과수원에서는 요즘도 간혹 볼 수 있는데, 사람도 혼인을 해야 자식을 낳는 것처럼 나무도 시집을 보내야 많은 결실이 있을 것으로 믿는 유감주술적(類感呪術的) 행위인 것이다.
 

⑪ 팔랑개비와 짚신짝

대보름에 팔랑개비를 만들어 지붕이나 낟가릿대에 꽂아두고 그해의 신수를 점친다. 이 팔랑개비가 돌지 않으면 만든 사람의 1년 신수가 불길하고 잘 돌면 길하다고 전한다. 또 팔랑개비가 쉴 새 없이 돌면 솔개て까마귀て박쥐 같은 흉조조(凶兆鳥)가 날아들지 못하며 귀신도 들지 못한다고 한다. 또 밤에 변솨 출입문 위에 짚신짝을 새끼로 묶어 달아매기도 하는데 도둑을 막는 예방이라고 한다.

팔랑개비는 아이들이 요즘에도 갖고 놀고 있으나 점복(占卜)으로는 쓰이지 않고 차츰 이러한 의식도 사라져가고 있다.

 

2. 2월
 

2월은 정월에 비해 세시풍속상 한가한 달이다. 이 달은 절기 중 경칩(驚蟄)과 춘분(春分)이 들어 있는데, 경칩은 글자 뜻대로 땅속의 벌레들이 밖으로 뛰쳐 나오는 때로 동면(冬眠)하던 동물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농가월령가>에는 "반갑다 봄바람이 의구희 문을 여니 말랐던 풀뿌리는 속잎이 맹동한다. 개구리 우는 곳에 논물이 흘렀도다"라고 노래하였다.

2월의 세시풍속으로는 궁중유속(宮中遺俗)인 중화절(中和節)과 민간의 머슴날, 풍신제(風神祭) 등이 행해진다.

 

(1) 2월 1일

① 머슴날

2월 초하룻날은 '노비일(奴婢日)' 또는 '머슴날'이라고도 한다. 이날은 정월 대보름날 세웠던 볏가릿대(禾竿)의 곡식을 2월 초하룻날 내려서 휜떡을 하여 먹는데, 솔잎으로 격지를 놓아 쪄서 하므로 이것을 '솔떡(松餠)이라 한다.

떡을 만들기를, 큰 것은 주먹만하고, 작은 것은 달결만큼씩 하는데 콩 또는 찐 팥으로 속을 넣고 시루에다 솔잎을 깔아 놓아 쪄서 꺼내어 맑은 물에 씻고 참기름을 바른다. 이날 이 떡을 노비 또는 머슴들에게 나이수대로 먹이므로 이날을 머슴날 또는 노비일이라하는 것이다. 이것은 농사를 시작할 때가 되어 노비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② 풍신제(風神祭)

2월 초하룻날에는 하늘에 사는 '영등할머니'가 지상에 내려 왔다가 20일에 올라간다고 한다. 그래서 2월 1일 아침 일찍이 새바가지에 물을 담아 장독대·부엌·창고 등에 올려놓고 기원을 한다. 이때 음식도 장만하여 당년의 풍년과 가내의 태평을 빌고 식구 수대로 소지(燒紙)를 올린다.

영등할머니가 인간세상에 내려올 때는 며느리나 딸을 데리고 오는데, 딸을 데리고 오면 일기가 평탄하지만 며느리를 데리고 올 때에는 비바람이 몰아쳐 농가에 피해를 입힌다고 한다. 인간관계에 있어 친정어머니와 딸은 의합하지만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는 불화와 갈등도 더러 있는데 이를 비유해서 일기의 변화가 있는 것으로 여겼다.

일기가 불순하면 농작물이 피해를 입고, 일기가 순조로우면 풍작을 바랄 수 있으니 영등할머니는 바람과 농작의 풍흉과 관계되는 신이다. 또한 영등할머니가 지상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거센 바람이 이러 난파선이 많이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 어부들은 출어를 삼가며 일을 쉰다. 이와 같이 영등할머니는 풍신(風神)이어서 바람과 비를 몰고 오기 때문에 농촌이나 어촌에서는 풍재를 면하기 위하여 영등할머니와 그 며느리에게 고사를 지내는데 이를 '바람올린다'고 하여 바람신을 제사하는 것이다.

2월 초하루에 햇볕이 쪼이면 '불 영등드린다'고 하고, 비가 오면 '물(비) 영등드린다'고 하며, 바람이 불면 '바람 영등드린다'고 한다. 따라서 밥을 지어 찬과 함께 부엌에 차려놓고 오색 헝겊을 나무에 걸어 두기도 한다.

영등할머니는 초하룻날 하늘에서 내려왔다가 20일에는 다시 하늘에 올라간다고 믿기 때문에 그 사이에 각 가정에서 모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승천하는 날에 대해서는 지방에 따라 다르다. 영등할머니가 내려와 있다는 2월에는 금기하는데, 영등할머니를 맞이하기 위해서 황토를 파다가 문 앞에 뿌려 신성하게 하며, 대나무에 오색 헝겊을 달아 사립문에 매달고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금하며, 창도 바르지 않고 고운 옷을 입는 것도 삼간다.
 

③ 콩볶기

각 가정에서는 2월 1일에 콩을 볶는다. 솥에 불을 지피고 콩을 넣은 후 주걱으로 타지 않게 젓는다. 볶은 콩을 식구들이 나누어 먹는데 아이들은 좋아라고 주머니에 가득 넣고 다니며 먹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 날을 기다린다. 콩을 볶을 때는 저을면서 "새앙鱁 볶아라. 쥐알 볶아라. 콩 볶아라" 하고 주언(呪言)을 한다. 그러면 새와 쥐가 없어져서 곡식을 축내는 일이 없다고 한다.

2월 1일에 콩 볶는 것으로 가을 수확을 미리 예상하기도 하는데, 그 방법은 콩과 약간의 보리를 섞어서 한 되를 솥에 볶는다. 다 볶은 다음에 담아 한 되가 더 되면 풍년이 들어 추수가 많으며, 한 되가 못되면 흉년이 들게 된다고 전한다. 또 이날 콩을 볶아 먹으면 집안의 노래기가 없어지고 청결해서 좋다고 한다.
 

③ 향낭각시(香娘閣氏)

2월 1일 각 가정에서는 대청소를 한다. 집 안팎을 깨끗이 쓸고 닦으며 거미줄을 털고 외양간 같은 가축우리도 거름을 치운다. 2우러 초면 노래기라는 벌레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초목의 썩은 부분에서 더욱 심하게 나오고 방에까지 기어 들어오므로 이것을 막기 위하여 부적을 만들어 붙인다. 백지에 "香娘閣氏 速去千里(향낭각시여, 속히 천리 밖으로 도망가라)"라고 써서 기둥이나 벽 서까래 같은 곳에 거꾸로 붙인다. 노래기에게 빨리 천리만큼 먼 곳에 가라고 명령하는 것이니 이 주문(呪文) 부적(符籍)을 붙이면 노래기가 없어진다는 것으로 믿고 있다. 이 부적은 주서(朱書)가 원칙이지만 묵서(墨書)도 한다. 또 노래기를 막기 위해 솔가지를 꺾어다 지붕 위에 꽂기도 한다. 초하룻날 이른 새벽에 소나무 잎을 문앞이나 뜰에 뿌린다. 솔잎은 냄새가 나므로 벌레를 제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전해온다.
 

(2) 경칩일(驚蟄日)

경칩 무렵에는 날씨가 따뜻해서 초목의 싹이 돋아나며 동면하던 짐승들도 땅속에서 나온다. 이날 농촌에서는 개구리알이 몸에 좋다고 하여 논이나 물이 고인 곳을 찾아가 건져 먹는다. 또 이날 흙일을 하면 탈이 없다고 해서 벽을 바를거나 담을 쌓기도 한다. 빈대가 심한 집에서는 물에 재를 타서 그릇에 담아 네 귀퉁이에 놓기도 하는데, 빈대를 없대기 위해서이다. 경칩일에느 보리싹의 성자을 보아 한 해의 풍흉을 예측하며, 단풍나무를 베어 상처를 내서 거기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면 위장병이나 성인병에 효과가 있다고 해서 약으로 먹는다.
 

(3) 춘분일(春分日)

조선시대에는 춘분을 전후해서 우맥(雨麥)을 심은 다음 관찰사(觀察使)와 지방 유수(留守)들은 각각 관내의 농사일의 형편과 비가 흡족하게 내렸는지를 왕에게 아뢰었고, 대궐 안에서는 관상감(觀象監)과 승정원(承政院)과 팔도의 사도영하(四道營下)에 측우기를 배치하고 이것을 살펴 당년의 농사가 풍년인지 흉년인지를 점쳤다. 춘분과 추분 전에는 관찰사나 군수가 가족으 거느리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는 백서의 영역(營役)을 빼앗으면 농사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4) 꽂샘〔花妬娟〕

2월 중에는 바람이 많이 분다. 김장독이 깨진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찬바람이 분다. 그러나 2월 바람은 동짓날 바람처럼 매섭고 차지는 않다. 새 움이 트고 싹이 나며 꽂봉오리가 생기는데, 풍신(風神)이 이를 시샘하여 꽃을 피우지 못하도록 바람을 불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꽃샘'이라고 부르며 한자로는 '화투연(花妬娟)'이라 불렀다. 이때는 고기잡이를 나가지 않고 먼 길의 배도 타지 않는다. ≪열양세시기≫에는 꽃샘에 설늙은이가 죽는다고 하였는데, 환절계(換節季)를 맞이해서 사람이 사망하는 일이 많음을 말한다.

 

3. 3월
 

3월에는 3일의 삼짇날이 들어 있으며 청명(淸明)과 곡우(穀雨)가 절기에 든다. 흔히 '춘삼월 호시절(春三月好時節)'이라 하듯이 봄의 실질적인 시작으로 청명·한식(寒食)·삼진일(三辰日)·화전(花煎)놀이·궁술회(弓術會)·곡우물 먹기 등의 세시풍속이 행해진다.

시식으로 화전(花煎), 두견주(杜鵑酒)·도화주(桃花酒)·소국주(少麴酒) 등과, 산떡〔散餠〕·환떡〔環餠〕, 애탕(艾湯)·탕평채(蕩平采) 등이 있다.
 

(1) 삼진일(三辰日)

3월 3일을 삼짇날이라고 한다. 이때는 강남에 갔던 제비도 옛집을 찾아온다고 한다. 조선 중엽 이후에는 많은 유현(儒賢)들이 삼짇날에 시제(時祭)를 지냈으며, 요즘에도 무당들은 굿을 많이 하고 있다.

이 무렵이면 날씨도 온화하고 산과 들에 꽃이 피기 시작하므로 놀이를 가는데 이를 화류(花柳)놀이 또는 화전(花煎)놀이라고 한다.

삼짇날에는 각종 나비들이 봄을 맞아 꽃을 찾으며 날아다닌다. 이때에 사람들은 나비를 보고 점을 치는데, 즉 노랑나비와 호랑나비를 먼저 보면 소원이 이루어질 길조이고, 흰 나비를 먼저 보게 되면 부모의 상을 당하게 될 흉조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흰색은 상복(喪服)의 색과 통하기 때문이다.
 

(2) 한식일(寒食日)

동지(冬至) 후 105일째 되는 날이 한식일이며 3월이 되기도 하나 대개遁는 2월에 든다. 이날은 조상의 묘소에 과일과 떡 등을 차려 놓고 한식차례(寒食茶禮)를 지내며 조상의 무덤이 헐었으면 떼를 다시 입히는데, 이것을 '개사초(改沙草)'라고 한다. 묘 둘레에 식목을 하는 것도 이날이다. 그러나 한식이 3월에 들면 개사초를 하지 않는다. 또한 이날은 더운 밥을 먹지 안호 찬밥을 먹는대 이는 중국 진(晉)나라의 충신 개자추(介子推)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전한다.

즉, 개자추가 간신에게 몰려 면산(綿山)에 숨어 있었는데 진문공(晉文公)이 개자추의 충심을 알고 찾았으나 나오지 않으므로 이날 나오게 하기 위하여 불을 놓았다. 그러나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불에 타죽고 말았으며, 사람들이 그의 충성됨에 감동하여 찬밥을 먹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따라서 찬밥을 먹는 풍속은 중국에사 전해혼 유속(遺俗)이다.

한식날 농가에서는 나무를 심거나 채소씨를 뿌려서 새해 농경의 준비를 시작한다. 또한 이날 천둥이 치면 흉년이 들 뿐 아니라 나라에도 불행한 일이 있다고 해서 매우 꺼린다. 한식 무렵엔 봄갈이가 시작되고 풀도 새싹을 보이기 시작하여 희망에 부푸는 때이기도 하다. 도시에서는 산소에 올라가 제사 올리는 것을 설날·한식·단오·추석의 네 명절에 행했다. 술·과일·포·식혜·떡·국수·탕·적 등의 음식으로 제사를 드린다. 이것을 절사(節祀)라고 한다. 그래서 서울 근교에서도 사람들이 줄을 지어 끊이지 않았다.
 

(3) 청명일(淸明日)

청명을 24절기의 하나로 청명일은 한식 하루 전이거나 한식과 같은 날이 된다.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이날을 기해 봄일을 시작하므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한식날과 같이 이날 산소를 찾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대궐에서 버드나무와 느릅나무에 불을 붙여 각사(各司)에 나누어 주었는데 불을 소중히 여기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한식의 금화(禁火)와 청명의 반화(飯火)는 불과의 긴밀한 민속을 형성하였다.

청명 무렵이 되면 하늘이 차츰 밝아진다. ≪열양세기기≫에 의하면 청명일에 내벙조(內兵曹)에서 느릅나무와 버드나무에 불을 붙여 임금께 올리면 그 불을 홰에 붙여서 내아虁의 여러 관청과 관리인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4) 곡우(穀雨)

곡우는 24절기의 하나이며 3월에 들어 있다. 곡우 때가 되면 못자리를 마련하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때가 되면 훅산도 근처에서 겨울을 보낸 조기가 북상해서 충청남도의 격렬비열도(格列飛列島)깍지 올라오므로 황해에서 조기가 많이 잡힌다. 이때 잡는 고기를 특별히 '곡우살이'라고 한다. 곡우살이에 잡은 조기는 아직 살을 적지만 연하고 맛이 있기 때문에 곡우살이를 위해서 서해는 물론 남해의 어선들도 모여들어 바다는 흥청댄다. 곡우 무렵이 되면 농가에서는 못자리를 하기 위해 볍씨를 담근다. 볍씨를 담가두었던 가마니는 솔가지로 덮어두며, 상가(喪家0에 들렀거나 밖에 나갔다가 부정한 것을 본 살람은 불을 놓아 악귀를 붸은 다음 볍씨를 다룬다. ≪열양세시기≫에는 한강의 물로기로는 '공지(공미리)'가 있어서 3월초에 양주군 미음(渼陰)까지 올라간다 하였다.
 

(5) 전춘(餞春)

3월은 계춘(季春)이니 30일인 말일은 봄의 마지막 날이 된다. 그래서 봄을 마지막 보내는 서운함에 봄잔치를 한다. 문장을 짓는 사람이나 문객들은 주식(酒食)을 마련하여 경치 좋은 계곡이나 강변을 찾아가서 하루를 청유(淸遊)한다. 이때는 자기의 능력에 따라 글을 짓기도 하고, 시조를 읊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선비다운 놀이로 하루를 즐긴다. 해마다 봄은 다시 오는 것이지만 그래도 가는 봄이 서운해서 감상과 춘흥으로 봄잔치를 한다.



 

Ⅱ. 여름

 

여름은 음력 4월에서 6월까지로 이 기간은 춘절(春節)과는 달리 파종 후 성장의례(成長儀禮)가 중심이 되는 세시풍속을 형성하고 있다. 여름은 만물이 숙성한 때이고 양기(陽氣)가 성장(盛長)하므로 우리의 고대 제천의식에는 5월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고대 삼한(三韓)의 5월 춘제는 연례적인 세시제의로서 농경제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름의 세시풍속으로 언급될 수 있는 것들로서蝥 4월의 석탄일(釋誕日), 5월의 단오, 6월의 유두(流頭) 등이 있다.
 

1. 4월

4월은 맹하(孟夏)로서 여름의 문턱이며 24절기로는 입하(立夏)와 소만(小滿)이 들어 있다. 농가에서는 농사일이 바쁘게 시작되고 보리이삭도 패기 시작한다.

이 달의 8일은 석가모니 탄신일이다. 그리고 소녀들은 이 달에 손톱에 봉선화물을 곱게 들이는데, 손톱의 미용에도 관계가 있는 것이지만 붉은 색은 잡귀를 붸는 벽사(抗邪)의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달의 시식으로는 화전(花煎)·어채(魚菜)·미나리강회·파강회·증병(蒸餠) 등이 있다.
 

(1) 초파일(初八日)

① 연등(燃燈)

4월 8일은 석가모니의 탄생일이라고 전해지며 욕불일(浴佛日)이라 부르기도 한다. 민간에서는 흔히 초파일이라 한다. 이날의 행사로는 연등(燃燈)과 탑돌이가 있으며, 놀이로는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수부희(水缶戱)'가 있었다. 이는 물장고라고도 하겠는데, 어린이들이 이날 물동이에다 바가지를 엎어놓고 빗자루로 두드리면서 진솔(眞率)한 소리를 낸다고 하였다. 이것은 중국의 태평고(太平鼓)와 유사한 뜻이 있느데 ≪경도잡지≫에는 '수고(水鼓)'라 하였다. 요즘에는 행해지지 않는다.

이날에는 절을 찾아가 재를 올리고 연등(燃燈)을 한다. 초파일을 여러날 앞두고 가정이나 절에서는 여러 가지 등을 만든다. 또 상점에서는 팔기 위하여 등을 만들어 걸어두기도 하며, 가정에서 만들 때에는 가족의 수대로 만든다.

초파일 며칠 전부터 뜰에 등간(燈竿)을 세워두고 간상(竿上)에 꿩꼬리털을 꽂고 물들인 비단으로 기를 만들어 다는데, 이를 '호기(呼旗)'라고 한다. 이 호기에 줄을 매고 그 줄에 등을 달아 맨다. 살림이 넉넉하지 못해 등간을 만들지 못하는 집에서는 나뭇가지난 혹은 추녀 끝에 빨랫줄처럼 줄을 매고 그 줄에 등을 달아 놓기도 한다. 이날 밤이 되면 등에다 불을 밝히는데 호화찬란한 형형색색의 등들이 바람에 따라 흔들거리는 광경은 장관을 이룬다.

등은 과실 모양으로 만들기도 하고 꽃이나 어륨(魚類) 또는 여러가지 동물모양을 본떠서 만들기 때문에 그 이름만 해도 수박등·마늘등·참외등·연화등·모란등·잉어등·거북등·봉등(鳳燈)·계등(鷄燈)·학등(鶴燈)·일월등(日月燈)·선인등(仙人燈)·칠성등(七星燈)·누각등(樓閣燈)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등에는 태평만세(太平萬歲)·수복(壽福) 등의 글자를 쓰기도 하고, 기마장군상(騎馬將軍像)이나 선인상(仙人像)을 그리기도 한다.

또, 화약을 층층으로 새끼줄에 매달아 불을 붙이면 아치 요즈음의 불꽃놀이와 같이 불꽃이 튀면서 퍼지는데, 이러한 놀이로 흥을 돋우기도 하고 때로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줄에 매달아 바람에 흔들리게 하여 놀기도 했다.

이러한 풍속을 신라의 팔관회(八關會)에서 시작되었으며, 고려 초에는 정월 보름과 2월 15일에 행하다가 지금은 4월 초파일로 고정되었다. 연등행사는 불교의 습속이므로 원래는 불교 신도들에 의해서 행해지던 것이나 지금은 일반화해서 민간에서도 성행되는 것이니 그만큼 불교의 전파를 뜻하며, 신도가 아니라도 연등을 구경하는 사람들로 성황을 이룬다. 요즈음도 초파일에는 불도들이 대대적인 연등행사가 도시의 거리를 누비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신라 때에 정월 15일에 등을 달아매는 일이 있었고, 고려시대에 들어와 현종(顯宗)때(1010)에는 2우러 15일에 연등회를 거행하고, 그후로 관례가 되었다가, 가薡종(高宗) 때(1214)부터 초파일에 연등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고려시대처럼 공의(公儀)로 정해서 연등하는 일이 없고, 민간에서 세시풍속으로 전해왔다. 초파일을 명절로 여기고 연등을 하여 다채로운 행사가 거행되기에 이르렀으며, 태종 12년 상원 연등 때에는 용봉호표(龍鳳虎豹)의 모양으로 등을 만들어 장식한 일이 있다. 성종 6년(1475) 초파일의 연등시에는 집집마다 수없이 등을 달았는데, 새·짐승·물고기·용 등의 온갖 모양의 등들이 사치스럽고 절묘했다고 세시기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초파일에 세우는 등간은 자녀의 수대葡로 하고 남보다 크고 놓기를 바라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등간 위에는 꿩으 깃을 跘아 길상(吉祥)을 표시하고 울긋불긋한 천을 매달았다. 등의 자薷류는 매우 많아서 마늘·연꽂·수박 같은 모양을 딴 것과 학·잉어·자라·거북과 같은 동물모양의 등도 있었고, 병·항아리·북 같은 기물(器物)의 모양을 한 등도 있었고, 칠성등·수등(壽燈)도 있었다.

≪청구영언 靑丘永言≫의 <관등가 觀燈歌>의 1절을 보기로 한다.

 

四月初八日에 觀燈하러 臨高臺하니

遠近高低의 夕陽은 빗겻난대

魚龍燈 鳳鶴燈과 두루미 南星이며

鍾磬燈 仙燈 북燈이며

수박燈 마늘燈

蓮꽃속에 仙童이며

鸞鳳우회 天女로다

배燈 집燈 산듸燈등과 影燈

알燈 甁燈 壁欌燈

가마燈 欄干燈과 獅子탄 체괄이며

발노차

구을燈에 日月燈 밝아닛고

七星燈 버러난듸

東嶺의 月上하고

곳고지 부을 현다

우리임은 어듸가고

觀燈할 줄 모르난고
 

다음은 ≪한양세시기≫에 수록된 연등에 관한 시이다.
 

맑고고른 일기에

밤의풍경 어떠한고

물방구 치며치며

땅구르는 노래로다

온동네 두루두루 등불로 빛나니

사람집에 자녀많음을 깨닷도다
 

② 탑(塔)돌이

4월 초파일인 불탄일과 중추가절인 한가윗날에는 탑돌이를 하였다. 불탑의 건립은 석가모니가 입적(入寂)한 뒤, 그 유골을 넣어 두기 위해 8개의 탑을 세운 데서 비롯한 것이므로 탑은 곧 불교의 상징인 셈이다. 불사에서 대재(大齋)가 있으면 신도들은 공양을 올린다. 이때에 염불·범음(梵音)·범패(梵唄)가 따르며, 재가 끝나면 신도는 승려와 함께 불탑을 돌면서 부처님의 공덕을 빌고 저마다의 소원을 비는 것이다. 일신의 왕생극락은 물론 국태민안을 비러 태평성대를 누리고자 했다. 큰 재일수록 많은 신도들이 모이며 따라서 탑도리도 성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탑돌이 때 처음에는 법종(梵鍾)·고(鼓)·운판(雲板)·목어(木魚)의 사법악기(四法樂器)만 쓰이다가, 후에 삼현육각(三弦六角)이 합쳐지고 보념(報念)과 백팔정진가(百八精進歌)를 부른 것을 보면, 처음에는 순수한 불교의식이던 것이 차츰 민속화하여 민중 속에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얼마 전까진만 해도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에서는 탑돌이가 성대하게 거행되곤 했으나 이제 탑돌이 민속은 차츰 사라져가고 있는 듯이다. 그러나 근래 탑돌이를 재현하는 경향이 있어 법주사·월정사·불국사·봉은사 등에서는 탑돌이를 한 바 있다.
 

 

2. 5월
 

5월은 하절의 세시풍속상 중심이 되는 달로서 절기상 망종(亡種)과 하지(夏至)가 들어 있다. 이때의 대표적인 세시풍속으로는 5월 5일의 단오절을 들 수 있다. 단오는 증국 전래의 명칭으로 여기에 따른 행사들도 중국적인 것이 많다. 그러나 상충계급의 단오민속 수용 외에도 옛날부터 고유하게 치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수릿날'의 5월제에 대한 민속도 고유명절로 파종의식(播種儀式)인 것이다.
 

(1) 단오(端午)

5월 5일은 단오·수리〔戌衣〕·천중절(天中節)·중오절(重午節)·단양(端陽)·수릿날 등의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어진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사대절사(四大節祀)라 하여 정조(正朝)·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秋夕)을 들었다.

단오날이면 궁중에서는 단오제를 지냈으며 태종 2년(1412) 단오에는 왕이 문소전(文昭殿)에 나가 단오제를 거행한 바 있다. 민간에서 행해지는 단오제의 대표적인 행사는 강릉단오제로 전국저인 규모로 치루어진다. 음력 4월 15일부터 행해지는 강릉단오제는 5월 5일날 절정을 이루며 제례·굿·관노가면극(官奴假面劇)·씨름·그네 등이 함께 열린다.

단오날은 옛날에는 농경의 풍작을 기원하는 제사날이었으나 지금은 농촌의 명절로 되어 이날이면 각 가정에서는 수리치떡 등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단오차례를 지내기도 하고, 여자는 창포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뛰며, 남자는 씨름 등의 놀이로 하루를 즐긴다.

옛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음양수(陰陽數)의 영향으로 5월 5일은 양기가 강한 날이라 하여 큰 명절로 생각해왔다. 이날을 수리 또는 수릿날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문헌에 의하면 이날 쑥떡을 해 먹는데 쑥떡의 모양이 수레바퀴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리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이라고 하고, 수리치로 떡을 해먹었기 때문에 수리란 이름이 붙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또 '수리'란 고(高0·상(上)·신(神) 등을 의미하는 우리의 고어(古語)인데 5월 5일이 '신의 날'·'최고의 날'이라는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도 한다. 일설에는 중국 초(楚)나라 시인 굴원(屈原)이 충분(忠憤0을 이기지 못하여 5월 5일에 수뢰(水瀨)에 빠져 죽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① 천중부적(天中符籍)

단오날에는 나쁜 귀신을 쫓는다고 하여 부적을 만들어 붙였는데 이를 '천중부적'이라 한다. '천중'이란 말은 단오적을 '천중절(天中節)'이라고도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부적은 붉은 글씨로 벽사문(抗邪文)을 써서 문 위에 붙였는데, 옛날엔 관상감(觀象監)에서 천중부적을 만들어 대궐 안의 문미(門楣)에 붙였다. 부적에는 5월 5일의 천중절에 복록(福祿)을 얻고 귀신과 404가지 병을 소멸하라는 주문을 쓰거나 혹은 처용상이나 도부(挑符)를 그려 넣었다.

단오날 도부를 붙이는 목적은 악귀를 물리치는데 있었고,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단오날에 부적을 붙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 믿었기 때문에 천중부적을 많이 붙였다.

부적은 경사대부(卿士大夫)집에서도 붙였다. 관상감에서 만든 주사(朱砂)의 부적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다.

 

5월 5일 천중절에, 위로는 하늘의 녹을 받고 아래로 땅의 복을 얻어 치우(蚩尤)의 복의 구리머리·쇠이마·붉은 입·붉은 혀으 4백 4병이 일시에 없어져라

빨리빨리 법대로 시행하라
 

② 창포

단오날에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윤기가 흐르며, 빠지지도 않고 소담하다고 해서 옛날에는 남녀가 모두 창포물에 머리를 감았다.

단오날에 옛날의 부녀자들은 창포뿌리를 잘라 비녀를 만들어 머리에 꽂기도 하였는데, 비녀에는 '수복(壽福)'의 두 글자를 새기기도 하고 연지로 붉게 칠하기도 한다. 붉은 색은 양색(陽色)으로 축귀의 기능을 가진 것에서 생긴 풍속이다.

창포물을 만들 때에는 창포만을 삶기도 하나 쑥을 넣어서 함께 삶기도 한다. 또한 벽사로 호로박이나 작은 인형을 만들어 허리에 차기도 하는데 질벼을 붸는다고한다.

단오날 아침 일찍 상추밭에 가서 상추잎에 묻은 이슬을 받아 세수하면 여름에 더葡위를 먹지 않으며 부스럼도 없다 한다.
 

③ 익모초(益母草)와 쑥

단오날이면 익모초와 쑥을 뜯는 풍속이 있다. 단오날 오시(午時)에 익모초와 쑥을 뜯어 말려 두었다가 약으로 쓰기 위해서이다. 쑥과 익모초는 한방의 약초로 많이 사용되는데, 특히 이때의 익모초와 쑥은 특효가 있다고 한다.

익모초란 이름 그대로 산모의 몸에 이롭다고 하며, 또 여름에 익모초로 즙을 내서 마시면 입맛이 나고 식욕도 돋군다고 해서 농촌에서는 흔히 먹는다.

농부들이 들에서 일을 할 때에는 약쑥으로 긴 홰를 만들어 불을 붙여두고 하루 종일 담뱃불을 붙이는데 이용하다. 또 이날 아침 이른 새벽에 쑥을 베어다가 다발로 묶어서 문 옆에 세워둔다. 이렇게 하면 재액을 물리친다고 한다.

 

6. 6월

 

6월은 하절 중 소서(小署)와 대서(大暑)가 들어 있는 만큼 더워지는 계절이다. 이때는 삼복(三伏)이 들어 더위에 지치기도 한다. 6월의 대표적인 명절은 15일의 유두(流頭)날로 보름민속의 하나이다. 또한 복날의 행사도 세시풍속으로 정착되었다.
 

(1) 유두(流頭)

① 유두연(流頭宴)

음력 6월 15일인 유두는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이란 말에서 나온 것으로 이날 개울을 찾아가서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으며 하루를 청유(淸流)한다. 그러면 상서롭지 못한것을 붸고 여름철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유두의 풍속은 신라 때에도 있었으며 동류(東流)에 가서 머리를 감는 것은 동방은 청(靑)이라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곳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유두날 선비들이나 동료들끼리 술과 고기를 마련하여 계곡이나 정자를 찾아가서 풍월을 읊으며 하루를 즐기는 것을 유두연(流頭宴)이라 한다.
 

②유두천신(流頭薦新)

유두 무렵에는 새로운 과일이 나기 시작하므로 수박·참외 등을 따고 국수와 떡을만들어 사당에 올려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유두천신이라고 한다.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사고가 강했던 옛날에는 새 과일이 나면 자기가 먼저 먹지 않고 조상에게 올린 다음에 먹었는데, 이것은 조상의 은혜를 잊지 않고 지극한 효성을 드린다는 성실한 마음씨의 표현이다.
 

③ 유두일의 절식으로는 유두면(流頭麵)이 있는데 이날 유두국수를 먹으면 장수하고 더위를 먹지 않난다고 해서 모두 먹는다. 또한 수단(水團)·상화병(霜花餠)·연병(連餠)이 있는데, 수단은 멥쌀가루를 쪄서 긴 다리같이 만들어 둥근 떡을 만들고 잘게 썰어 구슬같이 만든다. 그것을 꿀물에 넣고 얼음에 채워서 먹고 제사에도 쓴다. 이것을 수단이라고 한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유두날이면 잡귀의 출입을 막고 액을 붸는다고 하여 밀가루를 반죽하여 구슬처럼 만들고 색으로 물들여 세 개씩 포갠 후 색실로 꿰어서 허리에 차거나 대문에 걸어두는 풍속도 있었다.

또 밀가루를 반죽하여 콩이나 깨에 꿀을 섞은 소를 싸서 찐 것을 상화병이라 하며 밀가루를 맷돌질하여 기름에 지지고 나물 소를 싸거나 콩과 깨에 꿀을 섞은 소를 싸서 각기 다른 모양으로 오무려 만든 것을 연병이라 한다.

이것들이 모두 유두날의 시절음식이요, 제사에 쓰기도 한다.

또 ≪동국세시기≫에는 이달의 시식으로 참외와 수박을 먹는다고 하는데 이것이 더위를 씻는 음식이라 한다.
 

(2) 삼복(三伏)

하지(夏至)로부터 셋째 경일(庚日)을 초복, 넷째 경일을 중복, 입추(立秋)로부터 첫째 경일을 말복이라 하며 이들을 통틀어 삼복이라 한다. 이때 더위를 삼복더위라 하며 연중 가장 더울 때이다.

복중에는 더위를 피하여 술과 음식을 마련해 가지고 계곡이나 산정을 찾아가서 더위를 잊고 하루를 청유(淸流)한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서울 풍속에 남산과 북악산 계곡에서 탁족(濯足)의 놀이를 한다고 했으며, 서대문 밖 천연정(天然亭)의 연꽂, 삼청동(三淸洞)과 탕춘대(蕩春臺)와 정릉으 수석(水石)에 산보객이 많이 모인다고 하였다.

복날이 되면 더위를 피하여 계곡을 찾아가서 닭죽을 끓여 먹고 노는 것을 '복다림'이라 한다. 이것은 삼짇날 화전놀이 가는 것을 '꽃다림'이라 하는 것과 같다. 복날 개를 삶아 파를 넣고 푹 끓인 것을 구장(狗醬)이라 한다. 여기에 닭이나 죽순을 넣으면 더욱 좋다. 또 개국에 고추가루를 타고 밥을 말아서 시절음식으로 먹는다. 그렇게 하여 땀을 훌리면 더위를 물리치고 허한 것을 보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장에서도 이것을 파는데 요즘에는 구장보다는 닭에다 인삼을 넣고 푹 삶은 계삼탕이 많이 애용되고 있다.

그리고, 요즈음 여자들은 복날을 가려 모래찜을 하러 간다. 더운날 뜨거운 모래를 파헤치고 속옷차림으로 들어가 뜨거운 모래로 전신을 덮고 땀을 흘리면 몸 안에 있는 독기(毒氣)가 흐르는 땀과 함께 밖으로 흘러나와 버린다고 한다. 이때 얼굴만을 가려야 하기 때문에 양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엎드리거나 누워 있는데, 이와같이 땀을 흘리고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고 기름진 음식을 먹어 보(補)한다.

또 삼복 때에는 '복날마다 대추 연다.'는 말이 있는데, ≪열양세시기≫에는 "삼복에 비가 오면 처녀의 눈물이 비오듯이 쏟아진다."고 하여 삼복은 비와 결실을 점치기도 하였다. 농가에서는 6월을 '썩은 달' 또는 '액달'이라 하여 혼인날을 잡지 않고, "앉은 방석오 옮기지 않는다."고 하여 이사가는 것을 꺼리는데, 이때가 더위와 장마가 닥쳐오는 때이기 때문이다.

속담에 '깐깐 5월, 미끈 6월, 어정 7월, 동동 8월'이라 했듯이 6월은 다소 한가한 시기로 복다림을 하며 더운 여름철을 난다.
 

(3) 약수(藥水)

복날을 전후해서 피서로 약수터를 찾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에는 이름난 많은 약수가 있으며 복중에는 이러한 약수터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약수는 바위틈에서 솟는 장연수이며 그 성분에 따라 여러가지 병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약수터 譻처는 노목이 울창하고 약수도 차가우므로 더위를 피하기에는 안성마춤이다. 따라서 복중에는 피서도 하고 경치도 볼겸 많은 사람들이 약수터로 모여든다.


 

Ⅲ. 가을
 

가을은 음력 7월에서 9월까지의 시기로 수확에 따른 세시풍속이 많다. 추수동장(秋收冬藏)의 농경의례뿐만 아니라 7월 7일의 칠석(七夕), 7월 15일 백중(百中), 8월 15일의 가윗날, 9월 9일의 중양절(重陽節) 등이 가을철의 세시풍속에 든다.
 

1. 7월

7월에는 절기상 입추(立秋)와 처서(處暑)가 들어 있다. 입추는 가을의 시작으로, 처서는 더운 기운이 멈춘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므로 이때쯤이면 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불게 된다. 또한 7월은 시정(詩情)과 신앙이 함께 있는 달로 칠석(七夕)과 망혼일(亡魂日)·주원(中元)이 들어있다. '어정 칠월'이란 말도 있듯이 호미씻기를 하는 등 농가에서는 휴식을 취는 때이기도 하다. 또한 입추는 가을의 입구로서 중국 월령(月令)에 의하면 천자(天子)가 삼공구경(三公九卿)을 통솔하고 가을의 방향인 서쪽으로 가서 가을맞이르 했다고 한다.
 

(1) 칠석(七夕)

음력 7월 7일을 칠석이라고 한다. 이날 저녁에 처녀들은 직녀성에다 바느질 솜씨가 늘기를 빌었으며, 글공부 하는 소년들은 두 별을 소재로 하여 시를 지었다.

칠석날 세상에 사는 까마귀와 까치가 하나도 없으며, 어쩌다 있는 것은 병들어 하늘에 가서 오작교 놓기에 참여하지 못하는 새들뿐이라고 한다. 칠석날 저녁에 비가 내리면 견우와 직녀가 상봉한 기쁨의 눈물이라 하며, 이튿날 비가 모면 이별의 슬픈 눈물이라고 전하다. 까마귀와 까치들이 다리를 놓아 주기 때문에 오작교(烏鵲橋)라 하며 돌을 머리로 이고 가서 다리를 놓아 주었기 때문에 이날이 지나면 까치의 머리털이 빠져 벗둁져 있다고 한다.

칠석날에 비가 올 경우 낮에는 즐거운 눈물, 밤에는 이별의 눈물이라 하는데, 이날에 칠석우(七夕雨)가 오면 풍년이 든다고 점친다. 또한 이날 여자들이 바늘에 실을 꿰어 남편의 옷자락에 몰래 꿰매면 무엇이든 소원성취한다고도 전한다.
 

(2) 백중일(百中日)

① 우란분재(盂蘭盆齋)

7월 15일은 '백중일'·'백종일(百種日)'·'망혼일(亡魂日)'·'중원(中元)'이라고도 한다. 이날 승려들은 사원에서 재를 올려 부처에게 공양을 한다. 신라와 고려 때에는 우란분재(盂蘭盆齋)를 벌여 속인들도 공양을 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주로 승려들만 의 행사가 되었다.

백종일에 사람들은 조상의 사당에 천신(薦新)을 드리며 술과 고기를 마련하여 노래와 춤으로 하루를 즐긴다.

농촌에서 백중일을 전후해서 시장이 섰는데 이를 '백종장'이라고 했다. 즉, 이는 백종시장이라는 뜻이며, 머슴을 둔 가정에서는 이날 하루를 쉬게 하여 물건을 사거나 취흥에 젖게 한다. 그래서 백종일을 전후해서 여러 곳에 씨름판이 벌어지거나 흥행단이 모여들기도 한다.

망혼일이라고 하는 것은 백종일 밤에 술과 고기, 밥, 떡, 과실 등 많은 음식을 차려 놓고 망친(亡親)의 혼을 불러들여 재를 지내는 까닭이다.

백종이란 말은 이 무렵에 과실과 소채가 많이 나기 때문에 제물을 백가지 차린다 해서 나온 거이다. 또한 이날은 그해에 농사를 잘 지은 집의 머슴을 소에 태우거나 가마에 태운 후 위로하고 흥겹게 놀기도 한다.

지방에 따라서는 백종일에 차례를 지내기도 한다. 그러기 위해 산소에 벌초를 하고 성묘도 한다.

승가(僧家)에서는 백가지의 꽃과 음식을 차려놓고 우란분재를 개최했다. 이는 죽은 사람이 영혼에 대한 공양이다. 서울의 여승들이 있는 절에서는 부녀자들이 찾아와 죽은 부모의 영(靈)을 부르면서 제사을 지낸다. 때로는 승려들이 거리에 탁자를 놓고 음식을 챠려 우란분재를 열기도 한다. 이때 너무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구경하게 되므로 성종(成宗) 때에는 금지시켰던 일도 있다.

명종(明宗) 때에는 쌀밥을 지어 가지고 강가에 가서 고기에게 주고 방생(放生)을 한 일이 있으며 천한 사람들끼리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기고 앴다.
 

② 호미씻이

7월 15일을 머슴날이라 하여 '호미씻이'를 하는데 농사를 짓느라고 수고한 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위로하며, 농악을 치고 춤을 추는 놀이를 한다.

여성의 경우에는 신라풍속에서 7월 16일부터 왕녀(王女)가 6부의 여자들을 데리고 베를 짜기 시작하여 8월 보름에 심사하여서 주식(酒食)을 갖추어 승자와 패자간에 사례를 하고 가무(歌舞)하였다는 오래된 기록도 있듯이 적마경기(積麻競技)를 하였던 것이다.
 

③ 올벼천신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경사대부(卿士大夫)의 집에서는 올벼를 사당에 천신한다고 한다. 이는 흔히 삭망전(朔望奠) 때 행한다.
 

(3) 기타

장마가 든 6월이 지나 7월이 되면 사대부나 농가에서는 책과 옷을 햇볕에 말린다. 이를 쇄서포의(朜書曝衣)라고 하는데 <농가월령가> 7월령에서도 "장마를 겪었으니 집안을 돌아보아 곡식도 거풍(擧風)하고 의복도 포쇄(曝朜)하고."라고 하였다. ≪동국세시기≫에서는 "인가에서는 7월 칠석날 옷을 햇볕에 말린다. 이는 옛날 풍속이다."라고 하였다. 장마철 동안 옷장과 책장 속에 있던 물건들에는 곰팡이가 슬고 눅눅해져 있으므로 이날을 기하여 햇볕을 쪼이는 것이다.

 

2. 8월

 

8월은 추석(秋夕), 곧 한가윗날이 들어 있는 달로서 속담에도 있듯이 "5월 농부, 8월 신선"과 같이 수확의 기쁨을 맛보는 때이다. 비교적 이른 벼를 추수하여 천신(薦新)하고 풍요로움을 경추하는 한가윗날은 대표적인 보름명절로 달의 제전(祭典)이며 만월의례(滿月儀禮)이다.

절기상 8월은 중추(中秋)로서 백로(白露)와 추분(秋分)이 들어있다.
 

(1) 추석(秋夕)

추석의 우리말은 가위이다. 한자로 써서 가배일(嘉俳日)·중추절(中秋節) 등으로 쓰이느데,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의 오래된 명절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으며 높고 맑은 하늘, 풍성한 과일과 햇곡식, 저녁이면 동산에 둥글게 떠오르는 달, 농사일도 거의 끝나 한숨을 돌리게 된 일손, 어느모로 보나 1년 중 가장 좋은 이때를 최고의 명절로 삼아왔다.

옛부터 우리는 추석이 되면 아침 일찍 일어나 새옷으로 갈아 입고, 햇곡식으로 빚은 송편과 술, 그리고 갖가지 과일을 차려놓고 조상에게 차례를 지냈다. 차례가 끝나면 어른들을 모시고 조상들의 자랑스럽던 이야기를 들어가며 멀고 가까운 조상의 묘들을 찾아가 성묘를 한다.

저녁이 되면 먼곳에서 찾아온 친척과 이웃끼리 모여앉아 돋아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여러가지 놀이를 하고 즐기거나 장만한 음식들을 나누어 먹으며, 여러 이야기를 꽃피우고 오뉴월의 염천 아래서 땀흘려 일한 보람을 느끼는 거이다. 이때야말로 농부들이 편안하게 풍족감을 느끼는 때이다. 지금도 추석명절을 지내는 풍습은 옛날과 다름없고, 이때만 되면 고향을 찾아가는 귀성객들로 열차가 붐비고 조상의 묘를 찾는 성묘객들의 행렬이 꼬리를 잇게 된다.

추석의 놀이로는 강강술래. 거북놀이. 소놀이 등이 있다.
 

① 반보기(中路보기)

반보기는 '중로(中路)보기', 또는 '중로상봉(中路相逢)이라고도 한다. 추석 무렵이면 자주 만나지 못하는 일가친척의 부인네들 사이에 '반보기'를 하는 풍속이 있다. 옛날 부녀자들은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도 자주 만날 수 없었다. 그런데 8월쯤에 서로 통문을 보내어 일자를 정하고 두 마을 중간에 있는 경치좋은 곳을 택하여 서로 맛있는 음식을 마련해 가지고 가서 만났다. 특히, 친정어머니와 출가한 딸이 서로 보고 싶으나 시집살이가 심하여 말미를 얻지 못할 땡에는 반보기를 한다. 양쪽에서 나온 사람들은 그동안의 회포를 풀고 서로 음식을 권하며 소식을 묻고 하루를 즐기다가 저녁에는 각기 집으로 돌아간다. 마치 요즈음의 피크닉 같은 것이다.

남존여비와 유교적인 엄한 가족제도가 빚어낸 풍속이다.
 

② 시식(時食)

추석에는 햇벼를 비롯하여 각종 실과가 익는 때이므로 시식도 다양하다. 이때느 햅쌀로 밥을 지으며 떡도 하고 술을 빚는다. 수도(水稻)는 미처 익지 안았어도 산도(山稻)는 넉넉히 베어서 먹을 수 있으므로 어느 농가에서나 햅쌀을 마련할 수 있다. 햅쌀로 만드는 송편은 특별히 '오려송편'이라고도 하는데 신도(新稻)송편이란 뜻이다. 송편 속에느 역시 햇동부 등으로 만든 고물이나 참깨·밤·대추 등을 너흔다.

햅쌀로 빚은 술을 신도주(新稻酒)라고 한다. 추석차례에는 대개 신도주를 쓰며 손님을 청하여 대접할 때도 이 술을 권하는데, 이 술은 8월의 시식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8월에 나오는 햇과일로는 밥·대추·감·사과 등이 있다. 밤은 삶아서 먹기도 하지만 떡이나 밥에 놓아 먹는 것도 일미이고, 특히 풋밤이라고 하는 설익은 밤은 물이 많고 맛도 특이하다. 대추는 단맛이 일품이지만 말리기 위해 지붕 위에 널어둔 그 진홍의 색깔은 농촌의 가을을 실감케 할 만큼 황홀하다. 감은 아직 다 익지 않아 떫은 맛이 나지만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빨갛게 익어가는 모습은 더없이 아름답다. 떫은 감을 뜨거운 물에 소금을 적당히 타서 하룻밤 담가 두면 떫은 맛이 없어져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또 이때쯤이면 채소도 많이 나오므로 여러가지 찬을 만들어 먹는다.

 

③ 기타

추석날에 비가 오면 흉년이 든다고 하는데, 특히 다음해의 보리농사가 흉작이 된다고 예측하는 사람이 많다. 또 추석에 달이 보이지 않으면 개구리가 알을 배지 못하고 토끼도 새끼를 배지 못하며 메밀도 결실을 못한다는 속신이 있기도 하다.

또, 이날 높은 산에 올라가 달에 절을 하고 남보다 먼저 달을 보면 첫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도 믿는다.

 

3. 9월
 

9월은 계추(季秋)로서 24절기상 한로(寒露)와 상강(霜降)이 들어 있다. 이 때는 찬 이슬과 서리가 내리며 제비는 돌아가고 기러기가 돌아온다. 산과 들에는 국화꽃이 피며 단풍이 들어 가을이 무르익는 때이다.

이달에는 명절로 중구(重九)가 들어 있다.
 

중구(重九)

9월 9일은 '중구(重九)' 또는 '중양(重陽)'이라고 부른다. 중구란 말은 9가 겹쳤다는 뜻이며 중양은 양수(陽數)가 겹쳤다는 것이다. 기수(奇數)는 양수이기 때문이다.

9월은 단풍이 붉게 물들고 국화가 만발하여 단풍놀이를 한다. ≪동국세시기≫에는 "서울 풍속에 남산과 북악산에서 이날 마시고 먹으며 즐긴다. 이는 등고(登高)의 옛 풍습을 답습한 것이다. 남한산て청풍계て후조당て북한산て도봉산て수락산 등이 단풍 구경 하는데 좋다."고 하였다.

세월이 바뀌어도 산천은 옛과 큰 변화가 없으니 요즈음도 봄 가을 소풍이나 등산대회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사친가 思親歌>의 일절을 보기로 한다.
 

구월이라 중구일(重九日)에 천봉(千峰)이 엽탈(葉脫)하니

산빛이 판이하다 만학에 단풍드니

꽃이핀듯 반가워라 시유구월(時有九月)이 이때련가

서속삼추(序屬三秋) 가절(佳節)이라 지픈막대 자조놀려

절피남산(節彼南山) 올라가니 지세도 조커니와

풍경도 기이하다
 

9월 9일은 국화전(菊花節)이라고도 하는데, 황국(黃菊)을 따다가 찹쌀떡을 만든다. 3월 3일 삼진일(三辰日)과 같이 화전(花煎)을 지져 먹는데, 3월은 봄의 꽃인 진달래를 이용하고 9월은 가을꽃인 국화를 사용하여 국화전을 만들어 먹는다.

<동동>에서도 상국(賞菊)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구월구일(九月九日)애 아으 약(藥)이라 먹는

황화(黃花)고지 안해드니

세셔가 만폁애라

아으 동동(動動)다리
 

또,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배와 유자, 석류와 잣을 잘게 썰어 꿀물에 탄 것을 화채(花菜)라고 했는데 이는 시절음식으로 제사에 쓴다고 하였다. <농가월령가>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구월구일 가절이리 花煎하여 천신하세

질서를 따라가며 추원보본 잊지마소
 

또한 9월 9일에는 기러기가 돌아온다고 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구월(九月)이라 구(九)공날은 기러기가 옛집을 찾아오고

한번 가면 오는 줄은 미물의 짐승도 알건마는

우리 님은 어딜 갔기에 일거에 소식 아닌말가

(임동권,≪한국민요집≫Ⅰ,집문당, 1961)

 

Ⅳ. 겨울
 

겨울은 음력 10월에서 12월까지의 3개월간으로 절기상 맹동(孟冬) 10월에는 입동(立冬)과 소설(小雪)이 들어 있고, 중동(仲冬) 11월에는 대설(大雪)과 동지(冬至), 계동(季冬) 12월에는 소한(小寒)て대한(大寒)이 들어 있다. 이때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로 방위상 북방에 위치하는데 북은 복(伏), 동(冬)은 장(藏)과 종(終)의 의미를 내포하여 동장의례(冬藏儀禮)가 세시풍속을 형성하고 있다.

10월 상달이 지닌 농경의례적 관념과 동지 섣달의 송구영신(送舊迎新), 벽사진경의 교체민속이 동절의 세시풍속을 형성하고 있다.
 

1. 10월
 

10월은 상달이라 하여 좋은 달로서 각종 의례가 집중되어 있는 달이기도 하고 추수를 끝낸 후 풍요로움을 누리며 신에게 추수감사제를 지내는 때이기도 하다. 고구려의 동맹(東盟)도 10월 제천(祭天)으로 국중대회를 열었던 것이며, 마한(馬韓)의 10월제도 같은 성격의 제천행사인 것이과, 예(濊)의 무천(舞天)도 농공필(農功畢)을 축하하여 주야 음주가무하였던 것이다. 10월에 행해진 이들 행사는 국가적 의미를 지닌 세시제의(歲時祭儀)이며, 민간에서는 고사를 지내는 유풍이 오늘날까지 내여온다. 마을 단위로 행해지는 별신굿도 이 시기에 많이 열린다.

세시풍속으로는 시제(時祭), 10월 오일(午日)의 행사와 안택고사, 김장하기 등이 있다.
 

(1) 시제(時祭)

시제는 '시향(時享)'이라고도 하는데 4대 조상까지는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지만 5대 이상의 조상들에 대하여는 가을, 즉 10월 15일을 전후하여 한번에 제사를 지낸다. 시제 때에는 원근의 후손들이 모두 묘 앞에 모여 제를 지내며 제물은 후손 중에서 만들거나, 묘소를 관리하는 산지기가 있어 재실(齋室)에서 반병(飯餠)과 주찬(酒饌)을 마련하여 집단으로 지낸다.

시제의 경비는 묘에 소속된 전답을 마련하여 그 수확을 가지고 비용으로 쓰고 그곳에서 나온 곡식을 쓰기도 한다. 시제 때는 많은 자손들이 모이는 것이 자랑이며, 묘자리가 명당일수록 후손이 복을 받는다고 하여 묘를 정할 때는 지관(地官)을 불러 좋은 선산을 정하려고 한다. 이는 음택사상(陰宅思想)으로 살아서는 양택(陽宅)으로 좋은 집에서 살고 죽어서도 좋은 땅에 묻혀 지기(地氣)가 발복(發福)하기를 바라는 뜻이다.
 

(2) 안택(성주제)

10월은 신(神)의 달이라 할 정도로 어느 가정이나 길일을 택하여 성주에게 제사를 지낸다.
 

십월(十月)이라 상걁달에

고사성조(告祀成造) 지낼적에

누구를 축원(祝願)할고

(觀燈歌)
 

성주신은 가내의 안녕을 관장하는 신이라고 생각했으므로 특히 정성을 들여 햇곡식으로 술과 떡을 빚고 갖가지 과일을 장만하여 제를 지냈는데 주로 가족의 평안을 기원했다. 이 성주제는 주부에 의해 간략하게 거행되기도 하지만, 부잣집에서나 크게 할 경우에는 무녀들을 불러서 굿을 하기도 한다. 지방에 따라서는 성주제를 성주굿, 성주받이굿, 또는 안택굿이라고 부르며, 고사라고도 한다.

<농가월령가>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술빚고 떡하여라 강신(降神)날 가까왔다

꿀찍어 단자(團子)하고 메밀앗아 국수하소

소잡고 돝잡으니 음식이 풍비(豊備)하다

어와우리 ꟢셩덜도 시루 여 천신

칠셩임게 위샹폁고 셩죠전의 발원폁셰

가쯢안졍 발원이요 鏡연등농 발원이라

흘여 지은농곡 한번곡희 안니할가
 

가정에서 부인이 행하는 성주제는 남편과 가정의 건강て평안て행복을 기원하게 되며 특히 무당을 청하여 떡이나 술을 준비하여 정성껏 빌기도 한다.
 

(3) 오일(午日, 말날)

말날은 한자어로 '오일(午日)'이다. 10월의 말날에는 특별히 말을 위하는 풍속이 있다. 이날이 되면 팥떡을 해서 마굿간 앞에 차려놓고 말의 무병과 건강을 빌었다. 우리 민족은 가축 중에서도 말을 소중히 여겼는데, 옛날에는 교통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력을 농사일에 쓸 수 있고, 또 다른 가축에 비해 영리해서 주인을 잘 따랐으므로 말을 소중히 여기고 제사까지 지낸 당시의 풍속을 이해할만 하다.

말날 중에서도 병오일(丙午日)일 때에는 고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 역시 병(丙)과 병(病)의 음이 같아 말의 병을 꺼린 데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십월(十月)이라 천마일(天馬日)에 이상견영(履霜堅永) 되엿서라

홍안소식(鴻雁消息) 바랏더니 빈대소래 뿐이로다

번개우에 눈물이라 천마일(天馬日)을 모르시나

(思親歌)
 

오일(午日)에 떡을 해서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가족이 모여 함께 먹는데 '마일병(馬日餠)'이라고 한다.
 

(4) 10월 20일(손돌풍)

10월 20일에 관례적으로 불어오는 심한 바람을 '손돌풍(孫乭風)' 또는 '손석풍'이라고 하는데 ≪동국세시기≫와 ≪열양세시기≫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고려시대의 사공 손돌이가 임금이 탄 배를 저어 동진て강화 사이를 가게 되었는데, 풍랑에 밀려 매우 곤란한 지경에 이르자 임금은 다른 뜻이 있다 하여 손돌이의 목을 베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로 이곳을 '손돌목'이라 부르며 이날이면 해마다 으례 강풍이 심하게 부는데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원혼이 바람이 되어 분다고 해서 손돌풍이라 불렀다.

강화도 사람들은 손돌풍이 불 때에는 배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강화도에 들어가는 이 물목에 다리가 놓여서 이러한 이야기도 차츰 희미해지고 있다.
 

(5) 시식(時食)

10월의 시식으로는 별미인 만두국을 들 수 있다. 밀가루를 반죽하여 동글납작하게 만든 다음 고기와 야채를 다져서 넣고 싸서 장국을 끓인다. 때로는 만두국에 밥이나 흰 떡을 썰어 넣어 먹기도 한다.

10월에 가정에서는 강정을 만들어서 간식으로 먹는다. 찹쌀가루를 물과 술에 반죽하여 둥글게 또는 모나게 만들어서 기름에 튀겨 꿀을 발라서 먹는다. 강정은 꿀을 칠한 위에 깨て콩て잣 등을 묻히기도 하는데, 그 묻히는 것에 따라 깨강정て콩강정て잣강정 등으로 명칭이 모두 다르며 慶宴 때에 쓰인다. 또한 이 때에 쑥을 뜯어다 쑥국을 끓여 먹는 것이 별미이다.

10월에 들면 추위가 시작되므로 음식도 뜨거은 것이 환영받는다. 화로에 불을 피우고 전골틀을 올려 놓고 쇠고기て달걀て파て고춧가루て마늘て당근 등의 갖은 양념을 넣고 지져서 먹는데, 이것을 '열구자탕' 또는 '신선로'라고도 한다. 이렇게 먹는 것을 난로회라고 한다. 경연상에는 열구자탕て신선로를 대개 마련한다.

메밀가루로도 만두를 만드는데 채소て파て닭고기て돼지고기て쇠고기て두부로 소를 만들어 싸서 장국에 익혀서 먹는다. 밀가루로 세모나게 만두를 만들어 먹기도 하는데 卞氏만두라 한다. 이것은 변씨가 처음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6) 김장

겨울동안 목을 김치를 한꺼번에 담그는 일을 김장이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김치는 없어서는 안될 가장 일반적인 음식이므로 매우 중요하다.

김장은 입동(立冬)을 전후해서 그 해의 일기에 따라 담그나. 무우て배추가 얼기 전에 해야 한다. '하장동저(夏醬冬菹)'라는 말도 있듯이 김장은 겨울의 부식인데, 재료로는 무우て배추て파て마늘て고추가루て당근て갓て생강て소금 및 각종 젓갈과 조미료가 있으며, 김장의 종류에는 통김치て쌈김치て깍두기て석박지て동치미て젓국지て겉절이て채김치て채깍두기て짠지 등을 들 수가 있다.

김치의 종류나 재료는 생활정도에 따라 혹은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김장은 독에 담아 땅 속에 묻거나 지하실에 저장한다. 배추て무우 등 김장감은 산지에서 자동차로 각 시장에 김장감을 실어와서 김장시장이 열리는 것도 겨울철의 김장을 위한 큰 행사가 되었다.


 

2. 11월
 

11월 중에는 천세력(千歲曆)에 정해 있는 동지(冬至)가 있다. 하지(夏至)는 낮이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은데 비하여 동지는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11월을 가리켜 동짓달이라 할만큼 동지는 세시풍속이 되었는데, <효경설 孝經說>에 의하면 동지삼의(冬至三義)로는 음극지지(陰極之至), 양기시지(陽氣始至), 일행남지(日行南至)라 하였다.
 

(1) 동지(冬至)

① 동지팥죽

동지는 '아세(亞歲)' 또는 '작은설'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옛날에 동지를 삼았던 데서 나온 말이며 민간에서는 흔히 동지팥죽을 먹어야 나이를 한 살 더 먹은 것으로 여겼다. 동짓날에는 어느 가정에서나 팥죽을 쑤어 먹는다. 팥을 으깨거나 채에 걸러서 그 물에다 찹쌀로 단자를 새알만큼씩 만들어서 죽을 쑨다. 이 단자를 '새알심'이라고 한다.

동지팥죽은 먼저 사당에 놓아 차례를 지낸 다음, 방·마루·광 같은데 한 그릇씩 더다 놓으며 대문이나 벽에나 팥죽을 수저로 뿌리고 난 후에 먹는다. 이렇게 하는 것은 팥죽이 액을 막고 잡귀를 없애준다고 믿는 데서 나온 것이다.

팥죽은 이밖에도 화(禍)를 막기 위한 주술로도 쓰이는데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공공(共工)이란 사람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동짓날에 죽어 역귀(疫鬼)가 되었다. 그런데 이 역귀는 팥을 두러워 했으며 동짓날 죽었으므로 이 날 팥죽을 쑤어 귀신을 쫓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이밖에도 팥은 그 색이 붉은 데서 축귀(逐鬼)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정되어 잡귀를 쫓고자 할 때 사용되고 있다.

팥죽은 한자로는 '적두죽(赤豆粥)'이라 하는데 중국의《형초세시기 荊楚歲時記》에도 "동지일작적두죽이양역(冬至日作赤豆粥以禳疫)"이라 하였다. 적두(赤豆)가 벽사와 도신(禱神)에 쓰인 것으로는 그 색채의 원시 신앙관에서 비롯한 것으로 생각된다.

<농가월령가> 11월령과 고시덕담에 나오는 동지에 관한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동지(冬至)는 명일(名日)이라 일양(一陽)이 생(生)하도다

시식(時食)으로 팥죽 쑤어 인리와 즐기리라

새책력(冊曆) 반포(頒布)하니 내년절후(來年節候) 어떠한고

해짤라 덧이 없고 밤길기 지리하다

(농가월령가 11월령)
 

동짓달 한달에 드는 액운은

동짓달이라 동짓날에

팥죽을 많이 끓여를 놓고

동서남북에 끼얹으니

악귀잡귀나 험한 잡귀가

동지팥죽을 뒤집어 쓰고

천리만리나 도망을 가니

이렇게도나 막어를 주오

(고사덕담)
 

② 책력(冊曆)

지금도 연말을 앞두고 책력이 나도는데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 하여 조선시대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동짓날에 다음 해의 달력을 만들어 나라에 올리면 나라에서는 백관(百官)에게 나누어 주었다. 책력은 1년 동안의 절후가 모두 명시되어 있어서 일상생활에 긴요하게 쓰인다. 요즈음 연말에 달력을 선사하는 것도 이러한 풍속에서 유래했다. 서울의 옛 풍속이 단오날의 부채를 관원이 아전에게 나누어 주고, 동지(冬至)날의 달력은 아전이 관원에게 바친다. 그러면 그 관원은 자기 고향의 친지, 묘지기, 소작인(小作人) 등에게 나누어 주었다.

요즘에는 달력이 상업 선전용으로 쓰이고 있으니 예전의 풍속과는 많이 달라졌다.
 

③ 시식(時食)

겨울철 음식으로는 냉면이 있다. 냉면은 메밀로 국수를 하고 김치국물에 무우김치·돼지고기·배·삶은 계란 등을 넣어 먹는데, 차게 먹는 것이 특징이다.

겨울에는 날씨가 추우므로 뜨거운 것을 먹는 것이 상식이나 평안도와 함경도에서는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냉면을 먹는 것을 별미로 알았다. 지금은 냉면을 서울과 그 이남지방에서도 즐겨 먹고 있다.

또한 겨울의 별미로 동치미가 있다. 동치미는 흔히 김장할 때 담그지만 겨울에는 언제든지 담글 수 있다. 무우를 큼직하게 썰어 국물을 많이 넣어 담그는데, 겨울에 온돌방에서 먹는 것이 제격이며 시원한 맛이 그 특징이다. 동치미는 한자로는 동침(冬沈)이라 썼는데, 늦은 봄까지 먹을 수 있다.

또, 곶감을 꿀물이나 설탕물에 담그고 생강·잣·계피가루를 넣어서 차게한 후 먹는 수정과가 있는데, 수정과(水正果)는 경연시(慶宴時)에도 많이 쓰인다.

옛날 동짓날에 청어를 천신(薦新)하는 일도 있었으며 청어는 해주와 통영에서 가장 많이 잡혔다고 한다.

겨울철의 생선으로는 명태가 있는데, 겨울에 동해에서 많이 잡히며 언 것이 동태이다. 동태는 겨울의 식탁에서 중요하며 맛과 탁하지 않고 상쾌한 것이 특징이다. 명태를 말린 북어는 제수용(祭需用)으로 사용된다.

 

3. 12월
 

12월은 섣달이라 하는데 막달이라고도 하여 한 해가 가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한다. 12월은 계동(季冬)으로 소한(小寒)과 대한(大寒)이 들어 있으며 한 해를 마감하는 달로서 세시풍속상 시작과 같이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달의 세시풍속으로는 납일(臘日)과 섣달 그믐날과 제석(除夕)의 행사가 있다.
 

(1) 납일(臘日)

① 납향(臘享)

동지(冬至)로부터 세번째의 미일(未日)을 납일이라고 한다. 납일에는 그해에 지은 농사형편과 여러가지 일에 대하여 신에게 고하는 제사를 납향(臘享)이라고 한다. 납향에 쓰는 고기로는 산돼지와 토끼가 있다. 경기도 산간의 군에서는 옛날부터 대궐에서 납향에 쓸 산돼지를 잡아 진상했다. 그래서 그곳의 수령들은 군민들을 동원해서 산돼지를 잡았다. 그런데 점차 그 폐단이 생기자 정조(正祖)는 장안의 포수를 시켜 용문산(龍門山)과 축령산(祝靈山)에서 사냥을 해서 진상토록 한 일이 ≪동국세시기≫에 기록되어 있다.
 

② 새잡기

납일날 밤에 농촌에서는 새잡기를 하는데 서너명의 청소년들이 한패가 되어 그물을 가지고 어두운 밤에 새가 사는 지붕 추녀를 찾아다니며 새를 잡는다. 그물에 새구멍이 있는 추녀에 대고 막대기로 추녀를 호되게 치면 새가 놀라 나오다가 그물에 걸린다. 또 새가 많이 자는 숲에 가서도 이렇게 해서 잡는다.

납일의 새고기는 맛이 있을 뿐 아니라 아이가 먹으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해서 납일에 새를 잡으려고 애쓴다.
 

③ 납설수(臘雪水)

이날 내린 눈은 약이 된다고 하여 곱게 받아 독에 담아 두기도 한다. 눈 녹은 물을 두었다가 김장독에 넣으면 맛이 변하지 않으며 의류와 책에 바르면 좀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그대로 두었다가 환약을 다릴 때 쓰기도 하고, 그 물로 눈을 씻으면 안질에도 걸리지 않을 뿐 아니라 눈이 밝아진다고 한다.
 

(2) 섣달 그믐날(12월 30일)

12월 말일을 '섣달 그믐'이라 하고, 그믐날 밤을 '제석(除夕)' 또는 '제야(除夜)'라 하는데, 한 해의 마침으로서 연중의 거래관계는 이날에 청산을 하며, 각 가정에서는 새해의 준비와 연중거래의 주고 받는 일고 분주하고, 밤중까지도 빚을 받으러 다니는 이도 있으나, 자정이 지나기만 하면 정월 보름께까지는 독촉하지 않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우리 민요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2월은 막달이라 빚진 사람 졸리는 때

해동(海東)자시 지내고 보니 그달 그믐이 그대로다

복조리는 사라고 하되 임 건지는 조리는 없구나

(임동권, ≪한국민요집≫Ⅰ, 집문당. 1961)

 

① 구세배(舊歲拜)

일년의 마지막 날인 섣달 그믐날 저녁에 사당에 절을 하고 설날 세배하듯 어른에게 절을 하는데, 이를 묵은 세배라고 한다. 1년의 마지막 순간에 이 해도 무사히 다 지나간다는 인사를 드리는 것이며 조상의 산소에 성묘도 한다. 이날 밤에는 늦도록 초롱불을 밝히며 묵은 세배꾼들이 골목김을 누빈다.

2품(品) 이상의 조신(朝臣)과 시종신(侍從臣)들은 대궐에 들어가 묵은 세배를 하고 문안을 드린다. 사대부가(士大夫家)에서는 사당에 참배하고, 연소(年少)한 사람들은 친척어른을 찾아가 묵은 세배를 드렸다.
 

② 세의(歲儀)

세밑(歲末)을 맞이해서 조선시대에 각 지방의 영(營)·주(州)·현(縣)에서는 매년 그 지방의 특산물을 세의(歲儀)로 친척이나 친구에게 보냈다고 한다. 평안병사(平安兵使)와 황해병사(黃海兵使)는 조정의 벼슬아치에게 세의를 보냈다. 세의에는 토산물의 품목을 적은 편지도 함께 보내는 것이 관례이다.

민간에서도 서로 세의를 보냈으며 어른이나 스승·친정 또는 처가에도 닭·계란·軷·과물을 보냈다. 요즘에는 품목이 더욱 다양해져 세의를 적당하게 부담을 주지않는 범위 내에서 하고 있다.
 

③ 사당제(祠堂祭)

섣달 그믐날 저녁에는 가묘(家廟)에 세말(歲末)임을 고하는 제사를 지낸다. 촛불을 밝히고 음식을 차려 놓은 다음 가주(家主) 혼자서 지낸다. 한 해가 무사히 지나고 신년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을 조상에게 알리기 위한 제사이다. 사당을 따로 모시지 않은 집에서는 지내지 않으며, 요즈음은 사당을 짓는 일이 극히 적으므로 사당제도 차츰 사라져 가고 있다.
 

④ 폭죽(爆竹)

제석의 자정 무렵 마당에 불을 태운 후 청죽(靑竹)을 불에 태운다. 그러면 청죽마디가 큰소리를 내며 요란스럽게 타는데 이를 '폭죽' 또는 '대불놓기'라고 한다. 이렇게 하면 묵은해에 집안에 있었던 잡귀들이 놀라서 모두 달아나고 신성하게 신년을 맞이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나라에서도 원일(元日) 새벽에 세포(歲砲)라 해서 방포삼향(放砲三響)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민속적으로 폭죽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대궐에서는 제석 전일부터 대포를 쏘는데 '연종포(年終砲)'라고 한다. 화전(火箭)을 쏘고 징과 북을 울리는 것을 역질(疫疾)과 귀신을 붸는 것이다.
 

⑤ 수세(守歲)

섣달 그믐날 밤은 방·뜰·부엌·문·변소 등 집안 구석구석에 불을 밝혀놓고 밤을 새우는데 이것을 '수세'라 한다. 불을 밝히는 것은 잡귀의 출입을 막는데 있으며 부뚜막·솥 뒤에도 불을 밝히는데, 조왕신은 12월 25일에 말미를 받아 천제(天帝)에게 가서 자기집 1년 동안의 일을 모조리 보고하고 그믐날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한다.

이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고 하여 밤늦도록 윷놀이·옛날이야기·이야기책 일기 등 흥미있는 놀이로 잠자지 않으려고 애쓴다. 혹 잠자는 아이가 있으면 눈썹에 흰가루를 묻혀놓고 이튿날 설날아침에 눈썹이 세었다고 놀려준다.

지금은 이러한 풍속이 거의 사라졌다.
 

⑥ 대청소

섣달 그믐날 주부들이 세찬을 만들 때 남자들은 집안팎 대청소를 한다. 실내청소는 부녀자가, 집주변의 청소는 남자가 한다. 높은 곳은 깎고 얕은 곳은 메우며, 외양간도 치우고 거름도 퍼내서 설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묵은해의 잡귀와 액은 모두 물러가고 신성한 가운데 신년을 맞이하려는 마음의 준비인 것이다.


 

 

4.윤달(閏月)
 

윤달은 평년(平年)에 한 달이 더 있는 달로 1태음년(一太陰年), 즉 음력으로 1년의 길이는 1태양년(一太陽年)보다 짧아서 3태양년이 모이면 윤월 1개, 8태양년에는 윤달 3개를 태음력(太陰曆)에 더해 주어야 계절과 맞아떨어진다. 윤달은 가외의 달이므로 '덤달'·'공달'·'여벌달'이라고도 하는데 무슨 일을 하더라도 탈이 없는 달로 여긴다. 그래서 ≪동국세시기≫에는 이달은 '결혼하기에 좋고 수의(壽衣)를 만드는데 좋다.'고 기록되었다.

또한 사찰을 찾아 불공을 드리면 극락세계로 간다고 하여 윤달만 되면 붐빔다. ≪동국세시기≫에는 봉은사(奉恩寺)의 예를 들었느데, 윤달 든 해에 절에 세번 가면 모든 액이 소멸되고 복이 온다고도 한다.

또한 이달은 '송장을 거꾸로 세워도 탈이 없다.' 하여 묘(墓)룰 손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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