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4대명필의 한 사람인 坦然의 필첩.「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1130년)와 「祭淸平山居士眞樂公之文」(1125년)이 수록되어 있다.「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는 文殊院의 중수기로 撰者는 金富轍이다. 탄연이 중수기의 글씨를 쓴 것은 진락공과의 사승관계와 연관이 깊은데, 비문의 말미에서 탄연은 진락공에 대해 자신을 門人이라 쓰고 있다. 말미의 연기에 따르면, 김부철의 記文을 비석에 새긴 것은 1130년으로 진락공이 사망한지 5년 뒤의 일이다.「祭淸平山居士眞樂公之文」은 1125년 이자현의 문인들이 스승의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 글과 글씨 모두 탄연이 짓고 쓴 것인데, 문수원기와는 달리 필치가 자못 굳건하다.
眞樂은 고려중기의 은자 李資玄(1061~1125)의 諡號이다. 그의 字는 眞靖, 號는 息庵·淸平居士·希夷子, 본관은 인천이다. 명문 仁州李氏 가문에서 태어나 1089년 과거에 급제하여 大樂署丞이 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춘천의 淸平山에 들어가서 아버지가 세운 普賢院을 文殊院으로 고치고 堂과 庵子를 짓고 安貧으로 일관했다. 예종이 여러 차례 조정에 불러 들이려 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방 급제자인 郭璵(1058~1130)가 그를 방문하여 출사를 종용하자 아래의 시를 지어 사양의 의지를 완곡하고도 운치있게 표현하였다.
따스한 기운이 시내와 산에 퍼지니 어느새 봄으로 바뀌어 가는데 홀연이 仙仗을 두른 이가 그윽하게 지내는 이를 찾아왔구나 백이와 숙제가 세상에 숨은 것은 오직 성명을 보존함이었고 후직과 설이 나랏일에 힘쓴 것은 일신을 위함이 아니었네 왕명을 받든 이 마당에 옥패물 소리 요란하구나 어느날 冠을 걸어두고 옷의 먼지를 떨려는가 어찌 마땅히 이 땅에서 함께 지내야만 하겠는가 종래의 불사의 정신을 기르면 될 것을
坦然(1070~1159)은 고려시대의 高僧으로 俗姓은 孫氏, 號는 黙庵이다. 廣明寺의 慧炤國師 鼎賢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132년 大禪師가 되어 국사의 자문에 응하였고, 1146년에는 王師가 되었다. 글씨는 왕희지체의 명서가로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명성이 자자했다. 대표작으로는 문수원중수기 외에도 예천의 복룡사비, 삼각산 승가사중수비 등이 있다. 徐居正도「우리나라의 필법은 신라의 金生이 제일이고, 姚克一·坦然·靈業이 그 다음이다」라고 극찬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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