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유명건축물

[스크랩] 르코르뷔지에의 건축

淸潭 2006. 11. 22. 23:35

 

르코르뷔지에의 건축

 

사람이 살기에 가장 적당한 건물의 크기는 ?

 

스위스 건축가 르코르뷔제 는 성인 남성의 이상적인 키 를 183 cm 로 생각하고 (서양기준) 천장의 높이를 226cm , 난간은 사람이 가장 편하게 느끼는 배꼽높이 113 cm 로 설계했다.

 

르코르뷔지에 는 스위스의 시계 도안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산을 등반하며 숲과 계곡, 산봉우리 를 관찰하던 그는 13세때 장식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스승 레플라트니에 를 만나 건축가의 길로 들어섰다.

학교를 마친뒤 그는 여행을 떠나 유명한 건축가들 밑에서 공부하고 여러도시를 감상

하면서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건축론을 갖게 되었다.

 

 

르코르 뷔지에 의 사보아 주택

 

전쟁으로 붕괴된 프랑스 의 롱샹성당을 재건축할 때 그는 소라 껍데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울뚱불뚱 제 멋대로 생긴것 같지만 어느방향 에서 힘 을 주어도 쉽게 부서지지 않았던 것이다.  곡선으로 건물을 지으면 허물어져 버랄것이라는 건축가들의 조롱 과 염려속에서 그는 묵묵히 지붕과 벽을 곡선으로 처리한 튼튼하고 아름다운 성당을 지어 찬사를 받았다.


 
   롱샹성당 평면도 및 내부 투상도

 



▲르코르뷔지에의 다양한 이미지 스케치

 

2차대전 직후 프랑스가 전쟁 이민자로 북적이자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적은땅에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주택을 지어 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마르세유 에 17층 높이의 아파트 위니테를 건축했다. 콘크리트 골조 위에 건축물을 세워 1층 바닥을 지상에서 8m 들어 올린후 환기와 쓰레기 배출통로로 사용했고 , 옥상에는 아이들을 위한 정원을 만들었다. 또 슈퍼마켓, 정육점, 체육관, 미장원등의 편의시설을 두루 갖추었다.

르코르뷔지에는 건물의 공간과 형태 사람의 움직임에 깊은 관심을 가진 건축가였다.

"주택 은 살기위한 기계", "문제의 핵심은 단순함", 이라고 말한 그는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 동선을 최대한 줄여 방으 배치하고 , 칸막이를 이용해 거실을 여러개의 침실로 나누었으며, 밖을 시원스레 내다볼 수 있도록 창을 가로 로 놓았다.



▲프랑스 동부 한 작은 마을에 위치한 롱샹교회는 2차대전 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현대 교회건축에서 당시 대표적인 건축가 르 꼬르비제에 의해 디자인된 불후의

  명작이다.

 

건축조례를 지키지 않는 그의 건축물은 늘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다.

세상의 평가에 얽메이지 않고 사람의 편안함 만을 생각하며 자연과 인간의 정신을 담아내려 한 르코르뷔제 의 끊임없는 노력은 새로운 건축양식을 개발했으며 현대도시를 존재하게 한 위대한 건축가이다.

 

 

 

Le Corbusier(1987~1965)

 

 

 

 

 

 

 

 

- 르 코르뷔지에

 


  1887년 10월 6일 르 코르뷔지에는 스위스 라쇼드퐁에서 '샤를-에두아르 잔레'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디자이너, 어머니는 음악선생이었다.
  1900년께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했고, 열 여덟 살에 철저히 신양식(유겐트슈틸)의 색체를 지닌 첫 번째 집 '빌라 팔레(1908~1907)를 지었다. 건축 지식은 독학으로 습득한 것이었다.   1908~1911년에 파리에 있는 페레형제 아틀리에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철근 콘크리트 구조를 익혔다.
  1910~1911년에 몇 달 동안 베를린의 페터 베렌스 사무소에서 일했고, 스위스로 돌아와 미술 전문대학에서 강의했다. 그 밖에도 건축 이론에 몰두하여 도시 건설에 대한 책을 썼다.
  1917년에 그는 완전히 파리로 이주했다. 그 곳에서 아메데 오장팡을 알게 되었고 르 코르뷔지에는 그림을 다시 시작했다. 회화는 뒷날 그에게 건축적 해결의 시험장이 된다. 1919년에 오장팡과 <에스프리 누보>를 창간했다. 미적·문화적 문제들을 다룬 잡지였다.
  1922년에 그는 사촌 피에르 잔레와 함께 건축 사무소를 열었다. 1927년에 두 사람은 바이센호프 주택단지에 두 채의 주택을 건설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뿐만 아니라 건물 내부의 물건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다. 그가 설계한 가장 유명한 가구는 1928년에 나온 소파이다.
  1942~1948년에 르 코르뷔지에는 인체의 비율을 건축의 척도로 삼는 '모듈(Modulor)'이론을 발전시켰다. 제 2차 대전 이후에는 마르세유에서 집합주택(위니테 다비타시옹)건설 주문을 받았다. 그는 도시 개혁 계획들을 만들어 냈는데 그 것은 과격성으로 인해 오직 일부만 실현되었다. 인도에서 도시 전체를 계획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고,   1950년대에 그는 롱샹 순례자 교회 건설로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 1957년에는 도미니크 수도원과 취리히 박람회 관을 설계했다.
  르 코르 뷔지에는 1965년 8월 27일 오전에 지중해 마르탱 갑 근처에서 물에 빠져죽었다. 그가 일부러 태양을 향 해 헤엄쳐 나갔다고 전해진다.

  "만약 건축가로서 내 작품에 약간의 의미를 인정한다면, 나는 이것이 심오한 가치에 공헌해야 할 눈에 띄지 않는 수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 Le Corbusier, 1948


- 화가와 디자이너로서의 코르뷔지에

  르 코르뷔지에로 알려진 샤를-에두아르 잔레는 건축가로서 뿐만 아니라 화가와 디자이너로도 활동했다.
  1910년, 몇 달 동안 페터 베렌스의 작업장에서 일하면서, 독일공작연맹 회원들과 뒷날 바우하우스를 창설 하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그는 1908년에 나온 아돌프 로스의 「장식과 범죄」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 책에서 로스는 통합 예술품이라는 신양식의 사고를 조롱했다. 1918년, 르 코르뷔지에는 파리에서 화가 아메데 오장팡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공동으로 전시회를 열고, '큐비즘 이후'라는 제목의 선언서를 발간했다. 이 선언서에서 그들은 큐비즘을, 넘어서야 할 유행 사조라고 칭했고, 그 대신 순수주의를 주장했다.
  저서「오늘날의 장식미술」에서 르 코르뷔지에는 모든 종류의 장식에 대해 확고하게 등을 돌렸다. 나아가 대량 생산의 시대에 '장식이란 질의 결핍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생산 방식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신즉물주의는 개별적인 가구가 아니라 표준화된 시리즈 생산품을 요구했다.
  강철관은 미래의 자재로 여겨졌다. 마르크 브로이어는 1928년까지 강철관 가구의 완벽한 목록을 만들어냈다. 독 일에서 토네트 사가 이것을 시리즈로 제작했다.
  토네트 사는 처음에 르 코르뷔지에의 강철관 가구 생산품도 받아들였다. 아마도 이 회사의 프랑스 자회사가 피에 르 잔레, 샤를로트 페리앙과 함께 르 코르뷔지에가 1929년 파리 가을 전시회에 내놓은 견본들을 제작했던 것 같다. 그 중에는 안락의자 Lo2, 그리고 시대 감각에 맞춰 모피로 감싼 긴 의자 LC4 등도 있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이 가구 들을 자신이 설계한 개인 주택의 내부 설비에 사용했다. 푸아시에 있는 사부아 저택도 그중 하나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초기 창작 단계에 주로 가구 디자인에 몰두했으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가장 유명한 것들은 1971년 이후로 이탈리아 카시나 사가 독점으로 제작하고 있다. 이들은 표준화된 대량 생산품으로는 맞지 않 는다. 모든 가구는 독자적인 시리즈 번호를 달고 있으며 도장이 박혀있다. 시장에서 나도는 라이센스 없는 목제품 과 차별화 하기 위해서이다.

- 발췌 : 클라시커50 20세기 건축 - 크리스티나 하베를리크 지음(안인희 옮김) 


 - Le Corbusier(1887-1965)

  건축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한다. 원시시대 비, 바람을 피해 동굴이나 나무 밑을 찾던 인간이 Shelter를 만든이후로 항상 건축은 그 당시 인간들의 삶의 모습대로 만들어져 왔다. 이러한 건축의 역사는 근대와 현대라고 하는 시,공간의 연속선상에서 현대를 사는 인간들의 모습을 담는 그릇의 모양을 스케치해 준 인물로 한 사람의 건축가 Le Corbusier를 이야기하게 한다.


 - 자연의 질서를 건축위에 재구성

  르 꼬르뷔제는 스위스의 북쪽 라쇼드퐁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샤를르 에 두아르 쟌느레이다.
  1917년 30세 때부터 파리에서의 건축생활을 통하여 프랑스 건축가가 된 동시에 르 꼬르뷔제라는 이름을 전세계에 남기게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등산애호가인 동시에 아마추어 식물학자인 아버지와 레플라토니 선생님의 영향으로 자연에 친숙해지고 그로 인해 자연의 질서를 배우게 되었고, 그것을 인간적 질서에 의한 기하학적 관계로 건축위에 재구성하였다.
  그의 건축물에는 우리가 흔히 '손을 올린 인간'이라고 부르는 형태를 볼수 있다. 이 '손을 올린 인간'은 르 꼬르뷔제가 황금비와 인체를 결합한 모듈의 원리를 건축에 적용하여 사용한 것으로 그는 모듈화한 인체를 기준치수로 한 인간을 위한 건축을 의도하였다.
  마르세이유에 있는 집합주택인 유니떼 따비따시옹은 인체모듈 사용의 시험작품으로 내부의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두 황금비를 적용하여 인체와 비례적 조화를 이루도록 계획하였다. 이 건물은 길이 140M, 높이 70M의 거대한 크기이지만 인간적 모듈에 의해 계획되어 인간적인 이미지를 느끼게 해주는 건축물이다.



- 근대건축의 5원칙

  1929년에 완성된 사보이주택은 이제까지 그의 설계방법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로서, 철근 콘크리트에 의해 가능해지는 도미노시스템을 근거로 근대건축의 5원칙을 완성하게 되었다.
  근대건축의 5원칙은 피로티, 옥상정원, 자유로운 평면 구성, 가로의 긴창, 자유로운 파사드로서 19세기 파리의 답답한 석조시가지 주택의 일반적인 개념을 뒤엎는 건축을 구성할 수 있었다.
  사보이 주택은 그가 24세때, 동방여행중에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서 받은 충격의 장면을 사보이 주택에 전하게 되었고, 그것을 백색의 건축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롱샹 예배당은 스승인 레플라토니와 약속한 "자연을 기리는 기념비를 만드는 일에 일생의 목적을 바치는 것"이 구체화된 작품이다. 1955년에 완성된 롱샹교회는 빛의 형상과 비례의 유희를 잘 보여주는 작은 순례을 위한 예배당이다. 이 예배당은 언덕 위에 건물을 얹은 비정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기도하는 손이나 수녀의 머리모자를 연상할 수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예배당은 성모마리아에 대한 예배와 1년에 두번, 만 이천 명이 이 언덕에 올라 기도를 올리는 순례자를 위한 예배당으로 그리스 신전과 같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평지위에서 제식이 이루어지는 형식의, 열린 옥외의 장과 티볼리의 고대 로마 동굴과 같은 침묵의 기도를 드리는 내부공간으로 이어져 있다.

출처 : inluce
글쓴이 : 빛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