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세상사는 이야기

추석이 슬픈 이웃들

淸潭 2006. 9. 23. 15:45

[추석이 슬픈 이웃들] “할머니 울지마”

 

현정이네 여섯 숟가락
엄마·아빠 떠나고 외할아버지마저… “동생들 생일·명절이 제일 싫어요”

세간이 없는 방 안에 책상이 하나 있었다. 큰오빠 정민(이하 가명·14·중2)이의 책상이다. “책상은 오빠가 쓰고요, 저는 식탁에서 공부하면 돼요.” 여동생 현정이가 말했다. 아홉 살 여자애가 의젓하다. 함께 사는 사촌오빠 정혁(12·초등학교 6년)이도 자기 책상이 없다. 현정이 아래에 정수(5)와 두 살배기 민희도 함께 산다. 벽에는 정수랑 민희가 그려놓은 낙서가 새카맣다.
 

현정이는 돈이 없어 속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학교에서 카드 만들 때, 스티커 꾸미는 거 할 때요, 선생님이 다음부터 준비물 안 챙겨오면 맞는다고 그랬어요. 근데 왜 안 갖고 왔는지 말 안 했어요. 창피하니까. 할머니한테 말하면 할머니 또 돈 없다고 우니까.” 외할머니(68)에겐 이런 일들이 모두 비밀이다.
 

정민이의 꿈은 요리사다. 요리가 재미있다. 사연이 있다. 정민이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할머니와 살았다. 아빠는 3년 전 갑자기 연락이 끊겼다. 그 뒤 엄마마저 2년 전 막내 민희를 낳고선 종적을 감췄다. 경비일을 하던 외할아버지마저 하늘나라로 떠났다. 청천벽력이었다.
 

“2년 전 어미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엄마, 방 한 칸이라도 얻으면 내가 애들 데려갈게’라고. 그러곤 끝이었어요. 그래서 동사무소에 가서 울었어요.” 할머니는 친딸의 호적을 말소시켜 버렸다. 친부모 호적이 남아 있으면 혜택을 받을 길이 없다. 동사무소에서는 아이들을 모두 정부보조금 대상자로 선정해줬다.
 

정민이는 그때부터 수시로 밥상을 차렸다. 할머니가 아픈 날이면 어김없다. 초등학교 때 시작한 상차림. 그래서 정민이는 요리가 재미있다. 요리사의 꿈, 그리 되었다. 나른한 가을 볕이 내리쬐는 인천시 부평구 삼산동의 24평짜리 아파트. 방 3개에 여섯 식구가 모여 사는 이 둥지에서는 열네 살 남자애가 밥상을 차리고, 더 어린 초등학생이 또 더 어린 두 살짜리 아기를 돌본다.
 

그런데 노구의 할머니에겐 힘이 없다. 올해 3월부터 매달 받고 있는 정부 보조금 80만원으로 여섯 가족이 먹고 자고 입는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평생 모아 장만한 이 집도 은행 빚 6000만원 때문에 팔아야 할 지경”이라고 했다.
 

이 여섯 가족에게도 추석은 어김없이 다가왔다. “무슨 무슨 날, 이런 거 진짜 싫어요. 동생들 생일이나 명절 같은 거….” 정민이의 목소리에 힘이 없다. 현정이가 말했다. “제 소원은요, 엄마 없이도 잘사는 거예요. 아, 또 있다. 전화비 걱정 안 하는 거.” 이때 큰오빠 정민이가 기자의 귀에 들릴락말락하는 목소리로 이렇게 소곤거렸다. “25일이 민희 생일이에요. 이번 추석 때 민희에게 엄마 얼굴을 한 번 보게 해 줄 수는 없을까요….”

 

인천=허윤희기자 ostinat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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