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은 한국인 손에 죽었다 (펌)
<브레이크뉴스>
조영환 칼럼니스트
생명공학 死活게임, 황우석 죽고 섀튼 살고! 실리가 더 유리
“황우석은 죽이고, 섀튼은 살리고!” 이것이 조선일보를 비롯,
2월 13일자 한국 신문들의 홈페이지에 게재된 주요 기사의 제목이다.
‘황우석은 죽이고 섀튼은 살리는 것’이 세계 생명공학계가 벌이는,
진실게임의 장막 뒤에 숨은 생존게임의 선명한 공식이다
.
한국은 황우석 논문조작 관련 한국인들을 온 국가가 달려들어서,
철저하게 죽였고,
미국은 황우석 논문조작의 책임저자인 제럴드 섀튼을,
쥐 죽은 듯이 침묵하고 있다가 면죄부를 주면서 살려주었다.
이것이 국익을 고려하는 판단력에 있어서,
미국과 한국의 극복할 수 없는 수준차이다.
황우석 교수팀의 2005년도 사이언스지의 논문의 책임저자로 알려진,
제럴드 섀튼 교수의 부정행위를 조사해온 미국 피츠버그대학은,
“부적절한 행동은 했지만 과학적 부정은 저지르지 않았다”고 밝히면서,
섀튼에게 중징계를 내리지 않을 태세다.
피츠버그대학은 ‘섀튼 살리기’ 차원에서 징계수위를 낮췄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섀튼의 종신교수 및 연구원 지위는 유지 된다”고 밝혔다.
황우석 교수는 사법처리를 받을 위기에 처해 있지만,
섀튼 교수는 사실상 면죄부를 받은 것 같다.
공동저자인 황우석이 죽고,
책임저자인 섀튼이 살아남는다는 사실은,
미국이 국제사회의 이익게임에서 얼마나 유능한지를 잘 증명한다.
피츠버그대학은 섀튼이 2004년 논문심사 기간에,
사이언스지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논문 통과를 로비했고,
기자회견 참석 사례비로 4만 달러를 받은 점 등을 ‘부적절한 행동’으로 꼽았다.
그러나 실수는 있으나 범죄는 없다고 피츠버그대학이 감싸줌으로써,
섀튼은 범죄자로 낙인찍힌 황우석과는 다른 운명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섀튼은 피츠버그대학의 조사위에서,
자신이 논문 작성을 주도했다고 밝혔고 4만 달러를 받기도 자백했지만,
당초 미국을 잘 모르는 한국의 언론들이 예측한 바와는 달리,
교수직 박탈 등의 중징계를 피츠버그대학은 섀튼에게 내리지 않았다.
한국의 언론과 학계와 검찰로부터,
범죄자 선고를 받은 황우석 교수의 운명과는 달리,
같은 분야의 경쟁자인 황우석을 제거한 섀튼의 장래는,
더욱더 편안하게 생명공학계를 주도하게 생겼다.
명분추구에 투철한 한국 학계와 언론계의 ‘정의로운 심판’으로,
황우석이 제거된 반면에,
이익추구에 투철한 미국 학계와 언론계의 비호 하에 섀튼은,
승승장구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최근 섀튼 연구팀은 박을순 연구원이 참여한 가운데,
황우석 팀의 기술인 ‘체세포 핵치환 방식’을 이용하여,
원숭이 배아줄기세포를 수립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러한 피츠버그대학의 철저한 ‘섀튼 보호’를 한국의 주류 언론들은,
‘섀튼 봐주기’라고 뒤늦게 트집 잡으면서 뒷북치고 있다.
피츠버그대학이 섀튼을 보호하고,
미국의 학계와 언론이 섀튼을 비호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필자가 지난해 11월 말 브레이크뉴스에서 지적했듯이,
섀튼의 임상실험용 알바였던 황우석이 한국인의 손으로 제거되는 것은,
섀튼의 고차원적 작업일 가능성도 있다.
황우석이 생명공학계에 부상하고 침몰하는 전 과정은,
섀튼의 손끝에 달려있었던 것이다.
섀튼의 신호에 따라 전 세계의 언론과 한국의 언론은,
한국인들을 내몰아 황우석 죽이기에 몰두시켰다.
결국 섀튼은 황우석 팀이 성취한 노하우를 빼간 뒤에,
성공적으로 황우석을 폐기처분 시키고 한국의 생명공학을 후퇴시키도록 하였다.
한국 검찰의 많은 노력도 결과적으로 황우석 죽이기에 불과하다.
국제경쟁 속에서 한국 언론들이,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 과학, 산업, 금융 분야들을 다루는 수준은,
너무나 조악하고 반국익적이다.
한국사회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한국 언론들의 논조는,
심지어 조직적으로 매국적이다.
한국의 학계나 법조계도 한국의 국익에 반한 판단과 행태를 너무 자주 보여준다.
한국의 학계, 법조계, 언론계의 행태들을 관찰해보면,
이들 분야의 종사자들은 외국의 약탈을 위해 존재하는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과거 극우 정권의 군부가,
과연 한국의 국익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지 의심이 들었던 것처럼,
지금은 좌파 정권의 비호를 받는 시민단체, 언론인, 학자들이,
과연 한국의 국익을 고려하고 행동하는지 의심이 든다.
한국의 지도층이나 식자들이,
국제사회의 이익게임에서 한국의 국익을 제대로 챙기면서 사고하지 못하는,
근원적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한국에서 인문사회분야의 인재 양성과,
채용에 문제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국의 인문사회 교육은 병들어 있다.
고시공부를 하는 것과 토플공부를 하는 것이 한국 대학교육의 핵심이 아닌가?
고시공부와 토플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험악한 국제사회의,
권익게임에 보탬이 되는 패러다임과 사례를 제대로 습득할 수가 없다.
세계화시대에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세계의 역사의 잔혹한 현실을 공부해야 할 대학시절에,
암기위주의 고시공부와 토플공부를 하는 한국에서 어떻게 국제정치현장에서,
정상적인 게임을 할 인재가 배출되겠는가?
한국사회의 정치를 망치는 두 가지 요인은,
바로 병든 고시제도와 학생운동이다.
먼저 인문분야에서 고시에 합격한 자들이,
한국의 정치와 경제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되는 구도가 계속되는 한,
늘 국제사회의 희생양이나 되어야 할 수준의 역량을 가진 지도자들이,
한국사회를 지배할 것이다.
그리고 대학시절에 세계의 역사나 현실에 대한 공부를 완전히 포기한,
운동권들이 정치세력의 주류를 형성하는 한국에서,
어떻게 국제사회의 냉혹한 정치게임에 응전할 지식과 배짱을 갖춘,
정치지도자들이 지배하겠는가?
민주투사들은 온갖 지식과 정보와 경험이 허용된 대학시절을,
정치종교에 빠져서 낭비한 자들이고,
고시공부에 몰두하는 자들은 몇 권의 책을 외우다가 다양한 세상의 지식을,
포기한 자들이 아닌가.
한국에서 고시열풍과 학생운동은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도록,
허용한 소중한 대학시절을 앗아가는 망국적인 현상이다.
고시제도와 학생운동의 양대 통과의식을 거쳐서,
한국의 정치인들은 지도자로 등장해왔다.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이 되기 위한 두 가지 코스인,
고시제도와 학생운동은 거시적으로 보면,
한국의 정치를 망치는 폐습에 불과하다.
학생운동과 고시제도는 세계화된 한국의 정치경제구조에서 벌어지는,
동물세계의 게임들을 리얼리스틱하게 대처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이다.
미국의 정치인들은 정치적 현실주의(political realism)를 철저하게 배운다.
미국 대학들에서,
정치적 현실주의를 가르치는 것이 유행이라는 한국 언론의 보도는 옳다.
미국의 명문대학들은 정치윤리를 가르치면서,
마키아벨리, 홉스, 니체 같은 정치적 현실주의자들을 주로 다룬다.
집단 간에 무자비하게 충돌되는 국제정치의 권익쟁탈전을,
미국의 대학들은 그대로 가르친다.
이 세상의 갈등은 피도 눈물도 없는 동물의 세계라고 가르침으로써,
이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국가 간의 갈등에서 명분있게 죽는 것보다 실리있게 사는 것이 유리하다.
집단이나 국가 간의 갈등에서,
미국은 이익을 최우선 명분으로 삼는다. 국익을 위해서 못할 일이 없다.
그런데 한국은 집단 간이나 국가 간의 갈등을,
개인 간의 갈등과 잘 구별 짓지 못하는 수준의 정치를 하는 나라다.
황우석과 섀튼이 벌이는 갈등은,
이미 진실게임이 아니라 국가 간의 이익다툼이다.
황우석이 과학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 손 치더라도,
새튼이 촉발한 국제분쟁에서 한국의 언론계와 학계와 법조계는,
한국의 국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만 했었다.
그래서 새튼이 숨죽이고 시간을 벌면서,
황우석이 먼저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기다린 것처럼,
한국도 신중하고 고요하게 황우석 문제를 다루어야 했었다.
황우석이 다 망가지고 한국의 생명공학이 다 망가진 뒤에,
진실이 밝혀지면 한국에 무슨 이익과 소용이 있단 말인가?
엄청난 국익과 국가의 위신이 걸린 한국 생명공학의 장래를,
한국의 언론, 학계, 법조계, 시민단체 등은 너무나 미숙하고 유치하게 다루었다.
국가와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면서, 다양한 변수들을 무시하지 않고,
이 세상은 정글이라는 현실주의의 시각으로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을,
신중하게 다루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섀튼의 건재를 바라모면 볼수록 더 뼈저리게 다가온다.
황우석이 충분히 범죄자가 되고 한국의 체면과 생명공학이 다 망가진 순간에,
섀튼의 범죄에 대한 면책 소식이 유유히 들려온다.
이것이 식민지적 한국과 제국 미국의 건널 수 없는 통치력의 차이다.
한국인 황우석은 한국인들의 손으로 쳐죽였는데,
미국인 섀튼은 미국인들의 손으로 보호받는 현실 앞에,
피식민지적 국가와 식민통치적 국가의 통치술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죽어가는 황우석과 살아나는 섀튼이 보여주는,
국제사회의 냉혹하고 교활한 게임을 보면서,
왠지 학생운동과 고시열풍에 찌든 맹한 지도자들과,
국가의 이익을 계산하지 못하는 멍한 언론인들이 생각난다.
박정희, 김운용, 김우중, 황우석을 도덕과 정의와 진리의 이름으로 제거하고,
그들의 무덤에 꽃을 바친들 무슨 이익과 소용이 있는가?
이 세상은 도덕군자들의 풍류마당이 아니라,
시정잡배들의 아수라장이다.
황우석이 완전히 죽은 순간에 섀튼은 완전히 살아난다.
이것이 한국을 둘러싼 국제적 현실의 선명한 상징이다.
2006.02.14 14:04:35
-조선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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