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의 마음에 상처 안주는 게 정치"
세상살이가 아무리 어려워도
내세가 금생보다 행복할순 없어
믿음에 뿌리없이 기복신앙 흘러
十方同共聚(시방동공취) 온 천지에서 모여든 수좌들이
箇箇學無爲(개개학무위) 모두 제가끔 무위를 배우도다
此是選佛場(차시선불장) 여기는 부처 뽑는 과거장이니
心空及第歸(심공급제귀) 마음 비워 급제해 돌아가노라
참선도량을 부처를 뽑는 과거장에 비유한 당 나라 때 방거사(龐居士ㆍ?~785)의 깨달음의 노래다. 방거사는 비록 삭발을 하지 않았지만 중국 선종사에 남을 만큼 내로라 하는 선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재가불자였다.
지혜의 화신 독수리가 날개를 편 자태라 하여 이름 붙여진 경남 양산의 영축산(靈鷲山), 그 넉넉한 품안의 통도사 영축총림에는 범부를 부처로 거듭나게 하는 선원이 3개나 있다. 이름하여 극락, 무위, 보광선원이니 통도사는 가히 선불장이나 다름 없다. 지금은 하안거(夏安居), 속인의 출입이 원칙상 금지된 결제(結制) 기간에 주지 현문(玄門) 스님의 배려로 천진(天眞ㆍ57) 선원장을 찾았다.
“수행자가 구도의 결심에 더욱 채찍질을 가하는 시기가 안거, 즉 결제기간입니다. 승가의 결제 의미가 깨달음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회에 환원하는
데 있다면 세상살이의 결제 의미는 의식주의 해결에 있다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수행자가 아니더라도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ㆍ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의 마음이 곁들여진 삶이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습니다.” 선문의 살림살이 기준인 ‘백장청규(白丈淸規)’를 앞세운 까닭이 있을 터. 바로 땀의 소중함이다.
백장청규의 특징은 노동에 있고 보청(普請)의 규칙이 따른다. 모두가 힘을 내어 함께 일하는 공동체 정신이 보청인데 이 말은 지금도 건설현장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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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가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결코 내세가 금생보다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어려움을 참고 감수하면서 살아가는 게 세상살이의 작은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도 아무리 소원을 빌어도 안 될 것은 안 되게 돼 있다고 말했지요. 마음 안팎으로 쉬어야 행복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쉬라는 얘기는 받아들이라는, 다시 말해 감수하라는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상을 사바세계(娑婆世界)라 부른다.
온갖 어려움으로 가득찬 세상이라는 의미다. 고통의 바다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인간관계의 한 매듭이 우리의 정체다. 그러니 참고 살아가는 감인(堪忍)의 자세가 무엇보다 우선한다.
“물질을 베풀다 보면 마음까지 저절로 따라갑니다. 보시를 하더라도 그대가 있음으로 인해 내가 베풀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니 얼마나 행복한가, 그런 마음이 중요합니다. 미얀마를 여행하다가 하루는 어떤 사람이 걸인에게 돈을 준 뒤 다시 합장을 하고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가슴이 뭉클해져 안내인에게 물었더니 ‘베풀 기회를 주어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한 것이라고 설명하더군요. 주는 사람이 오히려 받는 이보다 더욱 겸손하고 정성스러운 자세를 갖고 있었습니다.” 최상의 보시가 무주상(無住相)보시다.
준다는 생각 그 자체도 여읜 무주상보시의 경지를 스님은 말하고 있다. 그러기는커녕 감사하는 마음마저 사라지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라고 스님은 안타까워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충만한 사회에선 갈등관계의 인과가 성립되기 어렵다.
부처는 바람직한 삶의 길로 사섭법(四攝法)을 가르쳤다.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 남에게 베풀고(보시), 고운 말을 쓰고(애어), 남을 돕고(이행) 살아가는 게 인간의 도리遮?것이다. 서로 돕고 힘을 모으다 보면 살기 좋은 공동체를 가꾸는 협력(동사)이 가능해진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데 대다수 국민은 비빌 언덕조차 없는 것 같습니다. 가진 사람들이 단돈 10원이라도 보시한다는 마음을 갖는다면 국민들이 그렇게 허탈해 하겠습니까. 전부는 아니겠지만 소위 지도층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행태는 참으로 부끄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선(善)의 의지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가진 사람일수록 세금을 한 푼이라도 덜 내려고 온갖 편법을 동원하고 자식 군대 보내지 않으려고 국적 포기에 앞장서는 게 우리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입니다.” 스님은 이런 제안을 한다.
우선 고위 공직자만이라도 지하철이나 버스로 출퇴근을 하라고. 그러한 사소한 변화가 국민에게 희망을 불어넣는다는 소박한 생각이다. 부처는 중생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는, 불상중생(不傷衆生)의 정치를 강조했다. 더불어 남을 이끄는 사람은 반드시 염치가 있어야 한다. 염치가 없으면 악을 보지 못한다.
“옛 스승들은 결제기간을 특히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절대 산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지요. 목욕을 해도 같이 하셨고…. 수좌들과 한 치도 다름 없는 수행을 했습니다. 특권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대들과 같은 젊은 수좌들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존재할 수 있으랴, 그런 생각을 늘 잊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분들은 불교도 좋고 기독교도 좋으니, 종교에 대해 조금이라도 올바른 인식을 가져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처 역시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다. 다만 용심(用心), 마음을 쓰는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부처는 모든 이를 부처로 보았다.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바로 용심에 있다. 스님의 안타까움은 종교로 옮겨간다.
“뿌리 없는 믿음으로 흐르다 보니 기복신앙이 극성을 부리고 있지요. 절집에만 국한하자면 그 대표적인 예로 입시불공을 들 수 있겠습니다. 신앙은 여가의 선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가 없다면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종교가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종교의 사회적 헌신을 말하는 것이다. 수행은 자타의 분별을 뛰어넘는 자기 헌신이다. 천진 스님의 말과 몸짓에서는 자기 헌신이 밴 산승의 내음이 물씬하다.
“영축산에 녹음이 방초하니 계곡에는 새들이 운다.” 이 게송의 참 뜻을 헤아려 보라는 숙제와 함께 대화는 끝났다. 굳이 사족을 달자면, ‘여시여시 여여부동(如是如是 如如不動)’의 의미가 아닐까.
설령 본 뜻에서 한참 빗나갈지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변함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이 여시여시 여여부동이다. 진실한 모습을 잘못 보고 왜곡하는 데서 모든 문제가 생긴다. 그러니 서로를 긍정하고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 또한 여시의 경지일 것이다. ‘山是山(산시산) 水是水(수시수)로다!’
● 천진 스님은
"수좌는 이 화두만 갖고 한 평생을 지내게. 다른 짓 하면 동서는 10만리요, 남북이 8,000리나 어긋나는 것이네." 근대의 선지식 경봉(鏡峰) 선사는 천진 스님에게 '무(無)자' 화두를 내리면서 그렇게 당부했다. 기필코 화두의 관문을 뚫고 한 소식을 들으라는 격려였다. 천진 스님은 그 당부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이젠 어딜 가도 중 노릇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스승님들의 은덕입니다." 통도사의 가풍을 확립한 구하(九河) 경봉 월하(月下) 선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성철(性徹) 서암(西庵) 같은 수승한 선지식도 스님에게는 자비의 나룻배가 되어 주었다. 스님의 수행관은 식념망려(息念忘慮)의 네 글자에 고스란히 압축돼 있다. 생각을 쉬고 격정을 잊다 보면 참마음이 오롯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스님은 고작 열한 살 때 먹물 옷을 입었으니 그야말로 동진출가를 한 셈이다. 출가은사는 대휘(大徽) 스님이다. 고향이 김해인 스님은 어머니의 원력으로 불문에 귀의하게 됐다.
은사 스님이 통도사 주지로 임명되는 바람에 큰 절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함께 통도사로 가겠다고 졸랐지만 은사는 나이가 너무 어려 강원에서 공부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만류했다.
거듭된 제자의 간청에 은사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강원을 마치지 못하면 상좌를 삼지 않겠다고. 천진 스님은 그 조건을 다부지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8년간 강원에서 경을 보았다. 강원을 마치기가 무섭게 소임을 마다하고 전국의 선방을 찾아 마음밭을 경작했다.
하루 두 끼로 사는 오후불식을 30년
넘게 실천하고 있는 천진 병纛?
“행복은 기준이 없고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질의 힘을 앞세우는 사람에게
세상을 다 준다 한들 만족하겠습니까”
라고 말한다.
양산=최종욱기자
(한국일보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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