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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철학(1) 사랑한다는 것은?

淸潭 2024. 12. 4. 20:42

사랑의 철학

이 글은 여러 해 전에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에서 기획한 글 중에 제가 발췌한 글입니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어려움과 고통을 겪게 되는데,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감정적 기제로 가장 흔하게 떠올리는 것이 '사랑'1)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간혹 사랑에 관한 질문을 던져보곤 한다.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처음에는 한순간 당혹스러워하다가 돌연히 태도를 바꾸어 불만을 터뜨리는 이들이 있다. "나는 사랑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애인 좀 없다고 짐승 취급하기냐?" "사랑을 해보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무언가가 결핍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이야!" 이런 대답을 들으면 내 마음속에 반문이 생겨난다. '도대체 이들은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기에 이런 식으로 반응하지? 살면서 조금이라도 사랑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 일이야?'

사람들이 당혹스러워하거나 심지어 불쾌해하는 것은 사랑의 양태 중에서 오직 하나, '남녀 간의 사랑'만을 머릿속에 떠올리기 때문이다. 남녀 간의 사랑은 그만큼 중요하며 알게 모르게 삶의 전 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므로, 흔히들 '사랑' 하면 이성애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부모도 사랑하고, 형제도 사랑하고, 자식, 선생님, 친구, 직장 상사, 절대자 등도 사랑한다. 때로는 강아지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장미꽃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으며, 금강산의 절경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 사랑의 대상은 이렇듯 무궁무진하다.

사랑의 대상이 다양하다면, 그로 인해 생겨나는 사랑의 양태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이 중에서 배우자나 애인처럼 남녀 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은 무엇보다도 '서로에 대한 육체적 결합 욕구'를 동반한다. 그래서 남녀 간의 이성애적 사랑은 '성적 사랑'이다. 소위 '육체적 사랑'이나 '감각적 사랑'과 동일시되는 성적 사랑은 '에로스(Eros)'라 일컬어진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 영화는 에로틱하다" "그 소설은 에로티시즘의 정수야" "에로틱한 자세를 취해봐"라는 말을 가볍게 사용하곤 하는데, 그 말들은 '성적 사랑' '감각적 사랑'으로 이해되는 '에로스'의 변화형이다. 그러므로 성적 사랑은 에로틱한 사랑(erotic love)이다.

물론 에로스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한 고대 철학자 '플라톤'이 서술하는 에로스의 '의미'와 에로스에 대해서 내리는 '가치 평가'에 따르면, 에로스는 보다 더 심층적인 측면을 지닌다. 그러므로 '성적 사랑'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에로스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편협하고 조잡한 이해이다.2)

플라톤의 『향연』에서 에로스는 기본적으로 '사랑의 신'을 의미하며, 이와 동시에 '가장 오래된 신'이면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의 근원이 되는 신'3)으로 정의된다. '에로스 신'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어떻게 해서 탄생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고대 문헌마다 각기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가장 오래된 신'이라는 정의부터 다시 고찰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따라서 플라톤의 설명을 연대기적으로 절대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철학자의 관점에서 에로스에 대한 근간을 마련하고, 철학사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다른 문헌이 아니라 플라톤의 문헌이기 때문에 플라톤에게서 '사랑'의 개념과 관련된 통찰력을 얻어낼 수 있다.


플라톤은 에로스를 아프로디테의 생일과 연관지어 설명한다. 신들의 제왕인 제우스가 어느 날 지혜와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를 딸로 얻게 된다. 제우스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그녀의 탄생일에 신들을 모두 초청하여 잔치를 벌인다. 이때 '풍요의 신' 포로스(Poros)와 '빈곤의 여신' 페니아(Penia)도 초대를 받는다. 페니아 여신은–비록 잔치에 초대를 받아 풍부한 술과 음식을 즐기면서 흥겹게 놀기는 하지만– 언제나 배고픔과 궁핍에 시달려왔다. 그래서 그녀는 잔치를 즐기면서도, 동시에 '어떻게 하면 이 계속되는 궁핍을 타개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심한다. 그러다가 게걸스럽게 술과 음식을 먹고서 정신없이 잠들어 있는 포로스를 발견하고서 그 옆에 살며시 눕는다. 이로 인해 잉태된 것이 '에로스'이다.

에로스는 남신 포로스와 여신 페니아의 자식이기 때문에, 두 신에게서 드러나는 특징을 모두 지닌다. 때로는 아버지 포로스처럼 모든 것이 풍요롭고 먹을 것이 흘러넘치며, 성격 또한 활달하고 저돌적이며 게걸스럽고 열정적이다. 그러나 때로는 어머니 페니아처럼 풍요가 밑 빠진 독의 물과 같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려서 배고프고 빈곤하며, 그래서 초라하고 우울한 성격이 나타난다. 에로스의 삶 속에서는 이처럼 극단적 풍요와 극단적 빈곤이 끊임없이 반복되며, 이 둘의 극단적 간극 때문에 생겨나는 변화무쌍함, 허탈함, 공허감이 지속적으로 펼쳐진다.


에로스는 극단적 간극을 야기하는 풍요와 빈곤을 알고 있으므로 (양자를 비교하면서) 사라져버린 풍요를 갈망하고, 빈곤한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그 속에서 에로스는 결핍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또한 그 결핍을 만회하려고 하는 욕구를 작동시킨다. 그래서 에로스는 '부족한 것을 갈망하고, 또 채우려고 하는 신'이다. 에로스 신의 상황을 인간에게 적용해보면, 에로스는 '부족한 것에 대한 갈망'이며 '부족함을 채우려는 욕구'이다. 에로스는 '사랑의 신'이면서 동시에 '결핍의 화신'이고 '결핍을 채우려는 욕구의 화신'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결핍을 느끼는 대상과 영역은 다양하다. 이를 철학의 영역에도 적용할 수 있는데, 결핍을 벗어나려고 하는 욕구와 태도는 '진리와 지혜의 문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진리와 지식을 갈구하는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에게서도 결핍에 대한 자각과 공허감이 유사하게 적용된다. 흔히들 철학의 의미를 '지식에 대한 사랑'이라거나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정의한다. 그렇다면 철학자는 '지식을 사랑하는 자' 내지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것은 곧 그가 지식을 '갈구하는 자'임을 의미한다. '지식을 갈구하는 자'는 아직은 지식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자(지식을 지닌 자)는 아니다.' 그러나 진리와 지식을 획득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무지에 대해 자각하는 것'은, '지식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엄청난 지식과 지식체계가 있지는 않은지'를 의심하면서 막연하게라도 지식체계를 상정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무지에 대해 자각하는 사람은 전적으로 무지하지는 않다.

가령 다섯 살 난 어린아이와 대학생을 비교해보자. 만약 어린아이에게 "너는 무지해!" "너는 지식이 결핍되어 있어!"라고 말한다면, 아이는 아니라고 우기다가 끝내는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그러나 대학생에게 이런 말을 하면(물론 어린아이처럼 다소 기분 나쁘고 자존심 상한다는 태도를 취하면서 무지를 부인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자신의 무지를 수긍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학생이 어린아이보다도 무지한가? 그렇지는 않다. 이것과 유사하게, 철학자는 남들보다도 더 지혜로우며 진리와 지식에 대한 열정도 더 많이 갖고 있지만, 늘 자기의 무지에 대해 자각하고 고민하기 때문에 '지와 무지의 중간자'로 간주된다.

이 중간자는 풍요를 알고 있지만, 현재는 풍요가 사라져버려서 빈곤 상태로 떨어져버린 자이며, 풍요를 상실한 자이다. 철학자는 상실한 풍요를 갈망하면서 풍요에 대한 결핍을 느끼고 풍요를 사랑하고 실현하려고 하는 자이다. 그런 면에서 철학자는 '풍요로운 지식을 갈구하고 사랑하는 자'이며, '지혜를 갈구하고 사랑하는 자'로 일컬어진다. 즉, 지를 향한 에로스가 작동하는 자이다. 지를 사랑하는 철학자를 개념화하면 그는 바로 '지식을 사랑하는 자(애지자)'4)이다. 에로스는 '사랑의 신'이면서 동시에 '애지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에로스는 '결핍된 지식에 대한 사랑'과 '무지에서 지로 고양되고자 하는 열정과 욕구'로 환원된다. 에로스는 결핍을 해소하려고 하는 인간 영혼의 내적이고 자발적인 활동성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에로스는 '성적 사랑'으로만 환원되지 않으며, 다층적 의미를 지니는 철학적 개념이다.

그러나 성적 사랑이든 지식에 대한 사랑이든 간에 자신의 '결핍을 자각'하고 그 '결핍을 해소하려고 하는 욕구'는 결국 인간 자신의 '유한성'과 변화무쌍함 그리고 허무함을 극복하려고 하는 욕구이다.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욕구가 육체적 결핍의 차원에서 나타날 때는 일단은 '성적 결합 욕구'가 되며, 이러한 성적 사랑의 감정이 '종족 보존 욕구'로, 즉 '자신의 아이를 육체적으로 탄생시키고자 하는 욕구'로 승화되면서 유한성 극복과 연결된다. 이에 반해 '지적 결핍'의 차원에서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욕구는 성적 결합 욕구처럼 아이를 '육체적으로'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탄생시키고자 하는 욕구'이다. '정신적으로 아이를 탄생시키는 것'은 '지식을 습득'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새로운 지식체계를 산출하고자 하는 욕구'로 승화된다.

각주
1 사랑에 관한 이 책의 착상은 졸고, 「사랑과 분열의 이중주」(『철학과 현실』, 통권 51호, 2001 겨울), pp.139-152 참조.
2 플라톤의 에로스에 관한 다양한 이해를 위해 이상인의 글, 「에로스와 욕구–플라톤이 묻는 한국인의 사랑」(『전통과 현대』, 2000 가을), pp.58-74 참조.
3 Platon, Symposion, 178c.
4 Platon, Symposion, 204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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