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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일본에 팔렸다고 ?

淸潭 2023. 12. 25. 10:07

“일본에 ‘우리나라 그 자체’가 팔렸다”…정치권 발칵 뒤집힌 까닭 [추동훈의 흥부전]

추동훈 기자(chu.donghun@mk.co.kr)입력 2023. 12. 25. 09:33[흥부전-36][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31] 앤드루 카네기

122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철강기업 US 스틸(US Steel)이 일본제철에 매각됐습니다. 금액은 141억 달러. 주가에 40% 프리미엄을 얹어주고 부채까지 전부 품으며 한화 19조원에 육박하는 자금을 쏟는 베팅에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인수 소식이 발표된 직후 미국 정치인들이 민주당, 공화당 할 것 없이 해당 매각에 반대한다고 핏대를 높이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펜실베이니아 출신 존 페터맨 민주당 상원의원은 “이 거래를 차단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US 스틸 로고
지난해 조강 생산량 기준 일본제철은 4만437만t을 생산해 세계 4위. 하지만 US스틸은 겨우 27위에 불과합니다. 즉 경제논리로만 접근한다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철강업체가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기업을 인수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항상 서로 싸우느라 바쁜 여야 의원들이 힘을 합쳐 공동전선을 구축해나가는 걸까요. 그 이유가 바로 오늘의 이야기 주제입니다.
일본제철 로고
미국 의회에서 내세우는 표면적 이유는 미국 국가안보 위기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거래로 고임금 미국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협한다고 우려를 표했는데요. 다 맞는 말이지만 진짜 이유는 미국 철강회사를 일본에 팔아넘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민주당 상원의원 밥 케이시는 “미국의 주요 철강회사는 미국의 소유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밝혔는데요. 아니 지구 반대편 소식을 실시간으로 공유받고 비행기를 타면 하루안에 전 세계 어디든 갈 수 있는 시대에 너무 올드스쿨한 발상이 아니냐는 반문도 나올 듯 합니다.

하지만, US 스틸이 어떤 회사인지 살펴보면 여러분들도 어쩌면 미국 국회의원들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의 주인공, 바로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입니다.

앤드루 카네기
그런데 US 스틸이란 사명에 무슨 창업자 이름이 있냐고요? 맞습니다. US 스틸엔 없습니다. 다만, US 스틸이란 회사가 바로 카네기 스틸 등 여러 철강회사가 합병해 1901년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US 스틸의 전신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앤드루 카네기가 창립한 카네기 스틸입니다.

앤드루 카네기는 1835년 스코틀랜드 던펌린이란 지역에서 직조공 노동자 윌리엄 카네기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당시 대부분 직조공들이 그러하든 카네기 가족은 단칸방 오두막에서 생활했습니다. 집의 절반을 이웃 직공 가족들과 공유하며 단칸방은 거실이자 식당, 그리고 잠을 자는 침실로 이용됐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외삼촌이자 정치가였던 조지 로더 시니어로부터 많은 스코틀랜드 영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시 그는 영웅담을 통해 성공에 대한 욕심과 근면·성실의 중요성을 크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카네기가 태어난 집
당시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영국 지역엔 역사적으로 많은 일들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는 움직임 가운데 가톨릭 교회를 둘러싼 종교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1850년대를 전후한 아일랜드 대기근의 여파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 끔찍한 일도 있었습니다. 직조공이었던 그의 아버지 역시 급변하는 사회 질서 속에서 생계조차 꾸려가기 쉽지 않은 상황을 직면했습니다. 앤드루의 어머니는 정육점을 운영하는 등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카네기 가족은 이를 버티지 못하고 미국으로 떠납니다.

그렇게 카네기는 12살이던 1848년 미국 펜실베니아 주 엘러게니 지역에 자리 잡으며 낯선 미국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국에 왔다고 모든 게 해결되진 않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고 스코틀랜드인 소유의 면직공장에서 겨우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카네기 역시 아버지와 함께 일주일에 6일, 하루 12시간씩 고된 면직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돈을 벌기 시작합니다.

카네기(우측)와 동생의 사진
타고난 성실성과 근면함은 그를 돋보이게 했습니다. 아버지 윌리엄은 일이 힘들다며 일을 그만두고 말았지만 앤드루는 끈기 있게 일하면서 보빈(실을 감아서 쓰는 통) 제조업자 존 헤이의 눈에 띄게 됩니다. 그는 기존보다 2배 오른 시급을 받으며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당시 카네기는 과중한 일로 어려움을 호소했습니다. 주당 2달러를 받으며 보빈 공장 지하실의 보일러를 가동했고 증기기관을 돌리는 등 시키는 일은 모조리 해야만 했습니다. 증기 기관을 다루는데 서툴렀던 그는 당시 보일러가 터질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일했다고 회상했습니다.

 

1849년, 그는 삼촌의 추천으로 전신회사 오하이오 텔레그래프 컴퍼니의 피츠버그 지사에서 배달부로 일하게 됩니다. 그는 피츠버그의 모든 사업장의 위치와 사업가들의 얼굴을 외우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는 결국 1년만에 배달부에서 전신 교환원으로 승진했습니다. 모르스 부호를 읽고 해석하는 역량이 탁월했던 그는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며 돋보이는 일꾼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짧은 기간에 또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는 매주 토요일 밤이면 제임스 엔더슨 대령의 개인 도서관을 찾아 400여권의 책을 차례대로 읽어나갔습니다. 이를 통해 경제관념을 쌓아나갔고 다양한 지식을 습득해나갔습니다. 이후 그는 엔더슨 대령에 감사를 표하는 헌사를 바치며 도서관을 세우기도 합니다.

카네기 초상화(출처=배니티페어)
그의 근면·성실한 태도와 업무 역량은 금세 소문이 났고 1853년,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의 토마스 스콧의 비서 겸 전신기사로 취업에 성공합니다. 이렇게 18세의 스코틀랜드 출신 이민자 소년은 주급 4달러를 받으며 미국에서 첫 직장에서 받던 임금보다 4배나 많은 돈을 받습니다. 이 곳에서 경력을 쌓은 카네기는 24세의 젊은 나이에 펜실베이니아 철도 서부지역 감독관에 부임합니다. 그는 16살된 동생 톰을 비서로, 사촌인 마리아 호건을 전신기사로 채용합니다. 마리아 호건은 미국에서 최초로 전신기사로 일한 여성이란 기록을 세웁니다.

그가 감독관에 부임한 기간동안 그는 직원관리와 비용 등 경영 전반에 대한 지식을 습득합니다. 이는 사업가 카네기의 면모를 만드는 토양이 됐습니다. 연봉 1500달러(2022년 기준 환산시 약 4만9000달러)를 받으며 성공을 거둔 카네기는 각종 투자 등을 통해 자본을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철도와 교량을 공급하는 작은 사업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자본가의 길을 걷습니다.

철도망이 도로망보다 잘 구축돼 있던 당시, 카네기는 먼 거리를 이동할 때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열차에 대한 투자를 단행합니다. 풀먼 슬리핑 카(Pullman Sleeping Car)는 일등석 여행용 침대열차 운영기업으로 이에 대한 성공 가능성을 엿본 카네기는 큰 돈을 벌게 됩니다. 특히 위대한 기업가에게 항상 찾아오는 변곡점, 전쟁이 다가옵니다. 미국 남북전쟁은 카네기에게 절호의 기회가 됐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이동과 운송 이슈가 주목받으면서 그의 열차 사업은 호황을 누립니다.

풀먼 슬리핑 카
그는 가만히 머물지 않았습니다. 카네기는 펜실베이니아 주에 위치한 컬럼비아 석유회사의 초기 투자자로 참여합니다. 하늘도 그의 편이었을까요. 그가 투자한 지역에선 유정이 발견됐고 그는 막대한 돈을 손에 쥐게 됩니다. 승승장구를 달리던 그는 더 멀고 높은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철강이었습니다. 그는 앞으로 철강의 시대가 온다고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전쟁을 치르면서, 철도 노선이 확장되면서 더욱 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는 그동안 벌어온 돈을 모두 철강업에 투자하기로 결심합니다.
에드가 톰슨 스틸 컴퍼니
1872년, 카네기는 ‘에드가 톰슨 스틸 웍스’라는 회사를 세우고 철강을 이용해 레일 생산을 시작합니다. 기술 개발과 더불어 값싼 철강을 효율적으로 생산해 산업혁명 시대에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사가 벌어들인 돈은 재투자됐습니다. 인근의 제철소를 사들이고 규모를 키워 철강 생산에 쓰이는 원자재를 끌어모으고 운송 시스템을 갖춰나갔습니다. 여러 철강회사를 한데 모은 1892년 7월, 카네기는 카네기 스틸 컴퍼니를 설립하며 철강왕의 등장을 알렸습니다.
카네기 스틸 컴퍼니 로고
그 이후의 삶은 알려진 대로입니다. 악독한 경영자라는 비판과 기부왕이라는 찬사가 함께 있는 그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으로 불립니다. 그는 1901년 회사를 J.P 모건에게 넘기며 회사를 떠납니다. 아들이 없던 그는 사후에 누군가에 기부하느니 생전에 모든 재산을 기부하겠다며 각종 재단 설립과 자선활동에 매진했습니다. 특히 독서를 좋아했던 그는 지역별로 무료 도서관을 건립하고 학교를 지었습니다. 뉴욕 맨해튼에 있는 카네기 홀 역시 그가 남긴 유산 중 하나입니다.
뉴욕 맨해튼 카네기 홀
카네기는 1919년 8월 매사추세츠주 레녹스에서 향년 8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둡니다. 사후 기부에 부정적이었던 그는 이미 자신의 재산 중 3억5069만 달러를 기부한 상태였습니다. 물가상승률을 반영하면 약 59억2000만 달러에 달하는 돈입니다.

그리고 사후 그에게 남아있던 재산은 3000만 달러. 그마저도 그의 재단과 자선단체 등에 기부되며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납니다.

피츠버그 카네기 공공도서관
카네기가 남긴 명과 암은 뚜렷합니다. 하지만 그가 성취해낸 아메리칸 드림과 수많은 기부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상징한다는 말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쩌면 US 스틸이 일본제철에 매각된다는 것이 사실 미국인들에겐 ‘아메리칸드림’의 꿈을 파는 일로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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