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세상사는 이야기

1 학질(瘧疾)을 쫓아 보내는 글

淸潭 2022. 10. 4. 14:51

58. 월사집(月沙集) 33 /  이정귀(李廷龜)

잡저(雜著)

 

1 학질(瘧疾)을 쫓아 보내는 글

 병신년(1596, 선조29) 12월 신묘일 그믐날 저녁에 주인옹(主人翁)이 병석에서 일어나 맥없이 앉았노라니, 가동(家僮) 10여 명이 이웃 백성들을 소리쳐 불러 뜰에 모아 놓고는 한바탕 춤판을 벌여 요란스럽게 꽹과리와 북을 치고 대열을 지어 질서정연한 걸음으로 나에게 와서는 말하기를, “지금 이 한 해가 가는 때에 이렇게 하는 것을 나례(儺禮)라 하니, 송구영신(送舊迎新)하고 재액과 여귀(癘鬼)를 물리칩니다.” 하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생각하기를, ‘마을 사람이 여귀 물리치는 굿을 하는 것을 공자(孔子)께서도 보셨으니, 그 유래가 이처럼 오래되었다.’ 하고, 이어서 생각하기를, ‘내가 학질이 걸린 지 오래이니, 혹 이로 인하여 쫓아 보낼 수 있겠구나.’ 하였다. 이에 검은 깃발을 수레에 꽂고 흰 휘장을 배에 치고서 건량(乾糧)을 모두 싣고 비린 음식을 차려 놓고는, 옷깃을 여미고 몸을 굽힌 채 마음을 비우고 경건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학귀(瘧鬼)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가 욕되게도 나와 함께 산 지 어느덧 3년이 다 되었소. 그대가 처음 올 때 누가 우리 집에 살라고 했으며, 그대가 오래 머물고 있는데 누가 못 가게 만류하더이까. 아무도 모르게 와서는 눌러앉아 좀처럼 가지 않으니, 오는 것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하고 가는 것은 누가 만류하는 듯하구려. 처음에는 하루 건너 찾아와 다소 서먹한 듯하더니 결국에는 밤마다 찾아와 다시 친밀한 듯하였소. 그대가 찬 기운을 불어 보냈다가 뜨거운 기운을 부채질하는 등 변덕이 심하여 한여름에 두터운 겨울 갖옷을 입고도 화로를 끼고 살고 추운 날 얼음물을 마시고도 갈증을 호소하며, 등에는 일하지 않아도 땀이 흐르고 다리는 움직이지 않아도 떨린다오. 내가 마구 기만하고 욕설을 퍼부어도 그대는 싫어하지 않고, 내가 구토를 일으키며 오물을 뱉어도 그대는 수치로 여기지 않았소. 내가 몰래 도망쳐 숨은 것은 그대가 와서 습격할까 봐 피한 것인데 그대는 마치 염탐꾼이라도 둔 듯이 어김없이 뒤쫓아 왔으며, 내가 독성이 강한 약을 먹은 것은 그대의 삿된 기운을 쓸어 내기 위한 것인데 그대는 두려워하지 않고 더욱 사납게 기승을 부리더이다. 무릇 내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며, 얼굴에 때가 끼어도 씻지 않고 머리카락이 엉클어져도 빗지 않으며, 혼백이 달아나 마치 미치광이나 바보와 같고 마음이 두렵고 어수선하여 날로 기운이 쇠진해지도록 만든 것은 모두 그대의 짓이라오.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토록 괴롭게 학대하며, 무슨 미련이 있기에 이토록 오래 머물고 있단 말이오. 그대가 만약 지각이 있다면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소. 오늘 이 좋은 날에 감히 그대를 전별해 보내노니, 그대는 나의 말을 알아듣고 그대는 나의 술잔을 받아 마시구려. 한해(漢海)의 맑은 물결이 바로 그대가 갈 곳이요 궁벽한 마을 작은 집은 그대가 머물 곳이 아니니, 어서 번개와 바람을 타고 훌쩍 날아오르고 그대는 지체하며 머뭇거리지 마시오.” 하였다.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하품 소리가 다가와 신골(神骨)이 송연하더니 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털이 곤두서며 숨이 차고 이마에 땀이 났다. 그리고 무슨 신물(神物)이 나를 내리누르는 듯하면서 말소리가 들려왔는데, “그대의 말을 들어 보니 참으로 괴롭겠구려. 그러나 이 점은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하였소? 대저 나무가 썩으면 날짐승이 모여들고 고기가 썩으면 벌레가 생기며,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자기를 친 뒤에 외부의 적이 와서 치고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자신을 해친 뒤에 외부의 사기(邪氣)가 와서 해치는 법이라오. 내가 그대를 보니 그대를 병들게 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오. 깊이 생각에 잠겼다가 혼잣말로 얘기하고 바보처럼 웃다가 까닭 없이 곡()하며 가슴이 답답하여 늘 갈증이 나고 얼굴이 참담하여 생기가 없는 것은 그대의 심장이 병든 것이요, 밥상을 앞에 놓고 구역질이 나고 음식을 걷어치우고 잠을 재촉하며 어제 먹은 음식물이 목에 걸린 듯하고 주린 창자가 늘 출출한 것은 그대의 비장(脾臟)이 병든 것이요, 탁한 콧물과 더러운 침이 목구멍을 꽉 막아 조금만 추워도 기침이 나고 잠시만 힘들게 움직여도 숨이 찬 것은 그대의 폐가 병든 것이며, 왼쪽 다리가 유독 뻣뻣하여 행보(行步)에 균형이 잡히지 않는 것은 그대의 지체(肢體)가 이미 습랭(濕冷)에 병든 것이요, 힘줄은 강하고 살은 죽어 사지가 경련을 일으키고 오그라드는 것은 그대의 기맥(氣脈)이 이미 풍한(風寒)에 병든 것이라오. 무릇 이 다섯 가지 병이 그대의 다섯 가지 학질인데,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증세가 심해져서 몸을 무너뜨리고 뼛속까지 침범하는데도 그대는 안일하게 세월만 보낼 뿐 전혀 경계할 줄 모르더이다. 음식과 거동을 밖에서 조심하지 않고 근심과 사념(思念)은 안으로 기력을 해친 탓에 마침내 화기(火氣)는 상승하고 수기(水氣)는 하강하여 음()과 양()이 서로 소통되지 않고 기()가 피를 움직이지 못하여 그만 건강을 해쳐 그대의 진원(眞元)은 날로 고갈되었소. 그리고 풍토가 좋지 않은 곳 벌레가 들끓는 속에서 묵묵히 유거(幽居)하며 잠을 벗삼아 살고 있었으니, 이것이 내가 의기양양하게 와서 주위를 살피며 그대를 지키고 있었던 까닭이라오. 따라서 내가 그대를 찾은 게 아니라 그대가 실로 나를 기다린 셈이오. 그대가 상중(喪中)에 있을 때 조석으로 곡읍(哭泣)하며 변변찮은 음식조차 때로 들지 않았으며 간난과 신고(辛苦)가 그대와 함께 있었소. 그대의 거처는 궁벽하고 초라한 오두막이라 사람들이 모두 등을 돌려 인적이 없이 적막했으며, 그대는 그 속에서 흐릿한 정신으로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오직 나만이 그대를 찾아주었소. 명리(名利)의 굴레는 사람을 패망의 길로 몰아넣으며, 계륵(鷄肋)과 같은 벼슬에 연연하면 그 화()는 촛불에 날아드는 부나비와 같다오. 그대가 그 길로 가려는 것을 내가 만류하여 그대의 생명을 보전해 주었으니, 무릇 내가 그대를 병들게 한 것은 알고 보면 그대를 옥성(玉成)해 주는 것이라오. 그런데 지금 도리어 엉뚱한 이유로 비방하여 나를 몰아내려고 끝내 고맙다는 인사는 못할망정 헐뜯는 말만 마구 늘어놓는구려. 나의 두터운 은덕을 잊고 나와의 오랜 친분을 미련없이 버리니, 이보다 더한 불인(不仁)이 어디 있겠소. 자신의 건강 관리에 어두워 놓고서 병이 절로 낫기를 바라고 있으니, 이보다 더한 무지(無知)가 어디 있겠소. 지금 약을 쓰지도 않고 푸닥거리를 할 것도 없이 나를 몰아낼 방법이 있으니, 그대는 들어 보겠소?” 하였다. 주인이 재배(再拜)하고 말하기를, “이 늙은이는 몽매(蒙昧)하여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으니, 원컨대 불쌍히 여겨 잘 가르쳐 주구려.” 하자, 학귀가 갔다가 돌아오는 듯하더니 기세가 올라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 대저 한 사람의 몸은 한 나라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 정신은 임금과 같고 기운은 백성과 같소. 백성이 흩어지면 나라가 망하고 기운이 소진되면 몸이 죽는 법이라오. 적이 나라 밖에 있는데 부강(富强)을 이루고자 부역과 세금을 가중하여 백성의 생산을 긁어모으면 민심이 이반하여 나라 안이 먼저 궤멸하게 될 것이며, 병이 몸 바깥쪽에 있는데 속히 낫고 싶어서 독한 약을 투여하여 기혈(氣血)을 마구 치고 흔들어 놓으면 원기가 나른하여 절로 사멸하게 될 것이오. 지금 그대가 그대의 정신을 살리고 그대의 생각을 틔우고 그대의 음식을 절제하고 그대의 기거(起居)를 조절하여 음양(陰陽) 두 기운이 조화를 이루고 백맥(百脈)이 소통하여 원정(元精)이 안에서 튼튼하고 기혈이 왕성하게 되면, 나는 스스로 서둘러 물러날 것이오. 어찌 그대가 수레와 배를 만들어 나를 전별해 주기를 기다리겠소.” 하였다. 주인이 이에 흠칫 놀라 반성하고 문득 깨달아 두 손을 모으고 사례하기를, “나는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물었는데 나라를 치료하는 방법까지 들었으니, 삼가 이 말씀을 기억하여 좌우(座右)에 써 두리다.” 하였다.

 [-D001] 마을 …… 보셨으니 : 마을 사람이 굿을 하면 공자가 조복(朝服)을 입고 조계()에 서서 사당에 모신 조상의 신이 자신에게 의지하여 안정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論語 鄕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