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慶州金氏

신라김씨 역대왕 연대표

淸潭 2019. 2. 15. 09:40

신라김씨 역대왕 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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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氏는 신라왕실의 三性(박,석,김) 가운데 하나로 시조 김알지의 7세손 미추왕(신라13대)부터 왕위에 오르기 시작하여 신라 마지막왕인 경순왕(알지의 28세손)때 까지 총 38왕이 재위하셨다.

신라를 상대(上代), 중대(中代), 하대(下代)로 구분할 수 있는데 상대는 시조왕(朴赫居世)부터 진덕왕까지 28왕이요 이 중 김씨가 3왕이고, 통일신라의 위업이 빛났던 중대는 태종무열왕에서 혜공왕까지 8왕이요 이 모두가 김씨이고, 하대는 선덕왕에서 경순왕까지 20왕이라 하였는데 이 중 17왕이 金씨 임금이시었다.

 

이중에서 신라 29대 무열왕의 5세손인 김주원을 시조로하는 강릉 김씨,
신라 45대 신무왕의 셋째아들인 김흥광을 시조로하는 광산 김씨,
신무왕의 후손인 김영이를 시조로하는 영산(永山, 영동) 김씨,
문성왕의 8세손 김선궁을 시조로 하는 선산(일선) 김씨 등을 제외한
대부분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경주 김씨 후손들이다

 

** 신라 역대왕 연대표 * *

 

왕위

김씨

명칭

휘(諱)

재위

서기

1

 

혁거세왕

 

61

BC57~4

2

 

남해왕

 

21

4~24

3

 

유리왕

 

34

24~57

4

 

탈해왕

 

24

57~80

5

 

파사왕

 

33

80~112

6

 

지마왕

 

23

112~134

7

 

일성왕

 

21

134~154

8

 

아달라왕

 

31

154~184

9

 

벌휴왕

 

13

184~196

10

 

나해왕

 

35

196~230

11

 

조분왕

 

18

230~247

12

 

첨해왕

 

16

247~262

13

1

미추왕(味鄒王)

미추(味鄒)

23

262~284

14

 

유례왕

 

15

284~298

15

 

기림왕

 

13

298~310

16

 

흘해왕

 

47

310~356

17

2

내물왕(奈勿王)

내물(奈勿)

47

356~402

18

3

실성왕(實聖王)

실성(實聖)

16

402~417

19

4

눌지왕(訥祗王)

눌지(訥祗)

42

417~458

20

5

자비왕(慈悲王)

자비(慈悲)

22

458~479

21

6

소지왕(炤智王)

소지(炤智)

22

479~500

22

7

지증왕(智證王)

지대로

15

500~514

23

8

법흥왕(法興王)

원종(原宗)

27

514~540

24

9

진흥왕(眞興王)

삼맥종(三麥宗)

37

540~576

25

10

진지왕(眞智王)

사륜(舍輪)

4

576~579

26

11

진평왕(眞平王)

백정(白淨)

54

579~632

27

12

선덕여왕 (善德女王)

덕만(德曼)

16

632~647

28

13

진덕여왕(眞德女王)

승만(勝曼)

6

647~654

29

14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춘추(春秋)

8

654~661

30

15

문무왕(文武王)

법민(法敏)

21

661~681

31

16

신문왕(神文王)

정명(政明)

12

681~692

32

17

효소왕(孝昭王)

이홍(理洪)

11

692~702

33

18

성덕왕(聖德王)

륭기(隆基)

36

702~737

34

19

효성왕(孝成王)

승경(承慶)

6

737~742

35

20

경덕왕(景德王)

헌영(憲英)

24

742~765

36

21

혜공왕(惠恭王)

건운(乾運)

16

765~780

37

22

선덕왕(宣德王)

양상(良相)

6

780~785

38

23

원성왕(元聖王)

경신(敬信)

14

785~798

39

24

소성왕(昭聖王)

준옹(俊邕)

3

798~800

40

25

애장왕(哀莊王)

청명(淸明)

10

800~809

41

26

헌덕왕(憲德王)

언승(彦昇)

18

809~826

42

27

흥덕왕(興德王)

수종(秀宗)

11

826~836

43

28

희강왕(僖康王)

제륭(悌隆)

3

836~838

44

29

민애왕(閔哀王)

명(明)

2

838~839

45

30

신무왕(神武王)

우징(祐徵)

1

839~839

46

31

문성왕(文聖王)

경응(慶膺)

19

839~857

47

32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

5

857~861

48

33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

15

861~875

49

34

헌강왕(憲康王)

정(晸)

12

875~886

50

35

정강왕(定康王)

황(晃)

2

886~887

51

36

진성여왕(眞聖女王)

만(曼)

11

887~897

52

37

효공왕(孝恭王)

요(嶢)

16

897~912

53

 

신덕왕

 

6

912~917

54

 

경명왕

 

8

917~924

55

 

경애왕

 

4

924~927

56

38

경순왕(敬順王)

부(傅)

9

 

 

                          

 

                                                                    나의 直係先祖인 敬順王(경순왕)

         

 

        

 

        

 

경순왕 능비 비각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景順王 능 비문(총탄자국이 있음)


- 경순왕의 능은 경기도 연천에 있는 유일한 신라 왕의 능으로  신라 992년간 신라의종말을 고한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서기 935년 12월에 고려 왕건에게 양국(손국)한 왕으로 서기 978년 음력 4월4일에 승하 하시자 고려 경종왕(3년)이  대왕의 례을 갖춰 능을 조성하였다 한다   

 

대왕은 897년에 태어나셔 978년(고려 경종 3년)에 수 82세로 돌아가시니 문성왕의 6대 손이요,이찬 효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따님 계아태후이고 비는 죽방부인 박씨와 왕건의 따님이자 계비인 낙랑공주 왕씨이다.

927년 경애왕의 뒤를 이어 신라 제 56대 왕으로 즉위하여 9년간 국난을 겪었다. 가뜩이나 국력이 쇠약한데다 경애왕은 비빈 및 종친과 더불어 포석정에서 놀고 있을 때 견훤이 침입하여 왕을 죽이고 왕비를 겁탈했다. 경순왕은 선왕의 시신을 거두어 정중히 장사지내고 그 뒤 935년까지 통치하는 사이 각처에서 군웅이 할거하고 침공과 약탈이 날로 심해지자 군신회의를 열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려면 고려의 왕건에게 나라를 양국하는 길 밖에 없다하여 양위하였다.

신라 제 53대 신덕왕,제 54대 경명왕,제 55대 경애왕은 박씨이고 신라의 마지막 56대 왕이 경순왕이고 경순왕이 신라김씨의 중시조이다.경순왕은 나날이 침탈하는 견훤의 반란을 막으면서 한편 고려 태조와 삽혈동맹( 血同盟)을 맺으며 구국을 위한 고려 태조와의 상대곡진정례(相對曲盡情禮)를 임해전(臨海殿)에서 갖는 등 실로 영일(寧日)이 없었다.

그래도 경순대왕은 9년간 왕위에 계시면서 군신회의를 열고 왕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단을 내렸으니,"나라가 고약(孤弱)하고 위험함이 이와 같아서 형세는 능히 온전하지 못할 것이니 이미 강하지도 못하고 또한 약하지도 못하므로 무고한 백성으로 하여금 간과 뇌를 흩여 땅에 물들게 함은 나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로다."하고는 김봉휴룰 시켜 고려 태조에게 양국(讓國)하겠다는 국서를 보내니 왕자는 통곡하면서 왕을 하직하고 금강산에 들어가 바위를 의지하며 마의초식(麻衣草食)으로 생을 마치었다.

여기서 삼국사기의 '청강어태조(請降於太祖)'나 삼국유사의 '귀명태조(歸命太祖)'라는 '강' 자와 '귀' 자의 의미를 일부 사학자들이 잘못 알고 "고려태조에게 자진 항복했다"느니 "귀순" "귀부"라고 했는데 이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잘못 읽고 또는 문자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항복이란 자의든 타의든 간에 대적하여 싸울 때 비로서 이루어지는 행위이고 귀순이나 귀부도 적대관계로부터 일어나는 행위이다. 고려 태조와 신라는 적대관계에 있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위에서 보듯이 고려태조는 통호신라(通好新羅)하려고 노력했고 그러므로 사기나 유사에서 한결같이 "경순왕이 귀명(歸命)한 것은 비록 마지 못해 한 것 같이 보이나 이는 또한 가상할 일이다. 만약 경순왕이 싸우며 왕위를 지키려고 태조와 겨루다가 힘이 굴하고 세가 궁하게 되었다면 반드시 그 종족은 뒤엎어 지고 무고한 백성들은 비참한 해를 입었을 것인데 고명(告命)을 기다리지 않고 부구(府庫)를 봉하고 군과 현을 기록하여 태조에게 넘겨 주었으니 그는 조정에 공이 있었고 백성들에게 큰 덕을 베푼 것이다. 옛날에 오,월(吳,越)의 땅을 들어 송(宋)에게 바친 것을 소자참은 충신이라 하였는데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 더 지나침이 있는 것이다. 태조는 비번이 많고 그 자손이 번성하여 현종(顯宗)은 신라의 외손으로 보위에 올랐거니와 그 뒤 왕통을 계승한 사람이 모두 그 자손들이었으니 어찌 그 음덕의 깊음이 아니겠는가?"라고 경순대왕을 찬양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학자들은 손국(遜國)이란 어휘를 썼다. 양위(讓位)나 선위(禪位)는 임금자리를 물려 줌을 말하는데 역사상 자의로 양위한 일이 없고 강압에 의해 왕위를 빼았겼으니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그랬고 조선조 고종황제(高宗皇帝)가 그러했다.
그러나 '손위(遜位)'는 '자기를 낮추고 스스로 왕위를 물려 줌'을 말하고 더구나 '손국(遜國)'이란 '자기를 낮추고 겸허한 마음으로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나라를 통치력이 있는 사람에게 넘겨 주는 일'인데 경순대왕은 그 어려은 결단을 내려 후세의 귀감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조의 군신(君臣)과 학자들은 경순왕에 대하여 "사가는 항복자를 쓰지 않고 양자를 썼다."(史氏不書降字而書讓)라고 하여 존숭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의 경순대왕은 항복이 아니고 백성을 위하여 고려에 나라를 합친 것이다.

 

 

1000년의 역사를 가진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써 성은 김, 이름은 부이다.
문성왕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이찬 효종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 계아태후이다.

  927년 후백제 견훤의 침공으로 경애왕이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
재위 때는 각처에서 군웅이 할거하여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지자 군신회의를 소집, 고려에 귀부하기로 결정하고, 935년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태조로부터 유화궁을 하사받았으며,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고 정승공에 봉해졌으며, 경주를 식읍으로 받았다. 한편,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됨으로써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능은 경기 연천군 장남면에 있다.

*여기서 사심관제도란?*

  사심관이란 직책은 부호장 이하 관직에 관한 일들을 주관하는 자리이다. 사심관제도는 기존의 기인제도와 함께 고려의 지방통치를 위한 제도이다. 기인제도란 지방 아전들의 자제들을 서울에 와 있게 하여 이들을 통해 그 지방의 사정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이 제도는 이미 신라가 통일 이후에 실시한 바 있는 상수리제도와 유사한 제도다.
  사심관은 해당지역의 행정책임자로 촌의 행정을 맡아보는 행정관리들에 대한 임명은 물론 이들을 감찰, 향촌 행정에 실질적인 권위를 갖는다. 김부가 경주 사심관으로 임명된 것은 그가 신라국의 왕이었으며, 왕건과의 사돈관계임을 감안할 때 예우적 조치라고 풀이된다.

 


가져온 곳 : 
카페 >♣ 이동활의 음악정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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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Summer|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