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잊으랴 어찌우리 그날을
(1950년6월25일 66년전의 그날을 상기하자)
6.25하면 등장하는 대표적인 사진. 북한의 M-26탱크가 잠시 멈추어있고, 피난을 하는 건지 음식을 구하러 가는 건지 터벅터벅 걸어가는 누나와 업힌 남동생. 1951년 6월 9일 찍힌 사진이라고 한다. 1950년 7월 10일. 미군병사가 뒤로 손이 묶인체 사살된 채 발견되었다. 일자가 1950년 9월 26일로 나온 걸로 보아 아마 인천 부근인 듯하다. 미 해병의 탱크가 포로를 잡고 있는 육군을 지원하고 있다. 전쟁 초기 젊은 사람들은 모두 징집되었다. 사진은 신병 훈련소로 향하는 기차에 칸막이도 없이 노출된 채 앉아있는 징집 병들. 1950년 7월 전쟁 초기 철수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의료수송헬기가 부상자를 후방으로 이송하고 있다. 헬기 착륙지점에 부상자를 옮길 들 것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의 공격을 받은 후 북한의 탱크 운전병이 부서진 탱크와 함께 죽어있다. 무서울 것 없이 진격하던 소련의 탱크도 강력한 한국의 낙동강 전선 반격에 차츰 파괴되어갔다. 사진이 찍힌 날자는 1950년 8월 13일이며 장소는 안동이다. 1950년 8월 16일 북한이 낙동강 전선의 총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 한 후 B-29 98대가 북한이 집결했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지역에 총 850톤의 재래식 폭탄을 집중 투하하고 있다. 해군의 AD-3 급강하 폭격기가 2000파운드 폭탄을 투하하고 있다. 사진의 장소는 신의주에서 북한과 만주를 연결하는 압록강 철교이며 왼쪽이 북한 지역이다. 폭격은 북한쪽의 철교부분을 폭파 시키고 있다. 사진의 왼쪽에 달 분화구 같은 많은 폭파구가 보인다. 그 동안 많은 폭격이 있었음이 확연하다. 1950년 11월의 사진이다. 이러한 공중 공격작전이 중국을 자극 하게 되고 중공군의 개입빌미를 제공한다. 1950년 7월 12일 남쪽으로 후퇴를 계속하면서 임시로 설정된 미군의 작전 지휘소. 이를 볏단으로 위장하고 경계를 서고 있는 미군이 이채롭다. 원본 설명서에서 장소는 아곡(Agok)이라고 하나, 아마 잘못된 표기가 아닌가 한다. 1950년 8월 사진으로 한창 후퇴를 거듭하던 시기인듯하다. 마을이 불타고 있는 것을 항공사진으로 촬영 한 것. 연합군의 반격이 진행되는 기간인 9월, 미군이 낙동강 후방지역을 공격하여 두 명의 북한군 포로를 잡았다. 미 육군에서 공개한 사진으로 그동안 1급 비밀로 분류되었던 사진이다. 이사진의 설명에 따르면 1950년 7월 전선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한국군이 대전지역에서 3일 동안 약 1,800 여명의 정치범들을 즉결심판 처형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의 처형이유는 공산주의 동조자와 북한군이 남한 피난민 깊숙히 위장하고 들어온 간첩의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일부 생존하여 지금도 무고한 민간인들도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4척의 상륙함이 전투 물자를 하역하고 있다. 1950년 9월 15일 잘알려진 한국전쟁 지휘관 맥아더 장군. 9월 15일인데도 두꺼운 가죽 자켓을 입고 있다니... 역시 장군은 폼생 폼사 인 듯. 1950년 9월 30일 대전 시가지. 의외로 길이 반듯반듯하다. 저 폐허가 불과 60년전 인데, 지금의 모습과 비교하면 상상이 안간다. 미군의 수색 작업 중 북한군 포로. 1950년 11월 16일. 북한 지역 전쟁지역에서 수술 서울 수복작전중인 국군과 미군. 한 민간인이 이 땅굴 속에 북한군이 숨어있다는 신고를 접수하고 슈류탄을 투척하고 있다. 또 다른 군인은 북한군이 튀어 나올 것에 대비하여 기관총을 준비하고 있다. 이것이 전쟁이다. 약 400여구의 시체가 대전 교도소에서 발견되었다.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교도소에 수감했던 국군포로, 민간등을 모두 학살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무덤을 직접 팠다. 왼쪽의 사람은 종군 기자다. 교도소 뜰에 옥수수가 높다랗게 자란 것이 가을을 알려주나 보다. 사진은 1950년 9월이다. 서울 수복 후 폐허속의 생존자와 죽은자. 1950년 10월 북한 지역을 회복하기 위한 미군의 C-119를 이용한 공수작전. 저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미군들은 무슨 목적이 있을까? 북한의 숙천과 선천 지역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대규모 공수작전이 펼쳐지고 있다. 서울지역 변두리에서 미군이 탱크를 앞세워 북한의 파르티잔들을 소탕하고 있다. 1950년 10월 장소는 불명확하나 많은 격전이 있었던 931미터 고지. 항공촬영을 통해 북한이 파놓은 정교한 참호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많은 포화와 항공폭격으로 나무는 거의 다 죽어 버렸다. 1950년 10월 금봉산의 공산에서 발견된 60여구의 민간인 시체. 이들은 북한군에 의해 타살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10월. 평양의 바로 남쪽에 위치한 황주에 진입한 오스트레일리아와 프랑스 군대. 동부전선에서 병력을 지원하기 위해 원산만으로 진입하는 미군. 1950년 10월, 약 5만명의 미군들이 이곳에 상륙하였다 1950년 12월 4일. 그 추운겨울 중공군의 전쟁 개입소식과 함께 자유를 찾아 파괴된 대동강 철교를 타고 목숨걸고 남하하는 북한 주민들. 12월 9일. 미군에 포로가 된 중공군. 12월 26일. F4U-5 Corsairs 공군 공격기의 지원을 받으면서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다. 미군과 영국, 그리고 우리 국군들의 시신. 합동 매장을 위해 시체를 모아두었다. 장소는 북한 지역 고토리. 12월 8일 F86 Sabre 제트 전투기가 눈으로 덮힌 적 밀집 지역 공격에 나섰다. 1951년 1월 28일 눈 속에 손만 보이는 한국군인의 시체 1951년 2월 카나다 군인들이 배달된 신문을 통해 자기나라 소식을 보고 있다. 원산지역의 적주요 보급지역을 B-26 Invader로 폭격하고 있다. 한강 근방에서 화염방사기로 적의 은둔 지를 불사르고 있다. 1951년 3월. 미군의 도움을 받아 영국 특공대들이 북한지역 깊숙하게 침투하여 철도 폭파를 위한 폭약을 설치하고 있다. 이 작전으로 약 30미터의 중요 철도가 파괴되어 중국에서 북한으로 수송하는 군수물자가 장기간 제약을 받았다. 적이 많이 밀집한 지역에 B-26이 네이팜탄을 투하하고 있다. 위치는 북한 지역으로 '한촌'이라 표기되어있다. 1951년 5월 10일 의정부. 터키 군인이 적으로부터 빼앗은 당나귀를 타고 있다. 춘천지역 1951년 5월. 중공군의 시체들. 아직도 머리에서 연기가 나고 있다. 원산 공격중, 북한의 대공라이트가 대공사격을 위해 불을 비추고 있다. 이런 불빛을 보고 미공군은 적을 공격하고, 공격 후 연기를 보고 다음의 공격군이 다시 공격한다. 1952년 4월 적의 박격포 공격에 참호 속에서 몸을 피하고 있다 회수된 북한의 대포와 박격포 포탄들. 이 어마어마한 무기들이 다 무었을 위해 사용되는 건가? 지금은 판문점 이된 중립지역에서 정전협정이 서명되고 있다. 정전이란 진자도 이긴 자도 없이 전쟁을 잠시 쉬는 상태. 다시 말해 언제든지 다시 붙자는 뜻. 4명의 미 해병이 휴전소식을 듣고 기뻐하고 있다. 이제야 전쟁이 끝나나보다 +컬러 사진 공산침략이 빚은 6.25. 참상 ▲ 1950. 9. 30. 전화(戰禍)로 폐허가 된 대전역. ▲ 1950. 11. 24. 불타버린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 ▲ 1950. 10. 7. 불타고 있는 김포 비행장. ▲ 1950. 10. 18. 전화에 그을린 중앙청. ▲ 1950. 10. 18.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 멀리 북악산과 중앙청 돔이 보인다. ▲ 1950. 9. 20. 왜관, 낙동강 철교 복구 공사. ▲ 1950. 10. 12. 미조리호 군함에서 청진항을 향해 함포사격을 가하고 있다. ▲1950. 10. 20. 400여 명의 낙하산 부대가 평양부근에 투하되고 있다. ▲1950. 12. 18. 북한군에게 뿌린 귀순 권유 전단. ▲1950. 11. 2. 적십자사에서 피난민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고 있다. ▲1950. 10. 13. 경기도 파주, 참혹하게 학살된 시신들. ▲1950. 11. 1. 서울 중앙청 앞 지금의 문화관광부 자리. 주민들이 폐허더미에서 땔감이나 돈이 될만한 물건을 찾고 있다. ▲1950. 11. 2. 원산의 한 성당. 폐허가 된 성당 내부를 신도들이 청소하고 있다.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탈곡한 볏단을 달구지에 싣고 있다.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전란 중에도 추수를 하고 있다. 바람개비로 알곡을 가리는 농부들. ▲1950. 11. 19. 북한의 한 지하 무기 공장 내부. ▲1950. 11. 20. 국경지대. 미군들이 소달구지로 보급품을 운반하고 있다.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 비료공장.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 송전소. ▲1950. 11. 23. 함경도 갑산. 미군 폭격으로 성한 집이 드물다. ▲1950. 11. 1. 황해도 평산에 진격하는 유엔군을 두 여인이 전신주 뒤로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1950. 12. 4. 평양을 떠나 대동강을 건너 후퇴하는 국군. ▲1950. 12. 6. 황해도 사리원. 남행하는 피난열차에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1950. 12. 8. 경기도 금촌, 38선을 넘어 후퇴하는 유엔군 차량들. ▲1950. 12. 9. 끊어진 한강철교. ▲1950. 12. 10. 포화에 불타는 마을. ▲1950. 12. 12. 한강 부교를 통하여 후퇴하는 차량들. ▲1950. 12. 12. 피난민들이 한강을 나룻배로 건너고 있다. ▲1950. 12. 12. 유엔군들이 인천항을 통해 장비들을 후송시키고 있다. ▲1950. 12. 12. 유엔군들이 후퇴하면서 다리를 폭파시키고자 폭약을 장치하고 있다. ▲1950. 12. 10. 중공군의 참전으로 강추위 속에 후퇴 행렬. 한 병사가 너무 추운 날씨로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다. ▲ 1950. 12. 12. 흥남부두, LST 함정에 가득 탄 군인과 피난민들. 미처 함정에 오르지 못한 피난민들이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원자탄이 투하된다는 말에 피난 행렬에 나섰다고 한다. 몇 날의 피난 길이 50년이 더 지났다. ▲1950. 12. 14. 서울역, 남행 피난민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1950. 12. 16. 흥남, 국군과 유엔군들이 후퇴하고자 부두에서 수송선을 기다리고 있다. ▲1950. 12. 27. 흥남, 얕은 수심으로 수송선이 해안에 닿을 수 없자 유엔군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LST로 가고 있다. ▲1950. 12. 24. 흥남, 유엔군들이 철수 후 부두를 폭파시키고 있다. ▲1950. 12. 19. 묵호. 흥남에서 철수한 장비를 묵호(동해)항에 내리고 있다. ▲1950. 12. 28. 서울, 피난민들이 강추위 속에 한강 얼음을 깨트리며 나룻배로 남하하고 있다. ▲1951. 1. 5. 피난 행렬 속의 소년과 소녀. 소달구지가 힘겨워하자 힘을 보태고 있다. ▲1950. 10. 11. 서울 교외, 부서진 북한군 전차 위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1950. 11. 1. 전란으로 폐허가 된 서울. ▲1950. 12. 28. 끊어진 한강 철교. 오른쪽은 임시로 만든 부교. ▲1951. 1. 3. 한강 철교 부근의 언 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1951. 3. 16. 서울 중구의 수도극장(현 스카라 극장) 일대.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광화문 세종로 일대. ▲1951. 3. 16.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왕십리 일대. 멀리 고려대학교 건물이 보인다.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서울역 일대.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경복궁, 수송동, 팔판동 일대. ▲ 1950. 10. 12. 원산. 학살된 시신들. ▲1950. 12. 11. 고단한 피난길. ▲1950. 12. 16. 폭격에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교. ▲1950. 12. 17. 보급품을 실은 화물 열차가 폭격에 불타고 있다. ▲1950. 12. 18. 대구. 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친 신병들이 전선으로 가고자 대구역전 광장에 집결해 있다. ▲ 1950. 12. 18. 전방으로 떠나는 신병들. ▲1950. 12. 18. 대구역. “총알을 요리조리 잘 피해서 어예든동 살아 오이라.” “어무이 걱정 꽉 붙들어 매이소. 어무이 아들 아잉기요. 내는 꼭 살아 돌아올 깁니다.” ▲1950. 12. 21. 경북 왜관. 낙동강 철교 어귀에 부서진 북한군 소련제 탱크. ▲1951. 1. 20. 아버지와 아들의 피난길. 다른 가족은 전란에 모두 죽었다. ▲1950. 6. 18. 6.25 한국전쟁 발발 일주일 전 의정부 북방 38 접경에서 미 국무장관 덜레스 (가운데) 일행이 38선 너머 북쪽을 살피고 있다. (덜레스 오른쪽 신성모 국방장관). ▲1950. 6. 18. 미 국무장관 덜레스 일행이 38 접경 지대를 살피고 있다. ▲1950. 7. 한미 수뇌부들이 환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병옥 내무장관, 신성모 국방장관, 무초 주한 미대사, 임병직 외무장관, 워커 주한 미군 사령관). ▲ 1950. 8. 15.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후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6.25 발발 후 서울시민은 팽개치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 1950. 8. 18. 백선엽 장군(가운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세우고 있다. ▲ 1950. 9. 16. 구포 신병 훈련소에서 훈시하는 이승만 대통령. ▲ 1951. 2. 15. 대한민국 해상 이동방송선(HLKT)을 방문한 장면 총리 일행. ▲ 1951. 9. 콜트 미 8군 부사령관의 이임식장. (왼쪽부터 허정, 콜트, 무초 주한 미대사) ▲ 1950. 11. 2.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아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 1950. 11. 13. 지아비가 생매장된 갱도 어귀에서 오열하는 지어미. “날라는 어찌 살라 하고 가시리잇고”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2. 북한군 포로. ▲ 1950. 8. 10. 폭격으로 불타는 마을. ▲ 1950. 8. 10. 핫바지들을 인솔하는 미 해병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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