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癖)
‘벽(癖)’의 종류는 많은데 땅을 좋아는 자를 ‘전벽(田癖)’ ‘지벽(地癖)’‘전지벽(田地癖)’라 한다.
[명종실록 1565년(명종 20년)]; 윤원형의 죄악을 26조목으로 올린 대사헌 이탁(李鐸)과 대사간 박순(朴淳) 등의 봉서. 그 내용에
“.....전 영의정 윤원형은 본래 간사하고 음흉한 사람입니다. 국구(國舅)로서 왕실(王室)과 가깝다는 핑계로 공신의 자리에 참여했으며 영상의 자리에 올라 일국의 정권을 쥐고 임금의 위엄을 빌어 생살여탈을 제 마음대로 하였으며 정신(廷臣)들을 얽어 놓아 성쇠가 그의 입에 달려 있었습니다. .....
백관이 앞을 다투어 뜻을 받들고 팔도(八道)에서 남보다 뒤질세라 뇌물을 바칩니다. .....
첫째, 거리낌 없이 제 마음대로 결정하여 행한 것이 열 가지 조목이 있습니다.
1. 혼례(婚禮)를 갖추면 아내가 되고 야합하면 첩이 되는 것은 고금의 공통된 의리입니다. 명문가의 처녀라고 하더라도 한번 첩으로 이름 지어지면 다시 바꿀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관비(官婢)의 소생을 올려서 부인으로 삼았습니다.
..................
둘째, 부정한 짓으로 끝없이 재물을 탐하는 것이 열 가지 조목이 있습니다.
(二曰貪贓無厭, 其目有十焉。)
1. 하늘 높이 치솟은 화려한 저택을 가항(街巷)까지 연하도록 10여 채를 짓고, 부정하게 들어온 보화가 그 속에 가득하며 가혹하게 거둬들인 재물이 밖에까지 넘치는데도 끊임없이 집을 지어 토목 공사가 한창이고, 진(秦)ㆍ농(隴)에서 생산되는 재목이 강 머리까지 연이었으니, 어찌 목요(木妖)가 일어났다는 기롱에서 그칠 뿐이겠습니까.
2. 해변의 간척지와 내지(內地)에 죽 잇닿은 기름진 전답을 모두 사사로이 점유하고 관(官)에서 종자를 대어주고 수령이 감농(監農)하게 하니, 관창(官倉)에 저축한 곡식의 절반은 일꾼들 밥해 먹이는 데 쓰이고 밭에서 일하는 농부는 모두 경작하는 종이 되어 농장이 있는 곳마다 모두 원성이 대단하니, 어찌 지벽(地癖)이란 기롱만 있겠습니까 (濱海築堰, 內地沃壤, 田亘阡陌, 盡入私占。 公家給種, 守令監農, 官倉儲穀, 半爲饁餉之資。 南畝農夫盡作耕耘之奴, 農庄所在, 闔境怨苦, 奚啻地癖之有譏哉? 此其貪贓之二也。). .......”
[숙종실록보궐정오] 숙종 14년; 1688); 충청 감사(忠淸監司) 이언강(李彦綱)이, 이상(李翔)이 상소한 가운데 유두성(柳斗星)을 조사하는 일 때문에 진소(陳疏)하여 스스로 변명하니, 임금이 의례적인 비답을 내리고 속히 조사하도록 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 ........................이상(李翔)은 시골에 살면서 세력으로 억압하여, 남이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온갖 방법으로 계획을 꾸며 빼앗아 가진 뒤에야 그만두었다. 한 번은 시골에 사는 선비로서 일찍이 그 문에 출입하는 자가 있었는데, 선비를 꾀어 그 여종과 간통하게 하여 이미 행랑에 들여보내고는 곧 남자종을 시켜 결박해 끌어내면서 꾸짖기를, ‘이 여종은 남편이 있는데, 네가 몰래 간통했으니, 죄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 장차 너를 관청에 고발하겠다.’ 하니, 그 사람이 두려워서 어떻게 할 바를 알지 못하였는데, 마침내 친하고 가까운 자를 시켜 중간에서 그 토지를 바치게 하자 풀어 주었다. 이상이 위세(威勢)를 빙자하여 백성의 토지를 빼앗은 것이 한둘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니, 세상에서 그를 일러 ‘전지벽(田地癖)을 가진 학자’라 하였다(喝曰: ‘此婢有夫, 而汝潛通之, 罪當死, 將以汝告官。’ 其人惶懼, 不知所出, 遂令親昵者居間, 納其田而解之。 翔之藉成勢奪民田, 非一二計, 世謂之田地癖學者。).”
몇 년 전 어떤 장관 후보자의 부동산 투기가 문제가 되자 “그저 자연의 일부분인 땅을 사랑했을 뿐”이라고 해명한 것이 불현듯 떠오른다.
지금으로 치면 ‘부동산투기’를 예전엔 땅에 집착한다 해서 ‘지벽’ 혹은 ‘전지벽’이라 했던 것이다. 문제가 된 장관후보자도 <실록>의 필법대로 라면 ‘자연의 일부분인 땅을 사랑한’ 지벽(전지벽)이 되는 것이다.
상소를 일삼는 상소꾼도 있었다. 지금도 고소·고발을 남발하는 소송꾼이 있다지만 예전에 상소를 남발하는 사람을 상소꾼, 즉 ‘소벽(疏癖)’이라 했다. 1598년(선조 31년) 이귀(1557~1633년)가 상소를 올리자 <선조실록>의 기자는 ‘사론’을 붙여 비난했다.
“이귀는 벼슬이 없을 때부터 상소하기를 좋아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즉시 소매를 걷어붙이고 상소했다. 사람들이 이를 두고 ‘상소 잘하는 벽이 있다’하여 비웃었다.(人嘗笑其有疏癖)”
이 글은 경향신문 이기환의 [고려 조선의 '덕후', 그 기묘한 '덕질']에 첨삭하여 재구성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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