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野談,傳說,說話,등

벽(癖)

淸潭 2017. 1. 30. 11:50

()

()’의 종류는 많은데 땅을 좋아는 자를 전벽(田癖)’ ‘지벽(地癖)’‘전지벽(田地癖)’라 한다.

 

[명종실록 1565(명종 20)]; 윤원형의 죄악을 26조목으로 올린 대사헌 이탁(李鐸)과 대사간 박순(朴淳) 등의 봉서. 그 내용에

 

“.....전 영의정 윤원형은 본래 간사하고 음흉한 사람입니다. 국구(國舅)로서 왕실(王室)과 가깝다는 핑계로 공신의 자리에 참여했으며 영상의 자리에 올라 일국의 정권을 쥐고 임금의 위엄을 빌어 생살여탈을 제 마음대로 하였으며 정신(廷臣)들을 얽어 놓아 성쇠가 그의 입에 달려 있었습니다. .....

백관이 앞을 다투어 뜻을 받들고 팔도(八道)에서 남보다 뒤질세라 뇌물을 바칩니다. .....

첫째, 거리낌 없이 제 마음대로 결정하여 행한 것이 열 가지 조목이 있습니다.

1. 혼례(婚禮)를 갖추면 아내가 되고 야합하면 첩이 되는 것은 고금의 공통된 의리입니다. 명문가의 처녀라고 하더라도 한번 첩으로 이름 지어지면 다시 바꿀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관비(官婢)의 소생을 올려서 부인으로 삼았습니다.

..................

둘째, 부정한 짓으로 끝없이 재물을 탐하는 것이 열 가지 조목이 있습니다.

(二曰貪贓無厭, 其目有十焉)

1. 하늘 높이 치솟은 화려한 저택을 가항(街巷)까지 연하도록 10여 채를 짓고, 부정하게 들어온 보화가 그 속에 가득하며 가혹하게 거둬들인 재물이 밖에까지 넘치는데도 끊임없이 집을 지어 토목 공사가 한창이고, ()()에서 생산되는 재목이 강 머리까지 연이었으니, 어찌 목요(木妖)가 일어났다는 기롱에서 그칠 뿐이겠습니까.

 

2. 해변의 간척지와 내지(內地)에 죽 잇닿은 기름진 전답을 모두 사사로이 점유하고 관()에서 종자를 대어주고 수령이 감농(監農)하게 하니, 관창(官倉)에 저축한 곡식의 절반은 일꾼들 밥해 먹이는 데 쓰이고 밭에서 일하는 농부는 모두 경작하는 종이 되어 농장이 있는 곳마다 모두 원성이 대단하니, 어찌 지벽(地癖)이란 기롱만 있겠습니까 (濱海築堰, 內地沃壤, 田亘阡陌, 盡入私占公家給種, 守令監農, 官倉儲穀, 半爲饁餉之資南畝農夫盡作耕耘之奴, 農庄所在, 闔境怨苦, 奚啻地癖之有譏哉? 此其貪贓之二也). .......”

 

[숙종실록보궐정오] 숙종 14; 1688); 충청 감사(忠淸監司) 이언강(李彦綱), 이상(李翔)이 상소한 가운데 유두성(柳斗星)을 조사하는 일 때문에 진소(陳疏)하여 스스로 변명하니, 임금이 의례적인 비답을 내리고 속히 조사하도록 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 ........................이상(李翔)은 시골에 살면서 세력으로 억압하여, 남이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온갖 방법으로 계획을 꾸며 빼앗아 가진 뒤에야 그만두었다. 한 번은 시골에 사는 선비로서 일찍이 그 문에 출입하는 자가 있었는데, 선비를 꾀어 그 여종과 간통하게 하여 이미 행랑에 들여보내고는 곧 남자종을 시켜 결박해 끌어내면서 꾸짖기를, ‘이 여종은 남편이 있는데, 네가 몰래 간통했으니, 죄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 장차 너를 관청에 고발하겠다.’ 하니, 그 사람이 두려워서 어떻게 할 바를 알지 못하였는데, 마침내 친하고 가까운 자를 시켜 중간에서 그 토지를 바치게 하자 풀어 주었다. 이상이 위세(威勢)를 빙자하여 백성의 토지를 빼앗은 것이 한둘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니, 세상에서 그를 일러 전지벽(田地癖)을 가진 학자라 하였다(喝曰: ‘此婢有夫, 而汝潛通之, 罪當死, 將以汝告官其人惶懼, 不知所出, 遂令親昵者居間, 納其田而解之翔之藉成勢奪民田, 非一二計, 世謂之田地癖學者).”

 

몇 년 전 어떤 장관 후보자의 부동산 투기가 문제가 되자 그저 자연의 일부분인 땅을 사랑했을 뿐이라고 해명한 것이 불현듯 떠오른다.

 

지금으로 치면 부동산투기를 예전엔 땅에 집착한다 해서 지벽혹은 전지벽이라 했던 것이다. 문제가 된 장관후보자도 <실록>의 필법대로 라면 자연의 일부분인 땅을 사랑한지벽(전지벽)이 되는 것이다.

 

상소를 일삼는 상소꾼도 있었다. 지금도 고소·고발을 남발하는 소송꾼이 있다지만 예전에 상소를 남발하는 사람을 상소꾼, 소벽(疏癖)’이라 했다. 1598(선조 31) 이귀(1557~1633)가 상소를 올리자 <선조실록>의 기자는 사론을 붙여 비난했다.

 

이귀는 벼슬이 없을 때부터 상소하기를 좋아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즉시 소매를 걷어붙이고 상소했다. 사람들이 이를 두고 상소 잘하는 벽이 있다하여 비웃었다.(人嘗笑其有疏癖)”

 

이 글은 경향신문 이기환의 [고려 조선의 '덕후', 그 기묘한 '덕질']에 첨삭하여 재구성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