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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등산과 벼락산에 얽힌 전설

淸潭 2016. 11. 30. 18:38

천등산과 벼락산에 얽힌 전설

고흥설화 / 설화



고흥의 풍양면은 고려 때는 풍안현이었다. 고려 충선왕 때 보성군 식촌부곡이 풍안현으로 승격될 당시 천등산을 배후로 송정리 일대에 관청이 만들어졌다. 식촌부곡이 풍안현으로 승격된 것은 환관 이대순 덕분이다.


이대순은 충렬왕 때 원나라 환관이 되어 우연한 기회에 공을 세워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어느 날 이대순이 지나가고 있는데 궁 안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궁녀들끼리 다투고 있는 것 같은데 가까이 가서 보니 다투는 것이 아니라 자그마한 체구의 궁녀 한 명이 동료들에게 일방적으로 고초를 당하고 있었다.


궁녀들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이대순이 보기에도 도를 지나치는 것 같아서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리고 나섰다.


“신성한 궁 안에서 이 무슨 짓들이오!”


이대순이 소리치자 표독한 눈빛과 앙칼진 목소리로 일제히 대들려던 궁녀들이 주춤하더니 일제히 물러갔다. 쿠빌라이가 총애하는 이대순임을 궁녀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순이 구해준 궁녀는 공교롭게도 공녀로 끌려온 고려 여인이었다. 궁녀의 이름은 소현이었다. 이역만리에 공녀로 끌려와 궁녀 생활을 하는 것도 억울한데 원나라 출신 궁녀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까지 하니 슬프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같은 고려 출신인 이대순이 소현을 구해준 것이다.


그 인연을 해서 이대순과 소현은 금지된 사랑을 나누었다. 꼭 사랑을 한다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친남매처럼 의지를 하게 되었다. 소현은 멀리 남도 땅 식촌부곡 출신이었다. 그곳에는 지금도 부모형제가 살고 있다 하니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이대순이나 소현이나 매 한가지였다.


쿠빌라이의 총애를 받는 이대순에게는 고려 조정에서도 청탁이 끊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이대순에게 이야기하면 거의 다 성사되었기에 때로는 충선왕이 직접 친서를 보내서 이대순에게 청탁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대순이 소현에게 물었다.


“내 그대에게 소원을 들어주고 싶은데, 소원이 무엇이오?”


그러자 소현이 대답하였다.


“다른 것은 없어요. 다만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서 편하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해서 이대순은 충선왕에게 부탁하여 소현의 고향인 식촌부곡을 풍안현으로 승격을 시키고 소현의 부모에게는 개별적으로 넉넉한 재물을 보내 여생을 편히 살게 하였다. 그리하여 1310년(충선왕 2년) 식촌부곡은 풍안현으로 승격되었다.


풍양면에 있는 천등산은 오랜 옛날 천등을 밝힌 곳이라 하여 천등산이라 부른다. 천등산에는 선덕여왕의 태가 묻혀 있다는 전설이 있다.선덕여왕(善德女王 ?~647년).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자 매우 지혜로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당 태종이 보낸 모란꽃 이야기이다. 선덕여왕이 즉위하자 당 태종은 빨강, 자주, 하얀색의 모란 그림과 그 씨앗을 선물로 보냈다. 그런데 여왕이 이를 보고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씨앗을 심어보니 과연 그랬다. 훗날 신하들이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여왕은 “그림에 나비가 없다는 것은 향기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당 태종이 남편이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어느 겨울날, 선덕여왕이 세운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서 개구리가 사나흘 동안 우는 일이 벌어졌다. 다들 영문을 몰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여왕은 각간 알천과 필탄에게 병사 2천을 주어 서라벌 서쪽 부산 아래 여근곡(女根谷)을 습격하게 하였다. 놀랍게도 여근곡에는 백제 장수 우소(亏召)가 매복해 있었다. 훗날 신하들이 물어보니 여왕은 “개구리가 심히 우는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요, 옥문이란 여자의 음부를 가리킨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백색인데, 이는 서쪽을 뜻한다. 또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쉽게 잡을 수 있었다.”라고 답하였다.


어느 날 여왕이 신하들을 불러 “내가 죽으면 도리천(忉利天)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이는 낭산(狼山)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이후 여왕이 죽은 뒤 신하들은 왕을 낭산 남쪽에 장사지냈다. 그 후 문무왕 때 선덕여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다. 이는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는 내용이 실현된 것이었다.

진평왕과 혼인을 한 마야부인은 혼인한 지 몇 년이 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하자 근심이 컸다. 성골(부모 모두가 왕족인 사람)만이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데, 이제 마야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 신라의 왕위는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진평왕 역시 마야부인이 걱정할까봐 말은 못하였지만 내심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 날 마야부인이 진평왕에게 말을 꺼냈다.


“전하. 황룡사에서 관세음보살께 천 배를 드리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그렇게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러자 진평왕이 말렸다.


“아니, 부인의 몸도 좋지 않은데 그 몸으로 어찌 천 배를 드린단 말이오. 당치 않은 일이오.”


하지만 진평왕도 내심 기대를 하고 있는지 그리 적극적으로 말리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마야부인이 황룡사에 가서 천 배를 드렸다. 천 배를 드리던 그날 밤 마야부인의 꿈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


“네 정성이 갸륵하여 뜻을 이루도록 하노라. 이미 너에게는 태기가 있다. 하지만 딸을 낳게 될 것이다. 딸을 낳거든 그 태를 하늘에 등을 높이 밝힌 산에 묻도록 해라. 그러면 아들을 갖게 될 것이다. 명심할 것은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마야부인은 신기한 꿈에 대하여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과연 마야부인이 태기가 있더니 얼마 후 덕만 공주를 낳았다. 덕만 공주를 임신한 10개월 동안 마야부인이 신라 전역으로 사람을 보내 산꼭대기에 등을 밝힌 곳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런 산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멀리 백제 땅 풍안현 인근에 그런 산이 있다 하여 사람을 보내 보니 과연 그랬다.


딸을 낳자 잔뜩 기대했던 진평왕은 실망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하지만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마야부인은 실망을 하지 않고 진평왕 몰래 사람을 시켜 공주의 태를 풍안현으로 보냈다.


부하들이 열흘 밤낮을 걸어 풍안현 인근 지금의 천등산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지난번에 등을 보았다던 사람조차 그곳을 제대로 찾지 못하였다. 할 수 없이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해가 지고 깜깜한 밤이 되니 멀리 산꼭대기에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것이 아닌가. 마야부인의 명을 받은 부하들이 어둠을 헤치고 겨우 산에 올라 전에 봐두었던 곳에 태를 묻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던 부하들 가운데 한 명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도대체 산꼭대기에 누가 등을 밝혀 놓았을까? 그리고 도대체 어떤 등이기에 멀리서도 저리 환하게 빛날까? 그래서 동료들을 부추겨 등 가까이로 가보았다.


‘공주의 태를 묻고는 곧바로 돌아오도록 해라. 등 가까이는 절대 가서는 안 된다.’


마야부인이 신신당부하던 말이 문득 떠오르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궁금한 것은 참기 힘들었다.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하고 다가서는 순간 부하들이 깜짝 놀라 일제히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신비하게 생긴 등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하들이 놀라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등이 점차 빛을 잃더니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런지 마야부인은 결국 내리 세 명의 딸을 낳고 말았다. 결국 진평왕이 후사를 잇지 못하자 화백회의에서는 덕만 공주를 여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러니 천등을 꺼버린 부하들이 선덕여왕의 즉위를 도운 셈이다.


한편, 천등산 인근에 있는 벼락산은 악산으로 소문나 있는데, 벼락산에는 천등산에 얽힌 슬픈 전설이 있다.


아주 오랜 옛날, 벼락산(587m)은 천등산(553m)보다 높았다. 본래 천등산보다 높은 것은 아니었는데 천등산을 시기한 벼락산이 조금씩 조금씩 높아지더니 급기야 천등산보다 높아진 것이다.


어느 날 밤 천상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던 옥황상제가 갑자기 노여워하였다. 천등산에 등을 밝혀놓고 매일 밤 그것을 내려다보는 것이 취미였는데, 갑자기 근처에 있는 산 하나가 천등산을 가렸기 때문이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어찌 내가 천등을 밝힌 산보다 높은 산이 있단 말인가? 천등산 일대에 있는 그 어떤 산도 천등산보다 높아서는 안 된다!”


옥황상제가 그렇게 노여워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결국 옥황상제의 명에 따라 어느 날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더니 벼락산 정상이 부서져버렸다. 하늘의 뜻을 어기고 무모하게 높이 오르려던 벼락산은 결국 지금의 높이인 431m가 되고 말았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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