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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과 모후실

淸潭 2016. 11. 30. 18:37

공민왕과 모후실

순천설화 / 설화

“똘이야! 똘이 어딨니?”


밥 때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는 똘이를 찾다 똘이 엄마도 포기하고 돌아섰다.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조그만 아이가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어흥’ 하면서 엄마를 놀래켰다. 하지만 익숙한 듯 똘이 엄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 엄마가 재미없었는지 똘이는 마루에 올라 밥을 게 눈 감추듯 말아먹고는 또 다시 밖으로 나갔다.


똘이가 막 동구밖을 향해 달려나가는데 멀리서 뿌연 먼지와 함께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였다. 시골마을에 웬 병사들일까? 똘이는 의아했지만 이내 아무 생각 없이 터벅터벅 마을 앞 개울을 따라 내려갔다. 그러면서도 연신 뒤를 힐끔힐끔 돌아봤다. 처음 보는 병사들의 옷차림이 제법 화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갑자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누군가와 부딪힐 뻔하였는데 그 사람이 똘이를 잡아주었다.


“고마...”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똘이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너무도 멋있게 생긴 아저씨가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주위에서 병사들이 달려들어 똘이를 저지하려 하였다. 너무 놀란 똘이가 순간 흠칫 하며 물러섰다. 그러자 똘이 앞에 있던 사람이 뭐라 손짓을 하니 모두들 물러났다. 지체 높은 귀인이 잠시 쉬기 위해 행차를 한 듯 싶었다.


처음 본 더벅머리 아이가 똘똘해 보였는지 귀인도 똘이가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말을 걸었다.


“어딜 가는 중이니?”


나지막하지만 너무나 근엄한 목소리여서 똘이는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 저 밑에서 피라미를 잡으려고요.”


“피라미?”


귀인은 신기하다는 듯 똘이를 따라나섰다. 호위병들이 만류하였지만 뿌리치고 똘이와 함께 개울로 내려간 귀인은 똘이가 피라미 잡는 모습을 보면서 재미있어 하였다.


“이걸 뭐하러 잡니?”


“탕을 끓여 먹으면 맛있어요.”


똘이는 피라미도 모르는 귀인이 한심하다는 투로 대답하였다.


그 귀인이 이 나라의 왕이라는 사실을 똘이가 알게 된 것은 며칠 지나서였다. 마을 사람들도 처음에는 서울의 귀족이 요양 차 내려온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내려온 공민왕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마을 이름을 왕대(王垈)마을이라 불렀다.


왕대마을에 왕의 거처를 마련한 병사들은 마을 뒤 나복산(蘿蔔山)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다섯 개의 구멍을 뚫고 오장깃대를 꽂았다. 멀리서 보아도 위엄이 서린 깃발이었다. 공민왕이 피난을 올 때 어머니를 모시고 왔는데, 어머니를 모신 마을을 모후실(母后實)이라 불렀고, 나복산 이름도 모후산(母后山)이라 새로 이름지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때 모후실을 후곡마을로 개명하였다.


왕대마을과 모후실은 직선 거리로 약 1.2km쯤 떨어져 있는데, 왕대마을과 모후실을 잇는 골짜기를 빈골이라 부른다. 공민왕의 호위 장수들이 왕과 모후의 연락을 취하기 위해 밤중에 말을 타고 이 골짜기를 넘나들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부싯돌로 쓰이는 돌들이 많았다. 그런 연유로 말을 달릴 때마다 돌들이 부딪혀 불꽃이 튀는 바람에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었기에 돌들을 한쪽으로 모두 치우게 되었다. 그래서 그곳을 차돌백이라 부른다.


어느 날 왕이 모후에게 들러 문안을 여쭈는데 모후가 왕에게 특별히 차려줄 것이 없어 안타까워하였다. 그러자 왕이 문득 똘이 생각을 하고는 병사들을 시켜 마을 앞 개울에서 피라미를 잡아오라 시켰다. 그리고는 마을 아낙에게 탕을 끓이게 하여 맛을 보았는데 왕은 물론 모후도 흡족해 하였다. 그래서 모후실에서는 피라미를 왕등어라 부른다. 낚시를 해도 잡히는 고기가 왕등어밖에 없는데, 왕의 밥상에 올랐다 하여 왕등어라 부른다는 것이다.


지금도 순천시 송광면 왕대마을 뒷산에는 커다란 바위에 5개의 구멍이 정교하게 뚫려 있다. 직경이 다섯 치(치는 한 자의 10분의 1로서 약 3cm)이고 깊이는 여섯 치 가량 된다. 공민왕이 오장깃대를 꽂았던 곳이다.


또한 공민왕이 왕대마을에 도착하기 전 잠시 머물렀던 마을은 ‘머무를 유, 서울 경’ 해서 지금도 유경(留京)마을이라 한다.


모후실(후곡마을)에서 조계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나타나는 가장 높은 봉우리 이름이 살피봉인데, 접근해오는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망을 서던 곳이라 한다.


그런데 공민왕이 안동에 피난 왔다는 기록은 있으나 모후산 일대로 피난 왔다는 사료는 없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 안동의 지명이 복주(福州)였고 화순군 동복의 옛 이름 역시 복주(福州)여서 지명의 혼동으로 인하여 이러한 전설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적도 있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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