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위인들(5) 이봉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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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크기란 그 정신에 있는 것이지 그가 가진 몸집이나 외모나 재산이나 학식이나 업적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뜻했던 바를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실패’를 통해 영원히 ‘성공’한 우리 근세사의 대표적 인물이 이봉창(1900-1932) 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1931년 상해로 가서 혁명투사 김구를 만났고 그의 권유로 ‘애국단’에 입단하였고 일본 천황 히로히또를 암살하기로 맹세하고 12월에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무슨 일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해치울 수 있는 ‘무서운 관상’을 타고난 특이한 인물이었습니다. 1932년 1월 8일, 일황이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니쥬바시로 돌아갈 때 그는 사꾸라다문 밖을 통과할 일본 왕을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당대 막부의 막강한 권세를 독차지했던 대원로 이이나오스케가 암살을 당하여(1860년) 쓰러진 바로 그곳에서 일황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다가 준비한 수류탄을 던졌으나 근위병이 부상을 입었을 뿐 히로히또는 무사하였습니다. 이봉창의 거사는 실패로 끝났고 그는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는 실패했고 그의 삶은 비극으로 마감이 되었으나 그의 꿈은 결코 좌절되지 않았고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보다 더 큰 꿈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는 자기 몸을 조국의 제단에 바침으로 조국에 대한 보다 더 큰 사랑을 이룬 것입니다. 그의 그 꿈은 후배인 윤봉길 의사에 의해 중국 땅 상해의 홍구 공원에서 성취되었습니다. 때는 1932년 4월 29일,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그 모임에서 윤봉길이 던진 점심 그릇에 숨긴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는 바람에 일본군 사령관 시라가와는 붕 떴다가 떨어져 며칠 뒤 병원에서 사망했고, 일황은 죽지 않고 살아있긴 했으나 그의 생일잔치가 그렇게 아수라장이 될지는 몰랐을 것입니다. 그의 생일잔치는 전 세계 앞에 일본의 치부를 여실히 드러낸 셈입니다. 이봉창의 실패의 고통이 없이 윤봉길의 회심의 미소가 과연 가능했을까 거듭거듭 생각해 보게 됩니다. 1930년대는 뜻이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극심한 시련의 계절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대항이 거의 불가능하게 여겨지던 10년이었습니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은 날마다 이기고 있다고 하고, 일본이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의 맹주가 되는 것이 확실시되던 그 때, 일본 천황의 ‘공공연한’ ‘암살’을 시도한 서른 두 살의 늠름한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 청년이었고 그의 이름은 이봉창이었습니다. 그의 의분(義憤)은 오늘도 이 겨레의 가슴 속에 약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백성의 구겨진 자존심을 살려 주었습니다. 김동길 www.kimdonggi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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