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설 22년 전 115명 탄 KAL기 폭파 테러… 범인 김현희 ‘북한 공작’ 입증해 사면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오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해역에서 공중 폭파됐다. 기내에는 한국인 승객 93명과 승무원 등 115명이 탑승해 있었다. 승객은 대부분 중동에서 귀국하던 근로자들이었다. 사건 15일 만에 양곤 동남쪽 해상에서 파손된 KAL기 부유물 7점이 발견됐다. ‘비행 중 폭발에 의한 추락’임을 보여준다. 수사 결과 이 여객기는 ‘북한의 대남공작원 김승일(하치야 신이치라는 일본인으로 위장)과 김현희(하치야 마유미로 위장)가 술로 위장한 액체 폭발물(PLX)과 시한폭탄을 기내에 두고 내렸으며 이로 인해 폭파됐음이 밝혀졌다. 이들은 김정일의 친필 지령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살아남은 유일한 증인이자 범인인 김현희는 사형이 확정됐다. 하지만 사건이 북한에 의해 자행된 국가적 범죄였음을 입증한 공로로 한참 뒤 특별사면을 받았다. 김현희는 특수공작원 훈련을 받던 중 만난 납북 일본 여성(다구치 야에코=리은혜)의 존재를 밝혀, 납북 일본인 문제를 일본과 북한 간의 새로운 외교 현안으로 부상시키기도 했다.
음모론적 주장
“탑승자 유해·유품, 블랙박스 등 전무 대선 전날 김현희 압송해온 것도 수상”
안기부는 1990년 “안다만 해역에서 비행기 잔해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안기부는 “잔해에 남은 88올림픽 표지와 태극마크로 미뤄 폭파된 KAL기가 틀림없다”면서도 “115명 탑승자의 유해나 유품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 ▲ 대한항공 858기를 폭파한 북한공작원 김현희의 범행 직후 모습(왼쪽)과 그가 중학생이던 1972년 11월 2일의 모습. / photo 조선일보 DB
- 당시 안기부는 김현희가 북한 테러리스트임을 입증하는 사진 3장을 발표했다. 첫째는 1972년 11월 평양을 방문한 남북조절위원회의 남측 대표 장기영씨에게 꽃다발을 선물한 평양 화동 김현희, 둘째는 일본 하기와라 기자가 1972년 평양주재 당시 찍은 화동 김현희, 셋째는 평양서 꽃다발을 증정하려고 대기하는 화동 김현희의 사진이다. 김현희는 이 세 장의 사진에 대해 ‘내 것이 맞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음모론 주장자들은 몇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먼저 사진에 나온 화동의 귀는 동그란데, 김현희의 귀는 세모꼴이란 주장이다. 그들은 “귀는 지문과 마찬가지여서 레슬링 같은 과격한 운동이나 성형에 의하지 않고는 변하지 않는 다”는 성형외과 전문의 견해를 들어 사진의 진실성에 이의를 제기했다. 둘째로 그들은 “정희선이란 북한 여인이 ‘사진 속 화동은 나’라고 밝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희선이란 여인이 1988년 3월 외신기자회견을 한 장소가 북한이었음이 드러나면서 거꾸로 북한이 음모론을 조작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야기시켰다.
우리 정부는 기체의 결정적 부위나 탑승객 유품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고 10일 만에 현지조사단을 철수, 수색을 중단했다. 가장 중요한 증거품이 될 수 있는 블랙박스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블랙박스를 찾으려면 발신음 추적을 위한 ‘수중공명위치탐지기’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음모론자들은 정부가 보잉사에 이 기계를 요청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며 이 역시 간과하기 힘든 대목이라고 주장한다.
김현희는 대선 하루 전날 서울로 압송됐다. 정부는 “바레인 측 사정에 의해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중앙일보는 10년 뒤인 1996년 4월 선거철마다 불거진 북풍(北風) 변수를 전하면서 “1987년 박수길 당시 외무부 차관보가 바레인 당국에 거의 떼를 쓰다시피 해 압송 타이밍을 맞췄다고 한다”고 전했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특정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공작 차원에서 이 사건이 활용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한편 이 같은 일련의 음모론에 대해 김현희 본인은 최근 월간조선을 통해 “노무현 정부의 국정원이 나를 MBC에 출연시켜 바보로 만들려고 했으며 국정원 간부로부터 이민 권유를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참여정부로부터 ‘KAL기 폭파 사건은 남한에 의해 조작됐다’는 진술을 하도록 강요받았다”며 “방송 제작진이 내 집을 기습 촬영해 사생활을 노출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또 “KAL기 사건은 북한 소행임이 명백한데도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이중적 태도를 견지했다”며 “이로 인해 5년간 주부로서 평범한 생활이 어려워져 도피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김씨는 또 KAL기 사건과 관련된 과거사위의 활동도 음모라고 주장했다. 그는 “검찰과 사법부에 국정원의 위법 사실을 알렸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고 했다. 요컨대 김현희 주장의 핵심은 “북한은 존립을 위해 대남 테러사건을 일으켰고, 남한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조작설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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