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역사의기록

1960년 5월16일

淸潭 2016. 5. 16. 10:37

5‧16이 언제 있었던가?

 

1960년은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 대서특필을 할 만한 매우 중요한 한 해였습니다. 3월 15일에 대통령‧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그 선거 결과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4선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미 12년 권좌를 지키면서 그 북새통에 대한민국 정부를 세웠고 인민군의 남침과 오랑캐의 인해전술(人海戰術)을 유엔군과 합산하여 훌륭하게 물리친 민족사의 영웅이 네 번째 도전에도 승리한 사실이 왜 문제가 된 것이었을까?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이 통하는 군왕의 시대라면 임금이 만세수를 누리고 그 왕조가 천년만년 이어지기를 백성이 바랄만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 국가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라도 10년 이상 장기 집권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민주사회에서는 어디서나 선거권‧피선거권을 가진 유권자들이 모두 “나도 저 자리에 오를 수 있다”라는 부질없고 주제넘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든 같은 사람이 그 자리를 오래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장기집권을 하는 권력자의 주변에는 모시고 받드는 그 어른이 그 자리를 지켜줘야 그 졸도들도 각자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단순 논리가 작용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러한 그들의 욕심은 깊숙이 감추어두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라면서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연막을 치기 때문에 그들의 본심을 헤아리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선거를 부정하게 하지 않고는 그 졸도들의 야망을 달성하기는 어렵습니다. 민심이 이미 이탈한 사실을 대통령 자신은 잘 모르기 때문에 당시의 최인규 내무부장관을 비롯한 머리 좋은 사람들이 주동하여 부정선거를 획책한 것입니다. 최인규는 뒤에 재판 받고 사형이 선고됐고 사형이 집행되어 현저동 1번지 서대문 감옥의 비류나무 그늘 교수대에서 ‘아침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4‧19의 혼란 속에서 부통령에 당선됐던 이기붕 일가는 집단 자살하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국무부와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의 권유로 다시 하와이로 건너가 영욕(榮辱)이 엇갈린 90 생애를 거기서 마감하였습니다.

그 혼란 속에서 민주당의 산파로 알려진 장면이 내각책임제에 따라 총리로 선출이 되었지만 그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그 정권을 단 1년도 끌고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좀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정리정돈이 이루어졌을까요? 과연? 모를 일이긴 하지만 장면이 성공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55년 전 오늘 새벽,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혁명군이 요란한 총성으로 잠든 서울을 흔들어 깨웠을 때 서울에는 8군 사령관 Magruder와 허정(許政)이 있었을 뿐입니다. 장면은 Carmel수녀원에 피신하고 서울에는 없었습니다. 국무총리 장면은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처럼 피와 땀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 날이 55년 전이었다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김동길
www.kimdonggi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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