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세상사는 이야기

아빠 회사 갔다올게'하고 고시원 다닌 실직 家長, 아내·딸 살해

淸潭 2015. 1. 7. 11:11

 

엘리트 코스 밟아온 40대 家長, 아내·딸 살해

  • 곽래건 기자

     

  • 김정현 기자
  • 이벌찬 기자
  • 입력 : 2015.01.07 03:00 | 수정 : 2015.01.07 10:17

    외국계 기업 임원 퇴직후 江南아파트 담보 주식 투자 실패
    자녀들에겐 직장 다니는 것처럼 보이려 고시원 다녀
    어제 범행후 도주했다 잡혀 "미래 희망 없다는 생각에…"

    11억원대인 서울 강남 고급 아파트에 살던 40대 가장이 집에서 아내와 두 딸을 목 졸라 살해하고 달아나 자살을 시도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이 비정한 가장은 경찰에서 "외국계 기업을 다니다 실직한 뒤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받아 주식투자를 하다 수억원을 날려 희망이 없다는 생각에 일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6일 서초구 자신의 아파트에서 아내 이모(43)씨, 중학생 큰딸(13)과 초등학생 작은딸(8)을 살해한 혐의로 강모(47)씨를 경북 문경에서 체포해 서울로 압송했다. 강씨는 이날 새벽 가족 모두를 목 졸라 살해한 뒤 오전 5시 6분쯤 자신의 혼다 어코드 승용차를 타고 도주했었다.

    서울 서초구의 아파트에서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하고 도주한 혐의를 받는 강모씨가 6일 오후 후드 모자를 눌러쓴 채 서초경찰서로 압송되고 있다. 강씨는 이날 오전“가족을 살해했다”며 119에 신고하고 도주했다가 낮 12시 10분쯤 경북 문경에서 붙잡혔다. /장련성 객원기자
    경찰에 따르면 강씨는 이날 오전 6시 30분쯤 충북 지역에서 119에 전화해 "내가 아내와 두 딸을 죽였다. 나도 죽으려 나왔다"고 신고했다. 강씨는 당시 차분한 목소리로 아파트 동·호수뿐 아니라 현관문 비밀번호까지 알려줬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소방대원들은 집 안에서 세 사람의 시신을 발견했다. 아내 이씨는 거실에 누워 있었고, 큰딸은 큰방 침대 옆 바닥에서, 작은딸은 작은 방 침대 위에서 누운 채 발견됐다. 소방 관계자는 "세 사람은 이미 숨진 상태였다"고 말했다.

    현장에서는 강씨가 쓴 A4용지 2쪽 분량 유서가 발견됐다. 유서에는 '빚이 자꾸 늘어나 더 이상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습니다' '참다 참다가 경제적으로 너무나도 어려워져서 더 이상은 못 참는 꼴이 됐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미안해 여보, 미안해 ○○아(딸), 천국으로 잘 가렴. 아빠는 지옥에서 죗값을 치를게' '통장을 정리하면 얼마간 좀 남을 텐데, 부모님, 장인·장모님 치료비와 요양비로 쓰십시오'라고도 적혀 있었다.

    이 가족이 살던 아파트는 146㎡(44평)짜리로 매매가가 11억원 안팎이다. 강씨는 2004년 5월 이 아파트를 구입했고, 당시엔 대출을 끼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명문 사립대 경영학과를 나와 외국계 IT 기업 한국지사에 다니던 강씨는 2012년 12월 회사를 그만뒀다. 강씨는 이 회사에서 회계 업무를 담당하며 상무까지 지냈으나, 다른 계획이 있다며 스스로 퇴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신의 실직 사실을 자녀들에게 숨기기 위해 선후배 사무실을 오가다 최근 1년 동안은 서초구의 한 고시원에 다녔다.

    실직 한달 전 강씨는 은행에서 아파트를 담보로 5억원가량을 대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강씨는 경찰에서 "대출받은 돈으로 아내에게 생활비로 매월 400만원씩을 주고 나머지로 주식투자를 하다가 2억7000만원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는 "남은 돈으로는 희망이 없을 것 같아 유서를 써놓고 일(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주변 부동산 업소에 따르면, 강씨의 아내 이씨는 작년 하반기부터 인근 부동산 업체에 아파트 시세를 물어봤다고 한다. 그는 부동산에서 매매의향을 묻는 전화를 하자 "아직은 아닌 것 같다" "집 매매는 남편과 상의해 알려주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근 주민은 "부부 모두 명문대 출신이고 전업주부인 아내는 멋을 내지 않는 수수한 스타일이었다"고 했다. 인근 학원 원장은 "두 딸 모두 성격이 활발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고 했다. 큰딸이 초등학생 시절인 수년 전엔 하와이로 함께 가족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강씨의 부모는 경찰에서 "아들이 고생을 안 하고 자라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씨는 이날 낮 12시 10분쯤 경북 문경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붙잡힐 당시 바지가 젖어 있던 상태여서 경찰은 강씨가 대청댐 근처에서 자살 시도를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왼쪽 손목에도 칼로 그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강씨는 당시 저항하지 않고 체념한 모습이었다고 경찰은 전했다. 강씨는 체포 직후 "내가 살아서 뭐 하겠나" "담배 하나만 달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후 4시 50분쯤 서초경찰서에 도착한 강씨는 취재진의 질문에 일절 대답하지 않았다. "생활고 때문이었느냐" "가족과 함께 죽으려 한 것이냐"는 물음에는 고개를 끄떡였고, 감정이 격해진 듯 어깨를 들썩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