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보지재(七步之才)
삼국 시대의 영웅이었던 위왕(魏王) 조조(曹操)는 무장 출신이었지만
건안(建安) 문학의 융성을 가져왔을 정도로 시문을 애호하여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맏아들인 비(丕:186∼226)와
셋째 아들인 식(植)도 글재주가 출중했다.
특히 식의 시재(詩才)는 당대의 대가들로부터도 칭송이 자자했다.
그래서 식을 더욱 총애하게 된 조조는 한때 비를 제쳐놓고 식으로 하여금
후사(後嗣)를 잇게 할 생각까지 했었다.
비는 어릴 때부터 식의 글재주를 늘 시기해 오던 차에 후사 문제까지 불리하게 돌아간 적도 있고 해서 식에 대한 증오심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조조가 죽은 뒤 위왕을 세습한 비는 후한(後漢)의 헌제(獻帝:189∼226)를 폐하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시호 문제(文帝:220∼226)] 국호를 위(魏)라고 했다.
어느 날, 문제는 동아왕(東阿王)으로 책봉된 조식을 불러 이렇게 하명했다.
"일곱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시를 짓도록 하라.
짓지 못할 땐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니라."
조식은 걸음을 옮기며 이렇게 읊었다.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煮豆燃豆기(자두연두기)]
가마솥속에 있는 콩이 우는구나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어찌하여 이다지도 급히 삶아 대는가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부모를 같이하는 친형제간인데 어째서 이다지도 심히
핍박(逼迫)하는가'라는 뜻의
칠보시(七步詩)를 듣자 문제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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