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뮌헨 무대 올라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진은숙
“음악이란 엔터테인먼트나 휴식, 위로받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현대음악 작곡가로 조명받고 있는 진은숙 씨. 그는 “작곡가는 대중을 이끌어 가야지 대중에 영합하기 위해 수준을 낮춰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변영욱 기자 |
“창작음악 홀대하면 문화 발전 없어요’
6월 30일 132년 전통의 독일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 개막작으로 재독 작곡가 진은숙(46) 씨의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성황리에 세계 초연됐다. 280년 역사의 뮌헨 바이에른 주립 오페라극장에서 여성 작곡가가 만든 오페라가 초연된 것은 초유의 일이었다. 유럽 주요 오페라극장에서 한국 작곡가의 작품이 초연된 것은 1972년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 이후 35년 만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초연은 독일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바이에른 주의 중심지 뮌헨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루이스 캐럴의 원작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원작으로 한 이 오페라는 중국계 미국 극작가 데이비드 헨리 황이 대본을 쓰고, 독일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가 연출했다. 독일 오페라 전문지 ‘오퍼른벨트’는 이 작품을 ‘올해의 초연’으로 뽑았으며, 국내에서도 진 씨는 경암교육문화재단이 수여하는 ‘경암학술상’ 예술분야 수상자로 선정됐다.
서울시향 상임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는 진 씨가 11월 2, 6일 자신이 기획하는 현대음악 콘서트 ‘아르스 노바’를 앞두고 귀국했다. 그를 23일 오전 서울시향 예술감독실에서 만났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초연의 의미는….
“현대음악가 중에는 더는 오페라 창작은 할 수 없다, 오페라 하우스를 폭파시켜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옛 장르인 오페라를 현대적 음악어법으로 드라마를 서술해 나가기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초현실주의적인 어른들을 위한 동화였기 때문에 현대적 어법으로도 작곡이 가능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남녀간의 사랑을 소재로 한 현대 오페라는 더는 쓰기 힘들 것 같다.”
―지휘자, 대본 작가, 작곡가까지 모두 동양계였는데….
“바이에른은 베를린과 달리 엄청나게 보수적인 도시다. 뮌헨에서 연주장에 들어섰을 때부터 ‘당신이 왜 여기 왔느냐’는 식의 눈빛을 받았다. 페스티벌 오프닝 날에는 정재계 인사들이 정장을 하고 왔는데, 개막공연 도중 한쪽에선 ‘브라보!’를 외치고, 한쪽에선 ‘푸!’ 하고 야유를 보내는 등 한마디로 거대한 스캔들이었다. 첫날엔 드레스 자랑하러 온 사교계 인사들이 많아 그러려니 예상했다. 그러나 둘째, 셋째 날에는 진짜 음악을 들으러 온 사람들이어서 반응도 훨씬 좋았고 박수도 더 뜨거웠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진 씨가 1990년부터 현대음악적 영감을 받아 왔던 텍스트였다.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연주되는 소프라노와 앙상블을 위한 ‘말의 유희’도 이 동화를 소재로 한 작품. 진 씨의 스승인 현대음악의 거장 죄르지 리게티(1923∼2006)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소재로 ‘난센스 마드리갈’이란 곡을 작곡한 바 있다.
“수수께끼처럼 복잡한 스토리를 듣기 편하고 익살스러운 음악으로 풀어내려고 했어요. ‘12음기법’을 비롯해 제가 기존에 써 오던 현대적 음악어법은 악기하고는 잘 어울리지만 인성(人聲)으로 노래할 때는 잘 맞지 않아요. 그래서 바흐, 헨델 등 옛 음악까지 모두 끌어들여 뮤지컬처럼 듣기 편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현대음악은 진지하고 어렵다는 편견에서 벗어나 유머와 익살, 아이러니, 패러디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진 씨는 2004년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음악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그라베마이어상’을 수상하면서 세계 현대작곡계의 샛별로 떠올랐다. 이 상은 리게티, 다케미쓰 도루, 탄둔, 피에르 불레즈 등 거장 현대음악 작곡가들이 받았던 상이었다. 지난해부터는 서울시향 상임작곡가로 1년에 두 차례씩 ‘아르스 노바’ 콘서트를 통해 현대음악 불모지인 국내에 새로운 음악을 소개해 왔다. 다음 달 2, 6일 음악회에서는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등이 참여한다. 02-3700-6300
“국내에서 창작음악이 인기 없나요? 그것은 관객들의 탓이 아닙니다. 음악이 좋으면 왜 안 듣겠습니까. 창작계 문제, 더 나아가 창작을 홀대하는 사회적인 문제가 더 큽니다. 앞으로 100년, 200년 후에도 브람스, 베토벤의 심포니를 듣고 있을까요? 문화의 역사는 창작을 통해 앞으로 나가는 것이지, 연주를 통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진 씨는 서울대에서 강석희 교수를 사사하고 1985년 유학을 떠나 독일학술교류처(DAAD)의 장학금을 받으며 1988년까지 독일 함부르크에서 리게티를 사사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국내 젊은 작곡가들을 위한 무료 마스터클래스를 열고 있다.
“13세 때 정경화 선생님이 연주하는 스트라빈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고 정말 괴상한 현대음악에 충격을 받았어요. 어릴 적부터 음악에 호기심이 많았는데 제대로 된 음악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피아노, 음악이론을 배워 대학에 들어갔습니다.한국은 독일과 비교했을 때 레슨비가 엄청나게 비쌉니다. 돈이 있어야 음악을 배울 수 있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진 씨는 2008년 영국 BBC프롬스에서 초연될 첼로협주곡을 작곡 중이며, 뮌헨 바이에른 주립극장으로부터 2013년 공연될 오페라 ‘거울 뒤의 앨리스’ 작곡을 위촉받았다. 그는 “체스 경기를 소재로 한 ‘거울 뒤의 앨리스’는 모든 것이 거꾸로 보이는 세상을 배경으로 한층 복합적이고 수학적, 철학적 유머가 담긴 극”이라고 소개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진은숙: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 음대 작곡과(강석희 사사), 독일 함부르크 음대(죄르지 리게티 사사) △베를린 도이체 심포니 오케스트라 초빙작곡가(2001년), 서울시향 상임작곡가(2006년) △수상 경력 ‘그라베마이어상’(2004년), ‘아널드 쇤베르크상’(2005년), ‘하이델베르크 예술상’(2007년) △주요 작품 ‘말의 유희’(1991∼93년), ‘기계적 환상곡’(1994년), ‘앙상블과 전자음악 Xi’(1997∼98년), ‘바이올린 협주곡’(2002년),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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