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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정교육재단’ 운영/ 이종환

淸潭 2010. 2. 1. 15:37

[초대석]‘관정교육재단’ 운영 이종환 삼영화학회장




이종환 관정교육재단 이사장은 돈을 버는 일은 천사처럼 하지 못했지만 돈을 쓰는 일만은 천사처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김미옥 기자

《지난해 말 ‘기업의 사회 기여’, ‘이익의 사회 환원’이란 말이 세간의 화두였던 때 한 기업인이 “기업은 돈 많이 벌어 세금 잘 내는 것으로 국가에 기여하는 것이다. 기업은 자선기관이 아니다”고 ‘항변’해 화제가 됐다. 삼영화학그룹 이종환(李鍾煥) 회장에게 이에 대해 물었다. 연간 매출 3000억 원 규모의 ‘중견그룹’인 삼영화학을 창업해 반세기 동안 경영해 온 평생 기업인인 그는 5년 전 ‘관정교육재단’을 설립해 4850억 원(2005년 현재 누적액)의 재산을 아낌없이 출연했다.》

○ 학생 1200명에게 100억 원 지급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모든 기업이 거기에만 머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기업인이 기업 활동의 결과로 축적한 자기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것은 기업 경영과는 별개의 문제겠지요. 작은 기부를 통해 미래의 재목이 될 인재를 길러낸다면 그것보다 더 큰 사회 기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장학사업에 자신의 기부를 집중하고 있다. 그밖에도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장애아동…,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다른 분야도 많은데 왜? 그는 “내 재산이 무한한 것도 아니고 역량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모든 것을 다하려 하면 이도 저도 안 된다. 하나라도 제대로 해야 할 것 아니냐”고 말한다.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관정교육재단은 장학재단으로는 단연 국내 최대 규모다. 지난해 주로 이공계 전공자를 대상으로 국외유학생 300명과 국내 대학 재학생 900명에게 총 100억 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그 장학금은 4850억 원의 출연재산에서 나오는 이자와 임대료 등의 수입으로 충당한다. 국외 유학생에게는 최대 5만 달러까지 지급해 학비 걱정 없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는 27년 전 유럽을 여행하면서 인재 양성을 위한 장학사업의 뜻을 세웠다고 한다. “좁은 국토에 특별한 자원도 없는 데다 3개 언어의 다민족이 섞여 사는 열악한 조건에서도 스위스는 세계 최고의 부를 일궈냈습니다. 그걸 보면서 우리도 인재만 잘 키우면 스위스 못지않게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는 학생, 우수하지만 좀 더 용기를 북돋워줘야 할 학생들을 지원해 준다면 언젠가는 그중에서 세계적인 인재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때부터 몇몇 학교와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기 시작했다. 2000년 10억 원의 기금으로 재단을 설립하고 2002년에 3000억 원을 출연했다. 그후 꾸준히 출연 재산을 늘려 왔고 최근엔 이를 올해 말까지 6000억 원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내부행사에서 발표했다. 하지만 노출을 즐기지 않는 그의 성격 탓에 이 ‘6000억 원 출연 계획’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뉴스’다.
―몇천억 원의 재산을 내놓기로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일단 출연하는 순간부터 남의 재산이 되는 것이니….
“내가 좀 결단력이 있는 편입니다. 술을 한번 끊으면 단번에 끊고, 담배도 그래요. 담배는 1981년 7월 19일에 끊었습니다. 당시 새롭게 시작한 세라믹 사업이 잘 안돼 심란하던 상황이라 줄담배를 피웠지요. 그날 아침도 일어나기 전에 담배를 찾다가 ‘에이, 오늘부터 끊어버리자’ 하고 결심한 게 여태까지 이어졌습니다. 재산 출연도 그 이전부터 생각하던 것인데 어느 날 갑자기 결심이 서더군요. 돈이란 게 말이죠, 단념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하나도 아깝지 않더라고요. 지금도 혹 부동산을 팔게 되면 ‘이걸 보태서 재단을 튼튼하게 해야지’하는 마음부터 듭니다.”
―본인은 안 쓰고 아끼다가도 자식에겐 되도록 많이 물려주려는 게 한국 사람의 속성인 듯합니다. 그래서 ‘자식에게 못 물려줄 것이면 뭣 하러 재산을 모으느냐’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 자식에겐 자립할 만큼만 물려줘
“재산은 자식의 자질에 맞게 물려주면 됩니다. 특히 기업은 그렇습니다. 기업은 어차피 개인 것도 아니잖습니까. 재능 없는 자식에게 물려줘서 없어질 것 같으면 사회에 환원하는 게 낫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자식에게 전혀 물려주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자식이 자립할 수 있을 만큼은 물려줬습니다.”
그는 회사 경영에도 가족의 관여를 일절 배제하고 있다. 1923년생, 82세의 노인답지 않은 신식 스타일이고 겉으로 보기엔 60대밖에 안돼 보일 정도로 정정하다. 그렇다고 그를 고생 모르고 지낸 ‘귀공자’나 ‘한량’쯤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메이지(明治)대 경상학과에 유학하던 중 학병으로 끌려가 만주에서 사선을 넘나들었고 광복 후엔 좌우 혼란과 6·25전쟁의 고난을 고스란히 체험했다.
1959년, 여기저기서 구해들은 지식을 바탕으로 당시로선 신소재였던 플라스틱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플라스틱 컵과 젓가락 등을 만드는 ‘삼영화학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한 것. 그때부터 거의 공장에서 살다시피 하며 회사를 일궜다. 그는 그 과정에 대해 “그때는 휴일을 몰랐다. 경영주로서 공장에서 솔선수범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고 간단하게 설명했다. 솔선과 근검이 몸에 밴 탓에 그는 지금도 점심은 자장면으로 때우는 것을 좋아한다.
그 삼영화학을 모체로 ‘고려애자’, ‘극동도기’, ‘삼영화학 다롄(大連)공사’, ‘제주 컨트리클럽 골프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해 현재 15개 법인을 망라하는 ‘그룹’으로 사업을 늘렸다. 대재벌은 아니지만 ‘빚 하나 없을 정도로 건실한 기업들’이라고 한다. 이 정도로 기업을 키우기까지 경영 노하우가 있었다면 ‘사람 중시’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자손에게 한 광주리의 황금을 물려주기보다 한 권의 책을 가르치는 게 낫다지 않습니까. 그게 어디 가정에만 적용되는 말이겠습니까. 기업도, 나라도 마찬가지죠. 나는 구두쇠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경비 절약을 강조하고 때로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챙깁니다. 하지만 최고 설비를 들여오거나 최고 인재를 데려오고 키우는 데에는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내가 장학사업을 하는 것도 최고 인재를 길러내야 기업이 크고 나라가 번영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 재단 장학생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는 게 제 꿈입니다.”
○ 사람중시 경영으로 알짜기업 일궈
성공한 기업인의 역사는 아름답게 포장되는 게 상례다. 한 기업의 성공 뒤에는 수많은 희생과 굴곡이 있으련만, 그런 것들은 철저히 감춰진다. 이에 대해 그는 어떤 설명을 할까.
그는 “내가 기업을 하던 때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과도 같은 시기였다. 기업 활동이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나도 천사 같지는 않았다. 돈 버는 방법이 거칠었음을 인정한다”고 말한다. 특히 한국에서 기업을 하는 한 ‘청부(淸富)’는 애초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세계 최대의 부자였다는 록펠러는 한창 시절 불법 거래와 정경유착을 통해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록펠러 재단’ 등을 통해 그 재산을 대부분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나는 록펠러만큼 거부(巨富)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가 악인과 선인이란 평가를 동시에 받게 된 이유를 많이 생각합니다. 내 인생에도 선악의 양면이 있겠죠. 다만 남은 생은 선으로 악을 씻는 일에 더욱 노력할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윤승모 기자 ysmo@donga.com

▼이종환 이사장은▼

△1923년 경남 의령 출생

△1942년 마산공립중학 5년 졸업

△1944년 일본 메이지대 경상학과 2 년 수료

△1959년 삼영화학공업㈜ 설립

△1978년 고려애자 설립

△2000년 기금 10억 원으로 관정이종 환재단 설립, 이사장

△2002년 관정이종환교육재단으로 재단명칭 변경, 3000억 원으로 기 금 확충

△2003년 금탑산업훈장

△2004년 중국 현지법인 ‘삼영화학 다롄(大連)공사’ 설립

△2004년 백범정신실천문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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