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제2기 국가인권委 최영도 위원장
《‘초대 인권위원장으로 누가 최적임자라고 보는가.’ 2001년 6월 제1기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하기 전에 인권운동사랑방이 국내의 인권 관련 인사 100명에게 물었다. 이 조사에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회장을 지낸 최영도(崔永道·67) 변호사가 25명의 추천을 받아 최다 득표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04년 말 그는 제2기 인권위 위원장에 임명됐다. 10일 집무실에서 만난 그에게 소감부터 물어봤다.》
“국가인권기구가 탄생한다면 초대 위원장으로 가장 적절한 인사는 고 황인철(黃仁喆) 변호사라고 생각해 왔다. 그가 일찍 사망한 것이 안타깝다. 나로서는 1973년 판사 법복을 벗은 후 32년 만의 공직 복귀다. 뜻밖의 일이다. 지난 20∼30년간 추구해 온 인권이라는 가치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여서 어깨는 무겁지만 기쁘다. 포부가 있다. 한국이 친인권적 국가로 거듭날 수 있도록, 개개인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무엇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힘을 쏟겠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의 삶은 ‘인권’이란 주제로 응결돼 있다. 그가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대답은 의외로 간결했다.
“법률가라면 당연히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는 1971년 제1차 사법파동의 주역이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소장 판사들이 ‘사법권독립침해사례’라는 문건을 만들어 대법원장에게 전달했다. 그 자리에서 ‘검찰의 사법권 침해가 이처럼 극심하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없다. 법무부 장관 등의 인책 퇴진을 대통령께 건의하고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 달라’고 건의했다. 당시 내가 그 자리에 있어서였는지 주동자 취급을 받았고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권한을 행사한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그는 이후 인권 및 시국 변호사로 살면서 1986년 정의실천법조회(정법회) 창립발기인, 1988년 민변 창립발기인으로 일했다. 대한변협 인권위원장, 민변 회장을 거쳐 1998년에는 ‘올바른 국가인권기구실현을 위한 민간단체 공동대책위원회’라는 무척 이름이 긴 단체의 상임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변론을 맡은 사건 중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없는가.
“무죄판결을 받은 사건이라야 기억에 남을 텐데 시국 및 인권사건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일이 없다. 심지어 ‘일부 무죄’도 없는 ‘패소 전문 변호사’였다. 하도 패소만 하다 보니 1980년대 6월 민주항쟁을 전후해 변호사들끼리 ‘우리가 변론하니까 역효과가 난다. 우리 때문에 오히려 형이 무거워지는 것 같다. 우리는 변론을 맡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얘기도 했다.”
껄끄러운 질문을 몇 가지 던졌다.
―인권 시민단체들은 1기 인권위 활동에 대해 ‘인권현장에 뛰어들어 상황을 개선하기보다는 심의에만 매달려 판사처럼 보였다’고 비판한다. 사람이 아니라 서류만 본다는 것이다. 또 다양한 비정부기구(NGO)와 연대하지 못해 우군이 없다는 지적도 있다.
“비판을 겸허히 수용한다. 현실 문제의 해결을 위한 태스크포스를 구성하고 현장조사 인권교육 등에도 나름대로 힘을 쏟았지만 만족스럽지 않아 ‘심의기관화됐다’는 비판이 나왔을 것이다. 인권침해 사건 발생 후 대응하는 것은 물론 현장활동을 통해 예방하겠다는 것이 내 취임사의 두 번째 강조점이었다. 인권단체들과의 연대에도 힘을 쏟겠다.”
―인권위원 인선이 대통령, 대법원장, 국회(정당)가 배분하는 형태로 이뤄져 ‘나눠먹기’라는 비판이 있다. 이 때문에 일부 인권위원의 경우 전문성과 인권감수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는데….
“지적에 동의한다. 하지만 나눠먹기 폐해가 있다고 해서 어느 한 사람이 전원을 임명하도록 하는 것은 더욱 바람직하지 않다. 선출권자들이 좀 더 신중하게 선발하고 제대로 검증해서 역량과 인권감수성이 높은 사람을 뽑는 방법밖에 없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가르쳐 달라.”(함께 웃음)
1기 인권위는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 이라크 전쟁 반대, 사생활 침해 방지를 위한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개선 권고 등의 견해를 밝혔다.
―국보법, NEIS, 파병과 같은 정치성 짙은 사안에 대한 견해 표명은 의도와 관계없이 특정 정파를 지지하는 효과가 있다. 인권위 정책권고의 수용률이 90%를 넘지만 수용이 안 된 것들은 대개 이런 종류다. 2기에서도 그럴 것인가.
“물론이다. 앞으로도 사안이 있다면 맡은바 역할을 할 것이다. 국보법은 태생적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나며 인권을 침해한 대표적인 법이다. 이라크전쟁과 관련해 우리는 인권 측면에서 전쟁에 반대했지만, 정부의 파병은 외교 국방 대외협력 등 국가경영의 더 큰 틀에서 어쩔 수 없이 결정된 측면이 있다고 본다.”
인권을 이야기하면서 법과 제도만 바라보고 경제 측면을 빼 놓으면 허구가 된다. 물질적 토대 없이 인간이 존엄을 유지하고 사람답게 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에 대한 그의 생각을 물었다.
―인권위가 경제 및 복지문제에 구체적으로 개입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인권을 위한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에 대한 견해 표명은 필요하지 않을까.
“그동안 정치적 권리 신장을 위한 노력이 있었고 성과도 있었다. 신체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은 꽤 신장됐다. 그러나 아직도 사회적 권리는 취약하다. 취임사에서 아동 여성 노인 도시빈민 장애인 외국인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에 대해 언급했다. 인권수요가 가장 큰 분들이다. 병이 났을 때 진료 받을 수 있는 건강권을 비롯해 교육권, 노동권, 주거권의 문제는 매우 절실하다. 또 기초생활수급자는 국가 보조를 받지만 기초생활수급자에 포함되지 않은 빈곤계층(차상위계층)에는 아무 대안이 없다. 실태 조사 및 연구 검토를 한 후 행정 각 부에 정책권고할 생각이다.”
그는 2003년 ‘세계문화유산기행-앙코르·티베트·돈황’(창비)을 펴냈다. 역사와 문명의 지층이 두꺼운 이들 지역을 안내하며 그의 느낌도 섞어 넣은 역사기행서. 그는 또 고미술계에서 꽤 알려진 질그릇 수집가다. 골프나 술을 멀리하며 20여 년간 모은 토기 1578점을 200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해 화제가 됐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시회를 다녔고 보성중고교 시절 미술시간에 미술사 강의를 들었다. 일찍부터 문화적 세례를 받은 셈이다. 1982년쯤부터 토기를 집중 수집했다. 개인적으로 질그릇박물관을 열고 싶었지만 이를 유지할 돈이 없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모두 기증했다. 올가을 중앙박물관이 서울 용산에서 새로 개관하면 내 이름이 붙은 55평짜리 질그릇전시실이 생긴다.”
인권과 문화예술의 관계는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인권이다. 인류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며 역사를 돌아보고 다른 세상을 많이 만날수록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알게 된다”는 것이 최 위원장의 생각이다.
허승호 기자 tigera@donga.com
▼최영도 위원장은▼
△1938년 서울 출생
△1957∼1964년 서울대 법과대학 및 대학원△1961년 제13회 사법시험 합격
△1965∼1973년 대전지법, 수원지법, 서울형 사지법 판사
△1973년 변호사 개업
△1980년 한국고미술협회 고문
△1991년 한국화랑협회 고문
△1992년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이사 겸 인권위원장
△1993년 대법원 사법제도심의연구위원회 위원
△1996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장
△1996년 KBS교향악단 운영위원
△1999년 (현)한국인권재단 이사
△2004년 12월 (현)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참고실 > 인물초대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시장 / 이명박 (0) | 2010.02.01 |
---|---|
KAIST / 로버트 로플린 (0) | 2010.02.01 |
]‘관정교육재단’ 운영/ 이종환 (0) | 2010.02.01 |
독도보전協 / 신용하 (0) | 2010.02.01 |
긴급구호팀장 / 한비야 (0) | 2010.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