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서예실

안중근의 그의 붓

淸潭 2009. 12. 2. 12:45

우리가 잘 아는 안중근의 총, 우리가 모르는 그의 붓

유묵으로 보는‘의사의 내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한인은 암살의 맹약을 할 때 무명지를 절단하는 오래된 관습이 있다’는 내용을 담은 안중근 엽서.
안중근(1879~1910)을 흔히 의사(義士)라 부른다. 총 잘 쏘고 말 잘 탄 의병대장이라 칭송한다.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영웅으로 기억한다. 하나 그뿐이다. 우리는 안중근을 잘 모른다. 안중근을 제대로 연구하지 않았다. 그 동안 ‘소설 썼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허구가 많았다.


안 의사의 의거·순국 100년을 맞아 단 한 가지라도 철저한 고증으로 사실을 밝히고 그를 제대로 보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2010년 1월 24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는 ‘안중근 유묵전-독립을 넘어 평화로’가 그 한 축이다. 단추 하나 남기지 않은 안 의사가 유일하게 남긴 유품이라 할 글씨 34점과 원판사진자료 등 70여 점이 한 세기 만에 처음 한자리에서 공개돼 그를 증언한다.

◆사형 앞둔 최후의 40일에 집필=안중근은 어린 시절 독선생을 두고 동양 고전과 한문 교육을 받았다. 19세에는 천주교 세례를 받으며 신학문에도 눈떴다. 늘 책을 읽고 신문을 구독하며 역사의 흐름과 동서양의 만남을 주시했다. 한 손에 총을, 또 한 손에 붓을 든 문무(文武) 겸비의 선비였던 셈이다. 학교를 설립한 교육 계몽가였고, 평양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던 사회운동가였다. 이런 다양한 활동이 녹아 든 것이 그의 글씨였다.

①‘天與不受 反受其殃耳(천여불수 반수기앙이)’. 종이에 먹, 136.8X32.2㎝, 1910년 2월, 보물 569-24, 개인소장. ‘하늘이 주는데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을 뿐이다’라는 뜻으로 제국주의 일본이 하늘이 주는 것, 곧 천명(天命)을 받지 않으면 반대로 그 재앙을 받으리라는 경고다. 이 글씨의 소장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몸을 정갈히 하고 이 앞에서 절하며 하루를 시작했다고 한다.
②‘天堂之福 永遠之樂(천당지복 영원지락)’. 종이에 먹, 136.2X33.2㎝, 1910년 3월, 일본 야요이미술관 소장. ‘천당의 복은 영원한 즐거움이다’라는 뜻. 삶과 죽음, 극락과 지옥, 결코 둘이 아니다. 현세에서의 생명은 곧 마감하나 천당에서 영원히 복락을 누릴 것이라는 비운 마음을 드러냈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제공]
안 의사는 사형 언도된 1910년 2월 14일부터 순국한 3월 26일까지 최후의 40여 일간 뤼순 감옥에서 수십 점이 넘는 글씨를 썼다. 그것도 모두 그를 옥에 가둔 적, 일본인이 청해서 써준 것이다.

서예 역사에서 이런 극적 사례는 없다. 옛 글을 보고 베낀 글씨가 아니라 안 의사 몸에 완전히 녹아서 흘러나온 절절한 육필이다. 죽음을 앞둔 31세 장부가 모든 것을 비우고 도인의 심정으로 써내려 간 그 유서야말로 안중근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일종의 사리라 할 수 있다.

◆안중근의 분신이자 인격체인 글씨=안중근의 글씨서체는 해서(楷書)나 해행(楷行) 중심의 ‘안진경체’ 계통이다. 자기 조형이 이미 굳건히 서있는 강직하고 좋은 글씨다. ‘글씨가 곧 그 사람이다’라는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예다.

일본인을 꾸짖는 내용에서는 필획에서 칼바람이 인다. 동양평화를 갈구하는 마음에서는 장엄한 붓 그림자가 드리운다. 죽을 날이 가까워오니 하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기도에서는 편안하면서도 온유한 글씨체가 보는 이 마음까지 흔든다. 안 의사가 남긴 『안응칠 역사』가 문자로 기록한 일대기라면, 유묵은 붓으로 정신을 내보인 또 한 편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이동국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는 “까막눈 후손들이 안 의사의 글씨를 제쳐놓고 그를 연구했다는 일 자체가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이 큐레이터는 “안중근의 유묵은 의거·순국 100년이 되는 지금까지 의사로서 주로 알려진 안중근의 이미지를 넘어 평화주의자로서 사상가이자 종교인, 선비이자 대장부로서의 전인격적인 면모를 상당수 복원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제 길을 못 찾고 있는 현대 서예가 되새겨볼 점이 안 의사 유묵에 맺혀 있다.

정재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