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아는 안중근의 총, 우리가 모르는 그의 붓
유묵으로 보는‘의사의 내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한인은 암살의 맹약을 할 때 무명지를 절단하는 오래된 관습이 있다’는 내용을 담은 안중근 엽서. | |
안 의사의 의거·순국 100년을 맞아 단 한 가지라도 철저한 고증으로 사실을 밝히고 그를 제대로 보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2010년 1월 24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는 ‘안중근 유묵전-독립을 넘어 평화로’가 그 한 축이다. 단추 하나 남기지 않은 안 의사가 유일하게 남긴 유품이라 할 글씨 34점과 원판사진자료 등 70여 점이 한 세기 만에 처음 한자리에서 공개돼 그를 증언한다.
◆사형 앞둔 최후의 40일에 집필=안중근은 어린 시절 독선생을 두고 동양 고전과 한문 교육을 받았다. 19세에는 천주교 세례를 받으며 신학문에도 눈떴다. 늘 책을 읽고 신문을 구독하며 역사의 흐름과 동서양의 만남을 주시했다. 한 손에 총을, 또 한 손에 붓을 든 문무(文武) 겸비의 선비였던 셈이다. 학교를 설립한 교육 계몽가였고, 평양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던 사회운동가였다. 이런 다양한 활동이 녹아 든 것이 그의 글씨였다.
①‘天與不受 反受其殃耳(천여불수 반수기앙이)’. 종이에 먹, 136.8X32.2㎝, 1910년 2월, 보물 569-24, 개인소장. ‘하늘이 주는데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을 뿐이다’라는 뜻으로 제국주의 일본이 하늘이 주는 것, 곧 천명(天命)을 받지 않으면 반대로 그 재앙을 받으리라는 경고다. 이 글씨의 소장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몸을 정갈히 하고 이 앞에서 절하며 하루를 시작했다고 한다. ②‘天堂之福 永遠之樂(천당지복 영원지락)’. 종이에 먹, 136.2X33.2㎝, 1910년 3월, 일본 야요이미술관 소장. ‘천당의 복은 영원한 즐거움이다’라는 뜻. 삶과 죽음, 극락과 지옥, 결코 둘이 아니다. 현세에서의 생명은 곧 마감하나 천당에서 영원히 복락을 누릴 것이라는 비운 마음을 드러냈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제공] | |
서예 역사에서 이런 극적 사례는 없다. 옛 글을 보고 베낀 글씨가 아니라 안 의사 몸에 완전히 녹아서 흘러나온 절절한 육필이다. 죽음을 앞둔 31세 장부가 모든 것을 비우고 도인의 심정으로 써내려 간 그 유서야말로 안중근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일종의 사리라 할 수 있다.
◆안중근의 분신이자 인격체인 글씨=안중근의 글씨서체는 해서(楷書)나 해행(楷行) 중심의 ‘안진경체’ 계통이다. 자기 조형이 이미 굳건히 서있는 강직하고 좋은 글씨다. ‘글씨가 곧 그 사람이다’라는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예다.
일본인을 꾸짖는 내용에서는 필획에서 칼바람이 인다. 동양평화를 갈구하는 마음에서는 장엄한 붓 그림자가 드리운다. 죽을 날이 가까워오니 하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기도에서는 편안하면서도 온유한 글씨체가 보는 이 마음까지 흔든다. 안 의사가 남긴 『안응칠 역사』가 문자로 기록한 일대기라면, 유묵은 붓으로 정신을 내보인 또 한 편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이동국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는 “까막눈 후손들이 안 의사의 글씨를 제쳐놓고 그를 연구했다는 일 자체가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이 큐레이터는 “안중근의 유묵은 의거·순국 100년이 되는 지금까지 의사로서 주로 알려진 안중근의 이미지를 넘어 평화주의자로서 사상가이자 종교인, 선비이자 대장부로서의 전인격적인 면모를 상당수 복원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제 길을 못 찾고 있는 현대 서예가 되새겨볼 점이 안 의사 유묵에 맺혀 있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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