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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50] YS의 '하나회 해체'

淸潭 2008. 8. 9. 10:56
[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50] YS의 '하나회 해체'
 
민간정부의 군 통제권 회복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1990년 1월 22일 민정(노태우), 민주(김영삼), 공화(김종필)의 '3당 합당'은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을 일시에 뒤집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오랜 야당 생활을 청산한 김영삼은 그해 4월 17일 노태우·김종필·박태준을 만나 "나 대통령 안 해! 이 군바리 부스러기들아"라며 자신에 대한 공작정치를 항의해 대통령의 사과를 받았다고 주장한다(노태우는 YS가 그런 적 없었다고 함).

김영삼은 1992년 12월의 대선에서 당선됐고, 193만표 차로 패한 김대중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1993년 2월 25일 김영삼이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30여 년 만에 군(軍) 출신이 아닌 대통령의 정부가 들어섰다. 김영삼은 이를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정부를 '문민정부'라 불렀다. 3월 5일 육사 졸업식 때 대통령이 "올바른 길을 걸어온 군인에게 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은 불행한 시절이 있었다"고 할 때만 해도, 그가 그렇게 빨리 칼을 빼 들 줄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3월 8일, 김영삼은 군의 핵심 요직을 맡고 있던 육군참모총장 김진영과 기무사령관 서완수를 전격 경질했다. 군 최강의 인맥이자 전두환·노태우 두 대통령을 배출한 군내(軍內) 사조직 '하나회' 척결의 신호탄이었다. 다음날 김영삼은 청와대 회의에서 "모두 깜짝 놀랬제"라며 씩 웃었다. 비서관들은 "각하, 국민들이 얼떨떨해하고 있습니다"라면서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김영삼은 "전격적으로 숙정을 단행해야만 저들이 스스로를 규합할 시간을 주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이로부터 벌어진 대대적인 군내 물갈이로 취임 석 달 만에 무려 42개의 '별'이 떨어졌다. 12·12 관련 장성들을 예편시켜 하나회 해체의 절정을 이룬 5·24 숙군(肅軍) 때는, 대통령이 달아 줄 '별 계급장'이 모자라 국방부 간부들 옷에서 잠시 떼내 썼다고 한다.

▲ 1993년 2월 25일 국회 앞 광장에서 열린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손을 들어 박수에 답례하고 있는 가운데,‘ 마지막 군 출신 대통령’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뒷자리에 앉아 있다. /조선일보 DB

김영삼의 군 개혁은 오랜 세월 동안 '절대 성역'으로 간주됐던 군부가 민간 정부에 의해 확실한 통제를 받게 된 대전환이었다. 당시 한양대 교수 리영희는 "DJ가 집권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기무사(옛 보안사)의 대통령 독대와 대민 정보수집 부서를 폐지하는 등의 제도적 조치도 뒤따라 '군인의 정치화'가 차단됐다. 이후 군내 새로운 사조직 형성이 불가능해지게 되면서 쿠데타의 가능성도 사라졌다.

  • ▲ 1993년 2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의 제14대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과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다룬 대한뉴스 영상물.
입력 : 2008.08.09 04:14 / 수정 : 2008.08.09 05: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