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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44) 6·10 민주항쟁

淸潭 2008. 8. 9. 10:46
[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44) 6·10 민주항쟁

 '탁 치니 억'?… 100만명 거리로 피플파워에 무릎꿇은 철권통치


발행일 : 2008.08.02 / 종합 A6 면 기고자 : 유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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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서리가 없는 둔탁한 부위에 눌리고 폐에 물이 찼습니다. …흉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입니다." 1987년 1월 15일 밤,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을 끝낸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1과장 황적준이 서울지검 당직검사 안상수에게 말했다. "물고문이 분명하다!" 하루 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경찰 조사 중 사망한 서울대생 박종철의 사인(死因)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앉아있다가 갑자기 '억'하며 쓰러졌다"며 쇼크사로 은폐하려던 경찰의 음모와 함께, 5공 정권의 폭력성과 비도덕성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신민당 총재 이민우의 '내각제 구상' 이후 야권이 일시 분열 양상을 보이자, 4월 13일 대통령 전두환은 간선제를 규정한 기존 헌법을 옹호한다는 '4·13 호헌(護憲) 조치'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김대중이 대표하는 재야 세력이 연합해 개헌 투쟁에 나섰다. 5월 18일 폭로된 박종철 사건 축소·은폐의 진상은 여기에 불을 붙였다.

6월 2일, 전두환은 민정당의 13대 대통령 후보로 육사 11기 동기인 노태우를 지명했다. "두려움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각하, 끝까지 지도해 주십시오."(노태우)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중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마침내 민정당이 잠실체육관에서 대통령 후보 선출식을 열던 10일, 40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2400여 명이 연행됐다. 그날부터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는 "호헌 철폐, 독재 타도!"라는 구호와 함께 전국의 33개 도시로 확산됐으며 '넥타이 부대'로 대표되는 중산층이 대거 참여했다. 26일에는 전국에서 100만 명 이상이 시위에 나섰다.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을 권리와 대의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한 운동이었다.

사태는 심각했다. 당시 불안해진 노태우가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할 생각을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19일 오전 10시30분, 전두환은 군 고위 지휘관들을 청와대로 소집하고 군병력 배치 계획을 결정했다. "내일 새벽 4시까지 전부 진압해요." 오후 2시, 주한 미국대사 제임스 릴리가 전두환을 찾아와 미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계엄령 선포는 한·미 동맹을 저해할 수 있으며 1980년 광주 같은 불행한 사태를 재발할 수 있습니다…." 오후 4시30분, 계엄령은 유보됐다. 5공은 사면초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