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 전 그날 포성은 멎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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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17개국서 수집
지난 7월 27일은 한반도에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55주년이 되는 날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빚어진 6·25전쟁은 동포끼리 살육전을 벌이는 참상을 낳으며 3년 만에 일단락을 지었다. 그날이 1953년 7월 27일이다.
협정의 정식 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 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이란 긴 이름이다.
연합군과 공산군은 수년간 지속된 전쟁에 부담을 느꼈다. 비밀접촉을 거친 양측은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첫 정전회담이 시작된 지 2년 만에야 ‘남북한 사이에 군사분계선을 긋고, 비무장지대(DMZ)를 설정’ 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협정에 최종 서명했다.
6·25전쟁은 많은 상처를 남겼다. 도시가 파괴되고, 고아가 거리를 떠돌았으며, 포로들이 속출했고, 피란민이 줄을 이었다. 본지는 당시의 생생한 모습이 담긴 희귀사진들을 공개한다. 정성길(67)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이 장기간 수집해 보관해온 것이다. 정 명예박물관장은 “사진 박물관을 세우기 위해 17개국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보물 같은 사진들”이라며 “상당수가 처음 공개되는 역사의 현장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진 출처에 대해 “AP, UPI 등 외국 종군기자들이 촬영해 본사로 송고했던 보도사진들과 존 프레이라는 참전 미군 장교가 개인적으로 보관해온 사진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대사의 한 장면을 후대에 공개하는 것도 애국이라 생각한다”라며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봐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1. 사인
서명하고 있는 유엔군과 북한군.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은 이 사진에 대해 “유엔군 대표인 미국의 해리슨(Harrison) 소장과 북한군 대표인 남일 중장이 1953년 6월 23일 판문점에서 사인하는 모습”이라며 “하지만 구체적으로 이 사진이 어떤 서류에 서명하는 모습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양측은 포로교환 조건 등에 이견을 보이며 수차례 회담과 결렬을 거듭하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최종 서명하게 된다.
2. 흥남부두
국군과 유엔군의 함경도 진격을 환영했던 흥남 시민들은 순식간에 바뀐 전세로 인해 탈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오갈 곳 잃은 시민들이 몰린 곳은 흥남 부두. 미군은 후퇴를 서두르고 있었지만, 자유를 찾아 밀려든 시민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당시 미군 LSD를 타고 북한을 탈출한 흥남 시민은 총 10만여명. 이 사진은 미군 LSD가 출항하기 사흘 전인 1950년 12월 19일의 흥남부두 모습이다. 엔진이 뿜어대는 자욱한 연기 속에 나부끼는 태극기가 보인다.
3. 원산 폭격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한 맥아더는 “유엔군이 동해안 원산 일대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할 것”이란 거짓 정보를 흘렸다. 맥아더는 정보를 진짜로 믿게 하기 위해 원산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사진은 B26폭격기가 투하한 소이탄이 작렬하는 모습. 북한은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인 1950년 9월 14일 첩보를 통해 유엔군 상륙을 간파했지만 작전 장소를 원산으로 오인해 손을 쓰지 못했다는 사실이 러시아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 기록을 통해 드러났다. 맥아더의 성동격서(聲東擊西)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4. 부산 포로수용소
1951년 3월, 부산 포로수용소 모습. 부산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것은 1950년 7월이었다. 당초 취지는 한국군과 유엔군이 획득한 포로 전체를 수용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1950년 8월 포로 수가 2000명에서 그 해 12월 13만명으로 급증하자 관리에 문제가 생겼다. 고심하던 유엔군 사령부는 거제도에 새로운 수용소를 설치, 운용하기로 결정한다. 뒤편에 포로들 것으로 보이는 빨래가 널려 있다.
1. 기차 지붕 위라도
1951년 1월의 인천 기차역. 지붕 위까지 빼곡하게 피란민들이 올라탄 기차가 남쪽을 향해 출발하고 있다. 철로 건너편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미처 기차를 타지 못한 피란민들. 봇짐을 짊어진 총각, 보자기로 머리를 싸맨 아낙, 목도리를 두른 소녀, 중절모를 쓴 아저씨, 학생모를 쓴 청년, 포대기에 아이를 감싸 업은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2. 남으로 가는 포로들
남한행이 결정되자 환호하는 반공 포로. 포로교환 협정이 체결된 1953년 6월 8일,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 포로 석방’을 전격적으로 결정했다. 미군은 반공 포로 석방이 휴전회담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 이에 반대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에게 비밀리에 명령을 하달했다. 사령관은 거사일을 6월 18일로 정한 뒤, 반공 포로 3만8000명을 일시에 석방했다. 이는 강대국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가 할 수 있는 강력한 조치였다.
3. 북으로 가는 포로들
북한을 택한 전쟁 포로들이 북으로 돌아가는 모습. 유엔군과 남한으로부터 보급 받은 의복을 벗어던진 포로들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아이러닉한 점은 이들을 싣고 가는 트럭이 미제라는 점. 트럭 보닛에 적힌 ‘USA’란 표기와 범퍼 앞에 쓰인 영문 글자가 눈길을 끈다.
1. 미군과 북한 어린이
지리를 묻는 미군에게 길을 알려주는 북한 어린이들. 큼지막한 군복과 러닝 셔츠를 억지로 입은 모습이 낯설다. 러닝 셔츠를 입은 어린이의 왼쪽 머리는 부스럼으로 벗겨졌다. 식량 부족과 영양실조가 만연했던 당시엔 전국적으로 부스럼이 유행했다. 왼손에 지도를 들고 길을 묻는 미군은 시가를 피우고 있다.
2. 한강 다리 복구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30분. 수많은 피란민이 다리를 건너는 가운데 예고 없이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다. 피란민 500~800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북한군의 남침 사흘 만에 미아리 방어선이 밀리면서 서울이 위협 받게 되자 한국군 총참모장이 내린 결정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27일 밤 10시 대전서 ‘서울 사수’ 연설을 한 지 4시간 만이었다. 사진은 한강을 건너기 위해 임시 가교를 만드는 모습. 지프에 태극기를 다는 한국인이 보인다.
3. 미군의 새해인사
전투가 한창이던 1951년 12월 14일, 강원도 고성 전투에 참전한 미군 병사들이 1952년 새해를 맞아 고국의 가족에게 인사하기 위해 촬영한 사진. 같은 분대원으로 보이는 11명의 미군들이 “Happy New Year from Korea 1952”라고 적힌 종이 카드를 나눠 들고 있다. 사진 왼편 끝에 있는 병사 옆으로 USA라 적힌 손수레가 보인다. 고성 전투는 6·25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의 하나로 꼽힌다.
4. 한 톨의 쌀이라도
폭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중앙청 인근의 모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은 “6·25전쟁 당시 중앙청 앞에 곡물창고가 있었다”며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된 곳이 당시의 곡물창고”라고 말했다. 젊은 아낙과 처녀들이 쇠 양동이를 들고 타다 남은 곡물을 수거하고 있다. 정 명예박물관장은 “건물 외벽만 남은 두 채의 빌딩 역시 곡물창고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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