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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김대중(金大中)은 체포됐고 김영삼(金泳三)은 가택 연금됐다. 보안사령관 전두환(全斗煥)은 정국을 장악했다. 전국 주요 지점으로 출동한 군 병력 중 7공수여단 33·35대대는 전남 광주(光州)로 향하고 있었다. 이날 오전 전남대 교문 앞에서 학교를 점령한 33대대와 학생 200여 명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고,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을 난폭하게 진압했다. 학생들은 금남로에 집결한 뒤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선생 석방하라"고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요청으로 시위 현장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가혹한 진압을 시작했다. 그들은 진압봉으로 시위대와 시민들을 무차별 가격하고 짓밟았으며 건물 안까지 추격해 체포했고, 옷을 벗기거나 머리를 땅에 박게 하기도 했다. '여학생의 가슴을 도려내 죽였다'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가 유포됐고, 강경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은 학생과 함께 저항에 나섰다. 19일 계엄군은 처음으로 발포했고 일부는 대검으로 시위대를 찔렀다. 반격에 나선 시위대에 의해 파출소가 습격당하고 광주 KBS와 MBC 건물이 불탔다.
20일 시위대 수만 명과 계엄군은 금남로에서 대치했다. 21일 시위대는 탈취한 시내버스와 장갑차를 몰아 돌진했고, 계엄군은 시위대에 본격적인 발포를 시작했다. 시위대는 경찰서와 파출소 등에서 무기를 탈취해 무장했다. 진압군은 시 외곽으로 철수했고 '시민군'은 전남도청을 점령했다. 수습대책위원회는 무기 반납 문제를 둘러싸고 강·온파로 나눠 대립했다. 27일 새벽 4시, 계엄군은 대대적인 무력 진압에 나서 도청을 탈환했다. 5시 21분에 상황은 '종료'됐다. 1995년 서울지검과 국방부 검찰부는 광주 시위 관련 사망자 수는 민간인 166명, 군인 23명, 경찰 4명 등 모두 193명이며 행방불명자는 47명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신군부의 부당한 집권 기도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었던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한국현대사의 치명적인 상처로 남아 있다. 5공 정권은 아예 '80년 광주'라는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으며, 대학 신입생들은 통과의례처럼 사망자들의 참혹한 을 보며 의식화 교육을 받았다. 또 '미국이 계엄군 출동을 묵인했다'는 논리는 반미(反美) 의식으로 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