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부처님 마음

[천불만다라]27. 폭력에 대한 경책

淸潭 2008. 7. 26. 17:40
[천불만다라]27. 폭력에 대한 경책
‘자비 실천’은 神 아닌 사람의 몫
기사등록일 [2008년 07월 22일 화요일]
 

모든 것은 폭력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 이치를 자기 몸에 견주어
남을 죽이거나 죽게 하지 말라
 - 『법구경』

『법구경』 제129게송은 남에게 저지르기 쉬운 폭력에 대하여 경책하는 내용이다. ‘폭력’은 남을 공포에 떨게 하고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게 한다. 폭력이 사라지면 곧 평화를 얻게 되고 이를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자비(慈悲)의 실천이 필요하다. 폭력과 평화의 사이에는 인간의 의지에 의한 자비 실천만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이다. 특히 불교에서 폭력을 금지하는 대상에 있어서는 인간이든 동물이든 모든 생명이 평등하다.

자비(metta)의 실천이란 ‘자신과 다른 생명이 서로 상대하고 있을 때 자신을 부정하고 다른 이를 북돋우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마음가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나만의 이익으로 행동하지 않고, 남을 이익 되게 하는 입장에서 행동하는 마음가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곧 나와 남을 나누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자타불이(自他不二)라고 하는 가치관과 윤리관에서 행동하는 자세인 것이다. 나의 생명 나의 존재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함을 인식하는 순간에 나와 함께 다른 이의 생명 다른 이의 존재 또한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 자비 실천의 첫 걸음이 된다. 이러한 인식은 너와 내가 생명의 뿌리에서는 하나이며(不二), 일체가 평등하다고 보는 공(空)의 보살도를 실천하는 근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게송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모든 생명은 폭력을 두려워하고 살상(殺傷)을 고통스러워한다. 지혜로운 이는 이 이치를 살펴서 폭력과 고통을 자신의 몸에 견주어 생각함으로서 남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리고 곧바로 폭력의 반대방향인 자비를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간다.

‘자타불이’는 자비의 출발

불교는 어려운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치적으로 살펴서 너무나 타당한 것을 실천하도록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신이나 절대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영장(靈長)인 사람이 하는 것이고, 사람이 자비를 실천할 때, 우리의 주위가 그대로 가장 편안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 멀리 있는 신의 나라나 부처의 나라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 곧 바로 나타나는 우리들의 삶의 터전이 편안해 질 때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다.

남아메리카 등지의 천주교를 국교로 하는 국가에서는 천주교의 교리에 의해서 낙태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지난 주 TV에서 아홉 살 소녀가 등교 길에 강간을 당하고 임신과 성병을 얻게 된 일이 방영되었다. 영문도 모르고 벌어진 이 커다란 불행 앞에서 소녀는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려워할 뿐이다. 아이의 부모는 어린 딸의 고통을 최소화하려고 오열하고 있다. 파렴치한 인간이 저지른 형체 없는 폭력 앞에 그 일을 대처하는 국가의 기관장과 천주교 주교들의 태도 또한 어린 소녀에게는 폭력 이상의 두려움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인간이 만든 법의 제도와 종교적 이념의 강요는 또 하나의 무소불위의 폭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혜롭지 못한 인간은 끝없이 이어지는 폭력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지 못하고 신에 기대어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을 발생시키고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었다. 생명문제에 있어서 모든 생명이 공평하게 공유할 수 있는 참다운 선(善)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하는 방송으로 기억에 남는다.

불교는 생명 존중에 제일의 가치를 두는 종교이다. 그리고 맹목적인 생명 존중이 아니라, 생명 자체의 가치를 인식하고 모든 생명에 자비심이 최우선 되어야 한다는 대명제를 지켜왔다. 동물에 대한 폭력이나 군주의 침략전쟁을 당연시 할 때에 석가모니는 이를 정면에서 부정한 불교의 역사를 갖고 있다. 종교의 권위주의 대신에 불교는 모든 생명에게 자비심을 최우선의 과제로 내세웠던 것이다. 종교의 권위만 내세우고 생명에 대한 진정한 자비심이 없다면 이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진정한 자비심은 반드시 지혜의 판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지혜와 자비는 손의 손등과 손바닥과 같아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이치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지혜와 자비로 살피지 못한 죄업에 대해서는 절대로 반복하지 않겠다는 뼈를 깎는 참회의 행위가 요구되어 왔다. 생명에 대한 자비의 실천은 제도와 이념까지도 뛰어넘어야 한다.

법-종교 강요는 또 다른 폭력

인간이 지혜롭지 못하면 자비도 실천하기 어렵다. 참다운 지혜를 상실해 버린 오늘날 남의 고통을 외면한 채 탐욕만 난무하고, 삶의 풍요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동물을 대량 살상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동물은 인간에 종속된 존재로서 함께 논의 될 사안이 아니라고 말해버리면, 그것으로 이야기는 끝날 것이다. 그러나 불교적인 가치관에서 생명의 문제를 생각한다면 폭력 앞에서는 인간이나 동물이 동일하게 고통을 느낀다고 하는 이치를 깨닫는 일이다. 그러므로 폭력의 문제에 있어서는 폭력을 당하는 대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폭력을 자행하면서도 죄의식조차 없는 무자비한 인간의 마음이 문제이다.

위의 게송을 통하여 폭력은 고통을 느끼는 어느 누구에게도 자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으로 가슴에 새겨야한다. 폭력을 버리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남의 고통을 바로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고 폭력의 반대방향인 자비수행을 바로 실천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본각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그림=이호신 화백, 수화자문=원심회 김장경 회장


958호 [2008-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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