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7.05 03:53 / 수정 : 2008.07.05 07:20
- 1966년 6월 조선일보가 마련한 대담 에서 김현옥(왼쪽) 시장과 소설가 박 경리씨가 서울시 개발에 관한 이야기 를 나누고 있다. 조선일보 DB
- 제3공화국이 처음부터 수도 서울 개발의 의지를 지녔던 것은 아니었다. 1963년 서울시장이 된 윤치영은 "서울을 좋은 도시로 만들지 말아야 농촌 인구가 몰려오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1966년 모든 것은 달라졌다. 4월 4일 제14대 서울시장으로 39세의 김현옥(金玄玉)이 부임한 뒤, 이제 서울이라는 도시의 모습은 그 전과는 완전히 바뀌게 된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육사를 졸업한 김현옥의 별명은 '불도저'였다. 그는 '돌격'이라고 쓰인 헬멧을 쓰고 현장을 누볐다. 실로 엄청난 도로가 새로 뚫리거나 넓혀졌다. 불과 8~10m 폭이던 독립문~구파발, 왕십리~광나루, 청량리~망우리 등 외곽 간선도로의 너비가 35~40m가 됐고, 낡고 느린 전차 노선들은 완전히 뜯겨졌다. 사직터널과 삼청터널, 남산 1·2호 터널 등을 뚫고 마포대교를 기공했다. 서울역 고가도로와 북악 스카이웨이, 청계 고가도로를 건설했고 강변도로를 처음 만들었으며 144개의 보도육교를 가설했다.
도심 개발 사업도 본격화됐다. 세운상가·낙원상가와 수백 동의 시민 아파트가 건설됐고 여의도 개발계획이 세워졌다. 1969년 12월 준공된 제3한강교(지금의 한남대교)는 '강남 개발'의 신호탄이었다. 사창가의 상징과도 같던 '종삼(종로3가 유곽)'은 1968년 9월 일명 '나비작전'에 의해 완전히 사라졌는데, 한 아가씨가 이곳을 시찰하던 김현옥을 몰라보고 "아저씨, 놀다 가요"라며 소매를 붙잡은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 청계 고가도로가 건설되기 직전인 1967년 5월 청계천의 복개 공사 모습. 청계 고가도로는 김현옥 서울시장이 뚫은 수많은 도로들 중 하나였다./서울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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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개발 목표를 2년 전의 1100%로 잡기도 했던 그의 '속도전'에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966년 6월 12일자 조선일보의 대담에서 소설가 박경리는 김현옥에게 "많은 혼란이 뒤따른다고 시민의 불평도 많다"고 말했다. 결국 1970년 4월 8일 준공 4개월밖에 안 된 와우아파트가 붕괴돼 33명이 사망한 대형 참사가 일어났고, 김현옥은 그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김현옥의 서울 개발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서울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를 바꾼 인물"이라는 찬사가 있는가 하면, "임면권자의 정치적 목적과 전시 효과를 위해 군대식으로 총력 개발을 했다"는 비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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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1970년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며 숱한 도시 개발에 앞장선 김현옥 시장 당시의 대한뉴스 영상물. '서울시 교통난 완화'(1966.4), 지하도 준공을 다룬 '건설의 메아리'(1966.6), 세운상가 건설을 전한 '토막소식'(1967.7), 북악스카이웨이와 아현고가도로의 개통을 담은 '달라지는 서울'(1968.10), 금화시민아파트 준공을 소개한 '우리는 건설한다'(1969.10).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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