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월남 파병
입력 : 2008.07.04 03:11 / 수정 : 2008.07.04 17:57
- 맹호부대의 환송식을 보도한 1965년 10월 13일자 조선일보.
- 1964년 봄, 주미대사 김정렬은 워싱턴에 온 주독대사 최덕신을 통해 대통령 박정희가 내린 특명을 전달받았다. "미국 정부 요인들에게 월남(越南·베트남) 방어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한국군을 파견하겠다고 제안하시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선택이었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정부가 정치적 위기에 몰려 있던 바로 그 시점에, 박정희는 미국조차 탐탁잖은 반응을 보이고 있던 월남 파병을 강행하려 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월남이 공산화된다면 동남아와 한국의 안보도 위협받을 것이 분명하고, 또 미국이 주한미군을 빼내 월남에 투입하려는 구상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월남 파병은 이렇듯 미국이 아닌 한국 정부의 전략적인 주도로 시작됐다.
1964년 9월에 이동병원 부대 등 140명이 처음으로 월남에 갔고, 1965년 2월 2000명의 공병·수송부대가 파견됐다. 마침내 10월 12일, 해병 청룡부대와 육군 맹호부대로 이뤄진 전투부대 2만명이 30만 인파의 환송을 받으며 본격적인 파월(派越)의 막을 올렸다. 1973년 3월 철수를 끝낼 때까지 모두 31만2853명의 한국군이 파병됐다. 이들은 1만여 회의 대규모 작전과 55만여 회의 소규모 작전을 펼쳐 4만1000여 명의 적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 1967년 월남(베트남)의 늪지대에서 작전을 전개하고 있는 맹호부대 장병들.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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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파병은 대한민국에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 줬다. 필요한 물자와 용역을 국내에서 조달했기 때문에 월남으로의 수출이 급증했다. 군인·노동자가 받은 봉급과 현지 한국 기업의 사업수익까지 합하면 10억 달러 이상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이 돈은 2,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핵심 재원이 됐다. '월남'이란 말은 시대를 대변하는 코드였다. 신중현이 작곡하고 김추자가 노래한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가 히트했고, 군가 '맹호는 간다'가 애창곡이 됐다. '월남치마'가 유행했으며 '월남뽕'이라는 게임이 생겨났다.
하지만 '번영의 터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피와 희생이 필요했다. 4600여 명의 장병이 이역만리에서 전사했고, 1만700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枯葉劑)는 아직도 수많은 참전 용사들에게 고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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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9월 백마부대의 월남 파병을 기록한 영상물. 당시 국군영화제작소가 만든 '월남전선' 제7호.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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