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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18] 6·3 사태와 韓日협정

淸潭 2008. 7. 7. 16:31
  • [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굴욕협상' 논란속 빗장 연 한(韓)·일(日)
  • [18] 6·3 사태와 韓日협정
  •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입력 : 2008.07.03 03:25 / 수정 : 2008.07.03 07:55
    • 대학생들의 대규모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보도한 1964년 3월 25일자 조 선일보 지면. 조선일보 DB
    • 1951년부터 1960년까지 한·일 양국은 국교 정상화를 위한 다섯 차례의 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했다. 경제개발계획의 자금이 절실히 필요했던 박정희(朴正熙) 정부는 대일 국교 정상화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1962년 11월 12일, 중앙정보부장 김종필(金鍾泌)과 일본 외상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사이에 대일 청구권 문제를 합의한 비밀각서 '김·오히라 메모'가 작성됐다.

      하지만 1964년 초에 이 내용이 알려지면서 제3공화국은 커다란 위기 국면을 맞았다.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 대신 헐값차관으로 타결하려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고, 야당과 학생들은 4·19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에 나섰다. 3월 24일 서울 시내 대학생 5000명이 "굴욕 외교에 반대한다"며 거리로 나선 이후 두 달 넘게 시위가 이어졌다.

      급기야 6월 3일에는 1만여 명의 시위대가 광화문까지 진출했다. 일부 불량배들도 끼어든 군중은 파출소에 방화하고 군 트럭을 탈취했으며 청와대 외곽에선 경찰 저지선이 일부 뚫렸다. 그날 저녁 9시40분, 정부는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 기간 55일 동안 1120명이 검거됐고, 서울대 시위 주동자 김중태·현승일과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 이명박 등 348명이 구속됐다.
    • 1965년 6월 22일 일본 도쿄 수상관저에서 열린 한일협정 조인식. 조선일보 DB
    • 드디어 해를 넘긴 1965년 6월 22일, 일본 도쿄 수상관저에서 외무장관 이동원(李東元)과 일본 외상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가 한일기본조약에 서명, 14년간의 국교 정상화 협상에 마침표를 찍었다. 8억 달러의 경제협력자금 대신 침략에 대한 사죄를 생략해 버린 이 조약은 지난 43년 동안 당연히 '굴욕 협상'이었던 것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2008년 5월 3만6000여 쪽의 한·일 회담 문서 전부를 처음으로 분석한 국민대 일본학연구소(소장 이원덕)는 상당히 새로운 평가를 내놓았다. 한국 정부가 미국과 협력해 일본을 압박하는 전술을 썼고, 유능한 외교 관료들의 치밀한 사전 준비를 통해 청구권 액수를 높이는 등 비교적 성공을 거둔 협상이었다는 것이다.

    •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인 6.3 사태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기록한 영상물. 1997년 제작된 '아! 대한민국'의 일부분. /유석재 기자